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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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손에 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전에 <보건교사 안은영>과 <옥상에서 만나요>를 중도 하차했기 때문이었는데, (오래전에 ) 그 이후로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라 할지라도 이 작가의 책임을 깨닫는 순간부터는 마음을 접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내 시간이 빼앗기는 것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냐 없냐의 문제였는데, 세상에 책은 너무나도 많고 나는 그 책을 죽기 전까지 다 읽을 수 없을 것이므로 나는 중도 하차를 하는 것에 마음이 덜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책이 어쩌다가 선물로 내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 읽기 전까지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을 했다. 이 책은 어떻냐고. 긍정적인 답변이 왔지만, 어쨌든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정 아니다 싶으면 책을 덮어버리기로 하고 나는 어렵사리 책을 폈다.

11. “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심시선 씨에서 파생된 이들이 꾸려가는 이야기다.

그동안 장례를 지내지 않았지만 10주기라는 명목하에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반대는 없다. 아니, 반대를 할 수조차 없다. 심시선 씨의 가족이야말로, ‘모계사회’니까.

83.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제사가 아니라, 심시선 씨가 젊었던 시절 걸어 다녔던 하와이를 걸어 다니면서 찾은 보물들을 나누는 방식으로의 제사.

심시선 씨로부터 파생된 인물은 생각보다 꽤 많다.

여러 인물이 나온다.

자식들과 그 자식들.

자식들과 그 자식들은 주연이자 조연이고, 단역이다.

그래서 일일이 기억을 해야만 하기에 가장 앞장에 가계도가 떡하니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인물을 잘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과감하게 패스했고.

책을 읽다 보면 누군가에게 특별히 더 마음을 주는 인물이 생기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야 가장 마음에 많이 남는 사람을 골라내야 했는데 어쩐지 그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특별하게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기도 했고.

288.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중간에 심시선 씨의 기록들이 챕터의 앞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야기 자체보다 그 기록이 더 좋았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건 이 부분이었는데, 최근에 나는 울면서 “삶이 재미가 없네. 그래서 재미있는 건 안간힘을 쓰면서 찾아보려는데 잘 안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명쾌하게 답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내 변화가, 또 내가 적응하는 기간이 너무나도 잔잔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문장을 읽어내려가면서 어떻게 질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질리지 않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노력해서 일구어내는 것도 그 재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나한테도 그 재능을 옷 입히고 싶었다. 지금 나는 삶이라는 거대한 분야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지금은 잠시 ‘재미없는 시절’일뿐이라고 생각하며 질리지 않게, 지치지 않게 잘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25. 첫 번째 남편도 두 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그 세 번의 결혼이 불행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 생각나는, 자기합리화를 해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공누구’와는 달랐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졌고, 그 책임들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었던 심시선 씨.

304. “(…) 한 번에 대단한 시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알게 되었달까. 어두운 곳에서 짚어가며 넘어져가며 탐색할 수박에 없다는 걸.”

“(…)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여전히 그러고 싶어?”

“나도 원하지만…… 살면서 얻길 바라는 게 달라질 것 같아. 다른 모양의 빵을 만들고 싶을 것 같아. 계획했던 모양이 아니라. 그래도 나랑 빵을 만들길 원해?”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화수가 남편에게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계획했던 모양이 아니라 다른 모양의 빵을 만들고 싶을 것 같다고. 그런데도 나랑 빵을 만들고 싶으냐고. 삶에 유연성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 잘되지 않는다. 이렇게 살다가 잘 안되면 저렇게도 살아보고, 그렇게 살아보다가 저렇게 살아보고 싶으면 노선도 바꿔보고 그러고 살고 싶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지만 이제까지 경험한 것들이 나를 만들어 고착화시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혼잣말을 한다. 그래도 틈은 만들어야지, 하고.

322. “네가 아니면 누가 낳아?”

“나보다 덜 다친 사람. 나보다 세상을 덜 괴로워하는 사람이. 뉴스를 그냥 통과시킬 수 있는 쪽이.”

전부 이해할 수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그렇게 생각하게 된 마음을.

313. 각자 의미있는 것들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기쁘고 내년부터 평소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한 번 정도는 하길 잘한 것 같네요. 서로의 보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과 엄마를 떠올리는 시간을 가지며 오늘밤을 보냅시다.

그렇게, ‘종잡을 수 없이 괴팍했던 제사 비슷한 것’이 끝이 났다.

331.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참 좋겠다. 심시선 씨라는 사람에서 파생된 것이.

엄마라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면 나도 이런 마음을 가져보고 싶다. 이번 생에는 영 틀린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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