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문학과지성 시인선 508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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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시인 이름 알았을 때는 여자인가 했어요. 언제 남자라는 걸 알았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인터넷 책방에서 책소개에 나온 시인 사진을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밤에 10시가 넘어서도 라디오를 켜두었어요. 그날 마침 유희경이 나왔어요. 딱 하루 나오는 게 아니고 한주에 한번 나오는 거였는데 그 뒤에 챙겨 듣지는 않았습니다. 밤이어서. 예전에는 늦은 밤에 라디오 방송 듣고는 했는데, 지금은 컴퓨터를 쓰는군요. 요즘은 라디오 방송에서 시인 목소리 가끔 들을 수 있어요. 그렇게 목소리 듣기 전에는 시인한테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시인뿐 아니라 글 쓰는 사람 모두한테. 이제는 글 쓰는 사람도 그렇게 다르지 않구나 생각해요. 다른 건 세상을 더 잘 보려 한다는 거겠지요. 글 쓰는 사람도 친구 만나면 사는 이야기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기도 하겠습니다. 글 쓰는 건 일이어서 더 마음 써서 하겠지요.

 

 라디오 방송에 나온 시인이나 소설가는 말도 잘해요. 지금은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쓴다고 하더군요. 저는 말 잘 못해요. 할 말도 별로 없고. 그래도 쓰다 보면 할 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바로 해야 하는 말이 아니어서 그렇군요. 유희경 시집 사고 바로 보고 싶었는데 미루다가 이제야 만났습니다. 제가 좀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시가 어떤 풍경 같기도 이야기 같기도 하네요.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이야기라 해도 제가 알기 쉽게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시작과 끝은 없고 한 장면이 있는 듯해요. 다른 건 상상할 수밖에. 그런 걸 바로 상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네요. 시를 오래 바라보게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빨리 보기보다 어떤 풍경이고 어떤 이야긴지 천천히 봐야 그걸 조금이라도 그릴 텐데.

 

 

 

 아이가 돌을 던진다. 잔디 위를 굴러 비석에 부딪혔을 때 어떤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가족 중 몇몇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아무도 아이를 말리지 않는다

 

 아이는 재차 돌을 던진다 잔디 위를 굴러 비석에 닿는 돌은 또 다른 소리를 만든다 여전히 아이를 말리는 사람은 없다

 

 옆에서, 상복에 묻은 잔디를 떼어내던 여자가 한숨을 쉰다 한숨에도 어떤 소리가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죽어버린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그는 이제 이 자리에 없다 이 자리에 없는 그도 어떤 소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듣지 못했고 어쩌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겨울 볕은 아래로 아래로 굴러 내려가고 오늘은 뜨끈한 데가 있다 운다 울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脫喪>, 14쪽

 

 

 

 조용한 가운데 소리가 들리는군요. 아이가 돌을 굴려 비석을 치는 소리 여자의 한숨 소리. 아이가 돌을 굴려 비석을 치는 건 조금 슬프게도 보입니다. 죽은 사람이 아이 아버지 같아서. 아이는 아버지가 죽은 걸 알지만 사람이 죽는 게 어떤 건지 몰라서 돌을 굴리는 건 아닐지. 심심해서. 제목인 탈상(脫喪)은 어버이 삼년상을 마친다는 뜻이군요. 아이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아이 아버지가 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이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죽어서 여전히 슬퍼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나온 ‘나’는 누굴까 잠깐 생각해 봤는데, 시인일까요. 그렇겠네요.

 

 

 

꿈을 꾸었다

편지를 쓰다 마는

쓸 말이 없었는지

쓸 수가 없었는지

어지러워 펜을 내려놓고

바짓단을 걷어올린 강이

첨벙대는 소리를 듣다가

잠에서 깨어버렸다

커튼 틈으로 볕이 들고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악을 가둔 방──빛과 그림자>, 55쪽

 

 

 

 시에서 편지를 쓰는 꿈을 꾸어서. 저는 가끔 편지를 받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요새는 별로 안 꾸지만. 꿈속에서는 늘 편지를 못 봐요. 편지를 봤는데 봤다는 걸 잊어버린 걸지도. 이 시가 실린 곳을 폈다가 손에 묻은 볼펜 잉크를 책에 묻혔습니다. 조심해야 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안 좋아도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리겠지요. 나중에 펴 보고 아쉽게 여길지도.

 

 

 

 겨울이었다 언 것들 흰 제 몸 그만두지 못해 보채듯 뒤척이던 바다 앞이었다 의자를 놓고 앉아 얼어가는 손가락으로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리 熱을 세니 봄이었다 메말랐던 자리마다 소식들 닿아, 푸릇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제야 당신에게서 꽃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오는 것만은 아니고, 오다 오다가 주춤대기도 하는 것이어서 나는 그것이 이상토록 좋았다 가만할 수 없어 좋아서 의자가 삐걱대었다 하나 둘 셋, 하고 다시 열을 세면 꽃 지고 더운 바람이 불 것 같아, 수를 세는 것도 잠시 잊고 나는 그저 좋았다

 

-<봄>, 112쪽

 

 

 

 기다리던 봄이 와서 기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 둘 셋 하고, 다시 열을 세면 여름이 올 것 같아 수를 세지 않는 건 귀엽게 보이는군요. 수를 세지 않아도 시간은 흐를 텐데,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보다 따듯하고 꽃 피는 봄을 좋아하는가 봐요. 봄 싫어하는 사람 별로 없겠네요. 봄은 올듯 말듯 하다가 어느 순간 곁에 와 있지요. 어느 철이든 그렇던가요. 먼저 왔던 철이 떠나기 아쉬워서거나 다음 철을 만나려고 주춤 거리는 걸지도.

 

 앞부분까지 쓰고도 볼펜 잉크 묻힌 거 생각했습니다. 저는 책을 깨끗하게 보는 걸 좋아해요. 책이 닳도록 여러 번 보는 사람도 있고 책에 무언가 적거나 밑줄 긋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책을 더 깊이 볼 수 있을까요. 책은 누군가 한번이라도 보면 헌 책이겠지요. 새 책 같은 헌 책, 이젠 헌 책이다, 하면 좀 나을지. 책 보기 전에 엄마가 시킨 거 안 해서 벌 받았나 봅니다. 앞으로는 귀찮아도 엄마 말 잘 듣도록 해야겠습니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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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8 1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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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9 0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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