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시 한 걸음 - 오늘 하루도 묵묵히 나아가는 당신에게
진태현 지음 / 오픈도어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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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진태현 씨가 책을 냈다고 했다. 7:3으로 읽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두었는데, 어쩌다보니 내 손에 들려있다. 최근에 글을 하나 썼다. 짧은 글이었지만 그것을 쓰기까지 나에게는 참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 글은, 이 책을 낸 진태현 씨의 공이 크다. 일기장에나 썼었던, 쉽사리 말할 수 없었던 것들. 그 일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나는 울먹거리는 사람이고 마음이 저려오는 사람인데, 반면에 내 일상은 자주 아무렇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번번이 무너지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의문이 생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찾아보지는 못했다. 타인과 동질감을 갖고 싶지도, 위로를 주고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가장 큰 것은 나도 내 상태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점에 있었다. 자주 괜찮으면서도 괜찮지 않은 순간들을 다뤄내는 게 여전히 서툰 내 상태를. 그러면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나를 채찍질할 것만 같았으니까.



한 번도 아이를 갖고 싶다거나 아이를 가져보겠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때때로 찾아오곤 했다. 그것도 ‘아, 이제 좀 살만하다.’라고 생각할, 그때쯤. 찾아올 때마다 놀랍고 당황스럽고 두려웠지만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는 기쁨이라는 감정도 조금씩 자라났었다. 지켜내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압도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종전과는 다른 미래를 설계해나가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후, 한동안 나는 아이 생각이 없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던 시절이었고, 마지막 순간들이 내게는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한 달 뒤, 너무나도 주기적으로 찾아온 신체 사이클에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게 끔찍하게만 여겨졌고 온몸의 피를 빼내고 싶다는 생각을 몇 년 동안이나 담고 살아왔다. 만일 내 남편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이었고 다시 시도해보자고 했다면 나는 아마 지금 그이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아이를 잃은 건 같았지만, 출산과 후처치의 역할은 여성의 몸인 내 몫이었기에.



아이의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한 후 박시은 씨가 진태현 씨에게 ‘미안해’라고 했다는 걸 보면서 나 역시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아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게 네 잘못도 아닌데 왜 미안해.”라는 말을 하게 될까? 그럼 남편이 미안해하는 대상은 누굴까. 아이?...  하지만 아이는 전적으로 여성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 배우자에게 미안해할 수밖에 없다. 그게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내 남편은 내가 미안하다고 했을 때, 그건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고 방방 뛰었지만, 정말 그럴까. 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그 일에 대한 상처를 받는 것은 너무 개인적인 것이기에 트라우마도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만실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입장도, 분만실에서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입장도 겪어보지 못하면 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걸. 난 여전히 지금도, 남편이 절대 겪어보지 못할, 설명할 수도 없는 아주 순간의 꼬물거림을 잊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설명해낼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한쪽의 아픔과 슬픔이 조금이라도 더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각자의 애로사항이 있는 것이다.



내가 들었던 말 중 그런 말이 있었다. “그래도 너는 하나였잖아. 내가 아는 사람은 쌍둥이였어.” 정말 그 사람은 몰랐을까.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어떤 사람한테는 그게 전부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 말이 위로가 된다고, 정말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난 지금도 위로는 하지 못하겠다. 그게 타인에게 닿지 못하는 서툴고 섣부른 위로일까 봐. 같은 일을 겪었더라도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이상, 어떤 위로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 나는 이제야 바깥의 공기를, 세상의 공기를, 타인의 아픔을 아주 조금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내 시선이 아닌 그들의 시선에서 조금 더 따라가볼 수 있게 되었다. 내 경험이 전부인 양 누군가의 상처를, 아픔을, 슬픔을, 재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해졌다.



네이버 클라우드에서 N년 전의 사진을 보여준다고 할 때마다 나는 속절없는 마음으로 엑스를 눌러버린다. 보지도 못하면서 삭제할 마음도 없는 주제인 것이다. 책을 읽으며 사람들이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각자의 삶에 몰두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자주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의 문장처럼 살아있는 한 끝나는 일이란 없는 것이니까. 말미에 진태현 씨는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나 역시 병원에 입원해서 있는 동안 내내 지금은 내가 자만하며 오만하게 살아온 결과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겸손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쓴 적이 있었다. 겸손은 내가 무언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내 의지로 무언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할 때 자발적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기도 했었던 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

겸손을 배웠으니,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야만 한다.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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