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한테 기억은 뭘까. 언젠가도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사람한테 기억은 그 사람을 이루는 한 부분이어서, 어떠한 일일지라도 억지로 잊으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잊고 싶은 일도 있겠지만, 그 시간을 견뎌야 더 단단해지겠지. 자신은 잊고 싶지 않은데 기억을 빼앗긴다면. 그런 일은 마법이 있는 세계에서 있을 법하다. 이 책을 보는데 <원피스>가 생각나는 건 왜인지. 거기에서 기억을 두번 다뤘다. 한번은 어느 섬에서 해마가 천년용을 보고는 자신도 그게 되고 싶어서 사람들 기억을 빼앗았다. 그곳에 루피와 동료도 갔다. 하룻밤이 지나고 잠을 안 잔 한사람만 빼고 모두 동료를 만난 뒤부터 일을 잊어버렸다. 그때는 자신이 누구고 어디에 살았는지 알았다. 그다음에는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거였다. 다른 사람은 당황했는데 루피만은 기억이 없어도 그대로였다. 살면서 겪은 일이 그 사람을 만드는 것도 같은데 루피는 그것과 멀어 보인다. 성격은 엄마 배 속에 생겼을 때 다 정해진 건지도 모르지만, 살면서 조금씩 바뀌기도 하겠지. 루피는 기억을 모두 찾고 천년용이 되고 싶어하는 해마한테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스스로 기억을 만들라고 한다(<원피스>에 나오는 천년용은 새와 비슷하다).

 

두번째는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드레스로자 편에서다. 악마의 열매 힘을 가진 슈가가 손을 대는 사람은 장난감이 되었다. 슈가 때문에 장난감이 되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잊었다. 이것은 저주와 가깝지 않은가. 장난감이 된 것도 억울한데 소중한 사람한테 잊히다니. 장난감이 된 사람을 잊게 하는 건 지배자가 생각할 만한 일이다. 실제 그 힘을 자기 마음대로 쓴 건 드레스로자를 자기 것으로 만든 도플라밍고다. 그런 힘도 좋게 쓸 수 있을까. 장난감이 된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자신이 누군지 말하면 될 텐데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계약 때문에. 다행하게도 가장 처음 장난감이 된 퀴로스는 슈가와 계약을 맺지 않아서 다른 장난감보다 자유롭게 말하고 움직였다. 드레스로자를 되찾으려고 십년이나 애썼다. 기억은 아니지만 <원피스>에는 어떤 일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건 작가가 말하는 게 아니고 만화에 나오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작가는 그러면 안 된다 말하고 싶은 거겠지. 어인섬에서는 신태양해적단 선장 호디 존스가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호디 존스는 사람한테 나쁜 일을 당한 적이 없다. 어인에는 사람과 잘 지내려는 사람도 많았다. 호디는 그런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거겠지. 이 소설에서는 색슨족 전사 위스턴이 그렇다. 위스턴은 어렸을 때 브리튼족한테 끌려가서 그곳에서 싸우는 방법을 배우고 브리튼족을 형제처럼 여기기도 했는데,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브리튼족이 색슨족한테 한 일을 잊지 않고 미워해야 한다고 하고, 괴물한테 물린 에드윈한테 브리튼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늘 간직하라고 말한다.

 

전쟁을 겪은 사람은 그 전쟁을 일으킨 사람을 늘 미워할지도 모르겠다. 그 일을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언제까지고 미워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미워하다보면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까. 폭력은 폭력을 낳고 쉽게 끊이지 않고 이어질 거다. 그건 누구를 위한 걸까. 브리튼족이 색슨족을 많이 죽였나보다. 그 뒤에 색슨족이 브린튼족을 공격할 것을 걱정한 아서 왕은 사람들이 그 일을 잊게 했다. 마법사가 용한테 마법을 걸고 용이 내뿜는 입김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잊었다. 모든 것을 한번에 다 잊는 건 아니고 걱정스럽고 안 좋은 일을 쉽게 잊어버렸다. 다른 기억까지 잊으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테니까. 무엇인가를 잊는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그걸 크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두려운 일은 바로 잊지 않는 것 같다. 아이가 괴물한테 끌려갔을 때는 걱정하더니, 아이가 괴물한테 물린 걸 알고는 그 아이가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지금도 거기 있어요, 액슬?”

 

“지금도 여기 있어요, 공주.”  (책 속에서)

 

 

이야기는 나이 많은 부부 비어트리스와 액슬이 어느 날 아들을 만나러 길을 떠나는 일로 시작한다. 이건 시작하고 조금 지나선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액슬은 자신의 기억이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비어트리스한테 아들이 사는 마을에 가자고 한다. 비어트리스는 액슬이 아들을 만나러 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한다. 액슬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액슬과 배어트리스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옛일을 잊었다. 길을 떠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잊지 않으려 애쓴다. 서로 잊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걸 잊었으니 걱정스럽겠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색슨족 전사 위스턴과 괴물한테 물린 아이 에드윈과 아서 왕 조카 가웨인 경을 만난다. 길을 떠나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두 사람은 아들을 만나려고 길을 나섰는데, 기억을 찾으려는 일로 바뀐 듯하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자신들이 왜 기억을 잊는지 알게 된다. 가웨인은 아서 왕이 암컷용 케리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말로 지금까지 용을 지키고, 위스턴은 색슨족 왕이 시킨 일을 하려 했다(용을 죽이려는 일). 가웨인과 위스턴 그리고 에드윈은 지난날과 오늘 그리고 앞날 같기도 하다. 거기에 영향받은 일반 사람 액슬과 비어트리스. 제대로 설명 못하면서 이런 말을 꺼냈다.

 

잊지 않아야 하는 역사가 생각난다. 개인이 살아온 시간도 역사와 다르지 않겠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오랜 시간 함께 살았다. 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좋지만 좋은 일뿐 아니라 안 좋은 일도 있었다. 모두 다 잊은 건 아닌 것 같지만, 용이 내뿜는 입김 때문에 잊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잊었다. 그럴 때 기억을 찾고 싶을지, 기억을 찾고도 전과 같을지. 두 사람은 기억을 찾기를 바랐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용기가 있구나. 잊어버린 기억에 엄청난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부부한테 일어난 엄청난 일은 그때는 힘들어도 시간이 흐르면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잊지 않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잊지 않아야 하는 걸 쉽게 잊어버리는 일을 말하고 싶은 거기도 하겠지. 어떤 일을 잊지 않고 사는 건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시간이 가면 잊는다. 잊지 않으려 하면 언제까지고 기억하겠지. 안 좋은 기억에 매여서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구나. 이렇게 말하는 건 쉽지만 실제로 하기는 어렵다. 말이라도 하면 조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희선

 

 

 

 

☆―

 

“에드윈! 우리 둘 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를 기억해줘. 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느낀 이 우정과 우리를 기억해줘.”  (450쪽)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오랜 세월 속에서 점점 마음을 돌리게 되었을 거예요. 아마 그게 다일 겁니다. 더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기 마련이지요.”  (46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