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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다가 잠깐 잤는데 꿈을 꾸었다. 내 팔에 쌀알보다 조금 작은 물집이 잡혀 있었다. 나는 예전에도 그런 게 생겼다가 나았다고 말했다. 엄마가 약을 바른다며 그것을 다시 보여달라고 해서 소매를 걷어서 팔을 보니 물집 같은 게 터져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엄마가 그런 거 알아보러 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고 말했다.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그 말 듣고 혹시 나도 죽는 것인가 했다. 병에 걸려서 죽고 싶지는 않나 보다. 책속에 바이러스 감염이나 페스트가 나와서 그런 꿈을 꾼 게 아닌가 싶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게을러서 죽지도 못한다. 죽으려면 자기 둘레 정리를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하나도 안 하고 사니, 앞으로는 조금씩이라도 해야 할 텐데.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나한테 별일 있을까 하는. 꿈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눈이 떠졌다. 꿈이어서 다행이다고 생각한 적은 많이 있기도 하다.
《둠즈데이 북》은 정복왕 윌리엄이 1086년 잉글랜드 지방의 인구 통계를 담은 책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중세학을 공부하는 키브린이 중세 시대에 가서 그곳에서 있었던 일과 사람에 대해 녹음해두는 것을 뜻한다. 여기 나오는 시대는 2054년 영국 옥스퍼드로 역사학자는 기계를 써서 지난 날로 떠날 수 있었다. 자유롭게 시간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그저 역사를 알아보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 시대에 간섭할 수는 없다. 키브린은 본래 1320년에 가야 했는데 문제가 일어나서 페스트가 퍼진 1348년으로 갔다.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2부 끝에서다. 키브린이 떠나고 2054년 영국 옥스퍼드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퍼졌다. 인플루엔자가 변형되었다고 했는데, 신종 인플루엔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2054년에 바이러스에 감연된 사람이 아프거나 죽기도 했는데, 중세에서 페스트에 걸린 사람은 모두 죽었다. 키브린은 페스트 예방 접종을 받고 갔다. 그래서 괜찮았는데 키브린이 신세를 진 한 집안 식구들과 신부가 모두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답답했다. 키브린이 사람들을 살리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어서였을까. 그래도 신부는 키브린을 성녀 캐서린이라 여겼고 키브린이 그곳에 와서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자신이 왜 태어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무슨 뜻이 있길래. 나는 그런 생각을 해도 답은 아직 모르겠다. 정답은 없겠지만 앞으로도 찾아야 할 것 같다.(어쩌면 별거 없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키브린이 왜 모두가 죽고 마는 1348년으로 가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키브린은 중세 시대 사람들과 살았다. 영주 집안 식구들로 아이들도 있었다. 로즈먼드는 열세 살이었는데 얼마 뒤에 결혼한다고 했다. 로즈먼드가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나이도 아주 많았다. 그리고 로즈먼드 동생 아그네스. 아그네스는 키브린이 하는 말을 처음으로 알아들었다. 키브린이 1320년이 아닌 1348년에 간 것은 키브린이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죽어가는 가운데도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을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어갈 때는 담담한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쓰다보니 마음이 조금 안 좋기도 하다. 2054년 영국 옥스퍼드에도 슬픈 죽음이 있었다. 그래도 2054년보다는 1348년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책을 보다가 떠오른 게 있다. 거기에서는 여기와는 다르게 의사가 우연히 지난 날(에도 시대)로 가지만. 머리에 있는 종양 때문이었으려나. 그것은 일본 드라마 진(仁)이다. 원작은 만화라고 한다. 에도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진은 자신 때문에 역사가 바뀌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환자들을 내버려두려고 했다. 하지만 의사이기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기만 할 수는 없어서 환자들을 돌본다. 그리고 한참 뒤에 나오는 페니실린까지 만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키브린이 역사학이 아닌 의학을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랬다면 몇 사람은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에서는 역사에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웠으려나.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얼마나 좋은 시대냐 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92년이지만. 1992년에서 1348년도 아주 먼 옛날이다. 책을 읽기 전에 조금 걱정했는데 재미있게 읽었다. 비 맞고 다니는 모습이 자주 나왔는데 추웠겠다는 생각이 든다.
희선
☆―
“하지만 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키브린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왜 울고 계시나요?” 신부가 물었다.
“신부님은 절 구해 주셨어요.” 흐느낌에 목소리가 희석되었다. “그런데 전 여러분들을 구해 내지 못했어요.”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 주 그리스도조차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
“알아요.” 키브린이 말했다. 키브린은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얼굴에 손을 댔다. 손바닥에 눈물이 고이더니 로슈 신부의 목으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성녀님은 저를 구원해 주셨지요.” 로슈 신부가 말했고 신부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두려움에서.” 로슈 신부는 콜록거렸다. “믿지 않는 마음에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키브린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신부의 두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가웠으며 벌써 굳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 모든 이 가운데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로슈 신부는 말하며 두 눈을 감았다. (764쪽)
키브린은 손바닥을 뒤집어 어스름한 속에서 손목을 살펴보았다. “로슈 신부님과 아그네스와 로즈먼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모두 기록해 놓았어요.” (8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