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 시인선 86
김상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떠돌이 부부가 마을로 흘러들었다.

그들은 주민 가운데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곽,

아슬아슬한 암벽 밑 울퉁불퉁한 황무지에 집을 지으려고

온 마을에 아부했고 겨우 집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허락한 주민 가운데 그누구도

땅 주인은 아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다, 군대와 함께.

부부의 영혼과도 같은 그 집을 무너뜨리러 온다.

 

 

2016년 10월

김상혁

 

-<시인의 말>, 5쪽

 

 

 

 한달에 한권이라도 보자고 한 시집을 석달 전에는 세권이나 만났다. 그때는 어쩌다가 그랬을까. 시집을 그렇게 봤다고 무언가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저 ‘이달에는 시집을 세권이나 보다니’ 했을 뿐이다. 세권 보고 쓴 걸 그달에 모두 블로그에 올리지 못했다(찾아보니 시집 세권 보고 쓴 거 올린 적 있다. 그때 다 올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책을 천천히 느리게 읽고 쓰고 블로그에는 더 느리게 올린다. 게으른 것도 있고 다음달로 미루고 싶은 것도 있어서다. 지난달에는 시집을 한권도 못 보았다. 시집을 한권도 못 보고 지나간 달은 무언가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 시집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한번 볼까 했는데 이제야 만났다. 제목은 괜찮게 보이지만 시는 잘 모르겠다(이 말 빼놓지 않고 하는구나). ‘이야기’ 라는 말이 있어선지 시가 길고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집이 얇구나 생각했지만 끝까지 보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시를 좀더 천천히 봐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 그냥 다른 때와 다르지 않은 속도로 보았다. 아주 빠르지 않지만.

 

 맨 앞에 나온 시인의 말부터 이야기다. 땅주인도 아닌 마을 사람들한테 부부가 어떤 땅에 집을 짓겠다고 아부했는데, 땅주인은 나중에 군대와 찾아온다니. 이 이야기 자체로도 슬프게 보인다. 슬픔보다 어이없음인가. 지금 갑자기 예전에 많았던 판자촌이 떠올랐다. 거기 살던 사람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런 판자촌을 지은 건 땅주인이었을까 집장사였을까. 그런 곳에서라도 살았던 사람은 조금 나았을까. 돈이 없어서 자기 몸을 누일 방 한칸도 없이 사는 사람도 있다. 시간이 흐른 뒤 땅주인은 재개발이네 하면서 좋지도 않은 집에 살던 사람을 모두 쫓아냈겠지. 그런 일이 오래전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 오래전이 아닐 때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지 않을까. 소설에서 재개발이 된다는 곳 집을 사서 살던 사람을 보았는데, 그런 사람은 진짜 있었겠지. 시인의 말과 판자촌이나 재개발 지역 사람하고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땅주인이 군대와 함께 찾아오는 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만일 기쁨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기쁨이겠지. 기쁜 사람이 날마다 찾아가 두 팔로 나무를 안아주었다, 나무는 자라 숲이 되고, 숲은 끝없이 퍼져 해안까지 닿았다, 그렇대도 그것이 나무의 기쁨, 숲의, 바다의 기쁨은 아닌 것이다.

 

 먹는 기쁨, 보는 기쁨, 생각하는 기쁨

 영혼의 기쁨 같은 건 없다.

 그렇대도 기쁜 영혼 같은 건 있었으면 좋겠다.

 

 기쁜 남자가 식구를 위해 해마다 울타리를 칠하였다, 기쁜 아내가 기쁜 아이를 낳았다, 그들 행운이 이웃을 웃게 만들었다, 그렇대도 이불을 뒤집어쓴 저마다의 행복한 꿈속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열매가 쏟아지는 미래, 정성스럽게 채색된 추억, 잠든 이들이 기쁨에 사로잡히는 어둡고 안전한 시간. 거기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깨지지 않는 기쁨 같은 건 없다.

 

 그렇대도 기쁜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기쁜 생활 같은 건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가 가방에 챙겨준 물건들이 하나둘 망가지는 동안 기쁜 아이는 자라 많은 아이들이 되었다, 그들이 끝없이 퍼져 바다 건너까지 닿았다, 거기서는 기쁜 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그곳의 기쁨이다.

 먹는 기쁨, 보는 기쁨, 옛날 사람을 떠올리는 기쁨

 죽은 사람 기쁨 같은 건 없다.

 그렇대도 기쁜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기쁜 생각 같은 건 있었으면 좋겠다. 기쁜 생각으로 바라보는 기쁜 물결이 있었으면 좋겠다.

 

-<기쁨의 왕>, 14~15쪽

 

 

 

 남의 기쁨은 남의 것이지만 우리는 함께 기뻐하고 웃기도 한다.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나누고 싶어서 다른 사람한테 말하기도 한다. 그런 걸 듣고 겉으로는 기뻐해도 마음속으로는 조금 슬퍼하기도 할까. 아니 꼭 그러지는 않겠지. 1연에서 기쁜 사람이 두 팔로 나무를 안아주자 나무는 잘 자랐다. 이건 분명 기쁜 사람 마음이 나무한테 전해져서일 거다. 깊은 것까지 똑갚이 느낄 수 없다 해도 다른 사람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겠지. 이 시에서는 기뻐하는 게 사람만이 아니다. 마지막 연에서는 기쁜 생각, 기쁜 물결도 말한다.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기쁘다. 이건 기쁘다는 말을 봐설지도.

 

 

 

 나는 나보다 슬픈 사람을 다섯이나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몽유병자, 주정꾼, 어린 자식을 둘이나 잃은 부인도 있어요 나는 그들을 다 병원에서 봤습니다

 

 잠결에 자신을 찔렀고, 취해서 애인을 때렸고, 아이들이 바다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네요. 너는 어떻게 되었니? 너도 우리만큼 슬프니? 나한테 질문하였습니다

 

 하나같이 슬픔의 왕들이에요 나한테도 병원이 필요하지만 나 같은 게 병원에 와도 되는 걸까, 이런 슬픔에도 치료가 필요할까, 동그랗게 둘러앉았는데 나는 고개도 못 들고  (<슬픔의 왕>에서, 18쪽)

 

 

 

 여기에는 기쁨의 왕도 있고 슬픔의 왕도 있다. 슬픔의 왕을 볼 때는 조금 슬펐다. 내 마음이 슬퍼서였겠지. 시에서 말하는 사람 ‘나’는 자신한테 어떤 슬픔이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나중에 말했을지도. ‘나’는 자신의 슬픔보다 다른 사람 슬픔이 더 커 보였나 보다. 이건 조금 반대 같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다른 사람 일이 아닌 자기 일이 되면 그것을 더 크게 느끼지 않는가. 난 ‘나’의 슬픔도 ‘나’한테는 무척 크리라고 생각한다. 슬픔도 누군가한테 말하면 좀 낫다고 한다. 아무한테나 말하기보다 그걸 들어줄 만한 사람한테 하면 좋겠다. 병원 의사는 불평하지 않고 듣겠지.

 

 사람은 다 이야기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이야기가 남기도 하겠지. 누구한테나 이야기 한두가지 아니 더 많이 있을 거다. 그런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괜찮겠다. 자기 이야기뿐 아니라 남의 이야기에도.

 

 

 

희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