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오은 시를 읽는 걸 들었어. 누가 소개한 것 같은데 누구였는지 생각나지 않아. 그건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그러면서 글 쓰는 사람이었는지 노래하는 사람이었는지 하는 생각을 하고, 라디오 방송은 아침에 한 건지 낮에 한 건지 기억해내려 하다니. 그래도 떠오르지 않아. 그날은 스치듯 들어서 그럴 거야. 라디오 방송을 귀 기울여 들을 때도 있고, 그냥 틀어두기만 할 때도 있어. 소개한 사람은 잊었지만 ‘오은’이라는 시인 이름은 잊지 않았군. 이번에 내가 만난 건 그때 소개한 시집은 아닌 것 같아. 그때 들은 시가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 말이 재미있었던 것 같거든. 그런 건 여기에서도 볼 수 있어. 오은은 작란(作亂) 동인이야. 이 말 뭔가 있을 것 같은 말처럼 보이지. 장난을 저렇게 쓴 게 아닐까 싶어. 이건 여긴 실린 시 <청문회>(40쪽)를 보고 알았어. 내가 좋아하는 해는 ‘좋아해’고 싫어하는 해는 ‘싫어해’야. 별로 재미없구나. 지금 생각난 건 이것뿐이어서. 하나 더 있어 띄어쓰기를 잘해야 한다고 하면서 보기로 드는 말, ‘아버지가 방에 들어간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
말장난처럼 보이는 말이라 해도 허투루 볼 수 없어. 말을 갖고 놀면서 뼈 있는 말을 하니까. 다 그러면 무척 무거워지겠지. 그런 것도 있고 조금 가벼운 것도 있는 것 같아(확실하지 않은 말이군). 아니 마냥 가볍다고 말할 수 없기도 해. 이랬다 저랬다 하는군. 어떤 중요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바로 알아듣기 어려워. 이건 내 느낌일 뿐이군. 잘아는 사람은 바로 알아듣겠지. ‘네 개’와 ‘네 개’는 무슨 뜻일까. 글자는 같지만 다른 뜻을 나타내는 말도 있어. 어떤 건 하나만 쓰였는데 다른 뜻도 생각하게 해. 시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군. “주머니에서 빛바랜 동전들이 쏟아졌다 / 다보탑이 무너졌다 / 벼 이삭이 흩어졌다 / 이순신 장군이 엎드렸다 / 학이 곤두질했다 (<아무개 알아?>에서, 27쪽)”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어. 다른 건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순신과 학은 뭐지 한 거야. 앞에서 한 말을 잘 생각했다면 바로 알았을 텐데. 아는 것이라 해도 조금 다르게 쓰니 모르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군.
파란색과 친숙해져야 해
바퀴 달린 것을 좋아해야 해
씩씩하되 씩씩거리면 안 돼
친구를 먼저 때리면 안 돼
대신, 맞으면 두 배로 갚아줘야 해
인사를 잘해야 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해
받아쓰기는 백 점 맞아야 해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돼
밤에 혼자 있어도 울지 말아야 해
일기는 솔직하게 써야 해
대신, 집안 부끄러운 일은 쓰면 안 돼
거짓말을 하면 안 돼
꿈을 가져야 해
높고 멀되 아득하면 안 돼
죽을 때까지 내 비밀을 지켜줘야 해
대신, 네 비밀도 하나 말해줘야 해
한국 팀을 응원해야 해
영어는 잘해야 해
사사건건 따지려고 들면 안 돼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도 돼
대신, 정말 필요할 때는 거짓말을 해야 해
가족을 지켜야 해
학점을 잘 받아야 해
꿈을 잊으면 안 돼
대신, 현실과 타협하는 법도 배워야 해
돈 되는 것을 예의 주시해야 해
돈 떨어지는 것과 동떨어져야 해
내 둘레 사람들한테는 늘 친절해야 해
대신, 나만 사랑해야 해
나한테만 베풀어야 해
뭐든 잘해야 해
뭐든 잘하는 척을 해야 해
나를 과장해야 해
대신, 은은하게 드러내야 해
적당히 웃어넘기고 적당히 꾀어넘길 줄 알아야 해
눈치를 잘 살펴야 해
눈알을 잘 굴려야 해
다움은 닳는 법이 없었다
다음 날에는 다른 다움이 나타났다
꿈에서 멀어진 대신,
대신할 게 걷잡을 수 없어 늘어났다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비밀처럼
다움 안에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다움>, 79~81쪽
시 한편 다 옮겼어. 이 시집을 보면서 시가 다 길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 짧은 것도 조금 있어. 짧게 말하기 어려워서 길어진 거겠지. <다움>은 웃기면서도 슬픈 느낌이 드는 시야. 어른이 아이한테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좋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잘살려면 착하기보다 눈치가 빨라야 한다 같잖아. 여기에는 이런 느낌이 드는 시도 있어. 요즘 사회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해.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떨어진다는 말도 해. 모두가 떨어지고 하나만 남아서 우리라고 할 수 없게 돼. 그래도 시인은 시인하고 시를 쓰겠다 말해. 시로 사람을 위로하고 힘을 주려는 거겠지. 그것보다 말로 노는 게 먼저지만. 이 말은 시를 한층 밑으로 떨어뜨리는 걸까. 시가 재미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재미있는 것하고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시인은 시를 말로 노는 것이다 했어. 실제 그런 시를 쓰는 사람이 있었다니. 오은만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어. 말로 노는 건 생각하는 건지, 저절로 나오는 건지. 난 말장난 생각해도 별로 떠오르지 않아. 평소에 그런 걸 거의 생각하지 않아서 그래. 앞으로는 가끔 생각해 볼까. 오은 시를 보고 익혀보는 것도 괜찮겠어. 무엇을 익힐 수 있을까. 이건 좀 썰렁하지. 멋진 말로 멋진 이야기 하는 시도 좋고 말장난 같지만 뜻이 있는 시도 좋다고 생각해.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