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2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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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황인숙을 알게 된 게 언제인지 잘 생각나지 않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처음 본 시는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다. 이 기억이 정확한지 잘 모르겠지만. 그 시는 친구가 알려주었다. 그 뒤에 그 시가 담긴 시집을 사서 본 것 같기도 한데 그 시집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나온 황인숙 시집을 다 산 건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산 게 《리스본行 야간열차》(2007)다. 그게 나왔을 때 산 건지 나중에 산 건지. 지난 시간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때가 많은 건 아니지만, 어느 때부터는 흐릿하다. 흐릿한 시간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이대로 흐릿하게 살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좀 슬프구나. 흐릿하게 지냈다 해도 어떤 건 생각나기도 한다. 늦은 밤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한 것. 사는 데 별로 도움 안 되는 거다. 본래 그런 거 아닌가, 자신이 좋아하는 건 다른 거 생각하지 않고 한다. 내가 그걸 엄청 좋아했던 걸까, 그저 시간을 보내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그때는 별로 쓸쓸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황인숙 시를 어떻게 봤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걸 보기 전에 예전 것을 한번 봤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를 텐데 게을러서 그러지 못했다. 시가 어둡지 않고 밝았다는 인상만 생각났다. 시말이 통통 튀었던가. 여기 담긴 시에도 그런 느낌이 있다. 그렇다 해도 시가 아주 밝지는 않다. 밝고 맑게 보이지만 시에 흐르는 정서는 쓸쓸함과 슬픔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예전에 쓴 시도 그랬을까. 2015년엔가 《리스본行 야간열차》를 가끔 펴보기도 했는데, 다 읽지 않고 조금만 봐서 잘 모르겠다. 아니 거기에도 쓸쓸함이나 슬픔이 있었을 거다.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시로 쓴다고도 한다. 기쁜 일을 쓰는 적이 없지 않겠지만 슬픔이나 아픔을 더 많이 쓰겠지. 김기택 시인은 시 쓰기를 우는 방법에서 하나라고도 했다.

 

 

 

슬픈 건 내 마음

고양이를 봐도 슬프고 비둘기를 봐도 슬프다

가게들도 슬프고 학교도 슬프다

나는 슬픈 마음을 짓뭉개려 걸음을 빨리한다

쿵쿵 걷는다

가로수와 담벼락 그늘 아래로만 걷다가

그늘이 끊어지면

내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걷는다

그림자도 슬프다  (<그림자에 깃들어>에서, 9쪽)

 

 

 

 모든 게 슬프게 보이는 건 자기 마음이 슬퍼서구나. 나도 가끔 어떤 모습을 보면 슬프기도 했다. 어쩐지 지금은 덜한 것 같다. 별로 마주치지 않아서일지도. 나를 슬프게 한 건 길가에서 장사하는 할머니, 사각형 통 안에 든 햄스터, 철창 너머에 묶인 강아지다. 큰 개는 길에서 만나면 무서운데 줄에 묶인 개는 안되어 보인다. 자신도 잘 모르는 슬픔을 느끼는 건 언젠가 끝이 찾아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 아직 젊었을 적에

젊은 줄 모르고 젊었지

그때는 아무도 내게

젊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늙었다고

가르쳐주지 않는 사람이 없네  (<아현동 가구 거리에서>에서, 37쪽)

 

 

 

점심시간 막 지나

황성자 씨 가방 챙겨 나간다

─아줌마, 어디 가세요?

─집에 가

─왜요?

─김 반장이 가래네

황성자 씨 순한 눈

끔벅, 끔벅하면서

얼굴 붉히고 웃는다

 

황성자 씨가 화장실 갔다가

작업대로 못 돌아오고 공장을 헤맬 때면

젊은 아가씨들 킥킥거렸다

 

37년 다닌 공장

더 다니려고 숨겨온 치매

기어이 들키고 말았네

 

-<미로>, 137쪽

 

 

 

 시인 황인숙은 1958년생이다. 내가 시인을 알았을 때 본 시에는 젊음도 있었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나이 듦이 보인다. 이상은 노래 <언젠가는>에서도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한다. 젊을 때는 젊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나이 들면 나이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구나. 한국은 나이 드는 걸 슬프게 생각하게 한다. 젊을 때 힘들게 일하고 나이 들고 그제야 조금 편하게 살려고 하니 병이 들기도 한다. 황인숙 동생은 나이 들고 로또를 샀다. 시인 동생이 그 시를 보고 “누나, 이런 시는 왜 썼어.” 했을 것 같다. 잘 걸어다니지 못하는 할머니가 높은 아파트에 사는 것도 슬프게 보인다. 할머니를 모시는 걸 테지만 할머니는 갇혀있다는 느낌도 들 거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 먹고 늙는다. 그다음에는 세상을 떠나겠구나. 평소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만큼 자신이 늙는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이 먹는 걸 우울하게 생각하기보다 지금이 가장 젊을 때다 생각하고 사는 게 낫겠지만. 나이 든 분 마음도 조금 헤아리면 좋겠다.

 

 

 

어제도 그제도 오셨으니

내일도 오실 거죠?

모레도 글피도,

언제까지라도 오실 거죠?

 

네 부드러운 레몬빛

눈 속에서 아른거리는 딱정벌레

가냘픈 기대

 

아니야, 아니!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눈빛

네 연한 레몬빛

내 머릿속에 시리게 쏟아지네

 

차라리 얼른 저버릴까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약속

가슴 저미네

영원히는 뛰지 못할 내 가슴

 

-<영원히는 지키지 못할 그 약속>, 34쪽

 

 

 

 지금 한국에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황인숙은 1984년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뽑혔다. 황인숙을 시인이 되게 해준 시 제목에 고양이가 들어갔다니. 몇해 전에는 《도둑괭이 공주》라는 소설도 썼다. 거기에는 길고양이한테 밥을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번 시집에도 고양이 이야기가 많다. 길고양이한테 밥을 주다 안 좋은 말을 듣고, 어떤 아파트 사람은 그곳 지하실 문을 닫고 새끼를 모두 죽게 했다. 그냥 잠시 살게 해도 될 텐데. 길에서 사는 고양이뿐 아니라 길에서 사는 사람 이야기도 조금 있다. 길에서 길고양이를 봐도 나쁜 짓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길고양이에는 주인이 버린 것도 있을 거다. 동물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면 처음부터 기르지 않았으면 한다. 황인숙 시는 고양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시를 고양이처럼 쓰는가 보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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