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의 사건은 대량생산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QC혁명의 형태로 절정에 달했다. 대량생산의 본질은 개개의 인간을 생산적으로 만드는 시스템의 설계에 있다. 그 주역은 개개의 인간이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전혀 이질적이며 동시에 큰 혁명의 한복판에 있다. 지식이 생산수단이 된 것이다. 대량생산의 주역은 시스템이었으나 지식조직의주역은 개개의 인간이다. 지식사회에서는 시스템이 아닌 개개의 인간이 조직에 있어서 변화를 낳는 주인공이며 부의 창조자가 된다.
그동안 경영, 경제, 정치를 막론하고 줄곧 나의 모든 저작의 중심 테마였던것이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과 그의 일, 공헌, 성장, 개발이었다. 21세기 사회 전환의 중심에 있는 흐름이 과거의 대량생산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부터 개개의 인간의 책임, 성과,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의이행이다. 그리고 이것이 본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핵심이다.

사람에게 일이 필요한 이유는 정신적 만족감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그것도 아주 많은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때문에 보통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고, 일하려는 의욕도 거기서 생겨난다.  - P13

자기개발이란 능력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성장해 나가는것이다. 책임에 초점을 둠으로써 보다 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자만심이나 프라이드가 아니라 긍지와 자신감이다. 이들은 한번 가지면 잃어버릴 수 없다. 외적 성장과 내적 성장을 동시에 목표로 삼아야 한다.
- P15

한 클라리넷 연주자가 지휘자의 권유로 처음으로 객석에서 연주를청취했다. 그후 그는 훌륭하게 연주하는 것을 넘어 음악을 창조하게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성장이다. 일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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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섬션 - 우리 삶을 움직이는 전제들
크리스천 오버먼 지음, 박용진.서장원 옮김 / 디모데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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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정치와 시민 정부를 언급했기에, 다시 한번 이 부분을다루어보려 한다. 정치 자체가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정치 활동을 하면 정치는 세속화된다. 정치가 세속적이며 성스럽지 않은 삶의 영역에 속한다거나, 시민 정치나 인간관계에 관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독립적 기준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과 조화를 이루는 정치 활동은 선하지만, 하나님 말씀과 충돌하는 정치는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다루는 기본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고, 그 권위 밖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정치하는 법, 사업하는 법, 가족 관계, 개인의 도덕률, 교회의 직무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기에, 특정 영역이 다른 영역에 비해 하나님의 주권이 덜 미친다고 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밖의 활동이 교회 안의 활동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적다고 볼 수 없다.
- P163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우리 마음의 선택과 동기에 따라 성과 속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성과 속을 인위적으로 나누는 것이 성경적 이분법은 아니다. 어떤 삶의 영역에서는 선과 악의 관점에서 하나님의계획에 일치하는지 여부가 바로 성경적 이분법의 기준이다.
- P164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는 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남용하거나 악용하고, 변질되게 하며 왜곡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라도 이 땅과땅에 있는 모든 것이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다는 진리를 끊임없이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토록 타락한 만물도 원래는 선하게 창조된 것이었다. 타락으로 왜곡되기는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따라 회복될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관점으로 인생을 새로운 의미로 다시 바라볼 수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경작하라는 청지기 부르심은,그분의 섭리 아래 지금 바로 여기서 성취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에 들어온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 고난과 고통, 사망이라는 결과를 낳았으나 이 세상과 만물이 마지막 심판만을 기다리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청지기 부르심은 침몰하는 배 위에서 놋쇠를 광내는 것처럼 무가치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형상인청지기로서 그 목적을 이 땅 가운데 이루어가는 것이다.
- P166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둘 때, 다음 세대 교육이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가정에는 죽기까지 서로 사랑하는 두사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가 잠시 맡겨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절제하는 사람이 되도록 훈육한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자신감과 기쁨에가득 찬 자녀는 부모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히브리 교육 모델은 자기 통제가 가능한 자녀를 키워낼 책임을 의식하고 있는 부모가 시작한다.
- P197

3모든 교육을 아버지가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헤셸이 언급한 것처럼 모든 교사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이러한 의미에서, 유대인들이 교사에게 가장먼저 하는 질문은‘어떠한 학자인가?‘가 아니라 ‘어떠한 사람인가?‘이다. 결국 학생은 교사의 지식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똑같은 사람이된다(눅 6:40). 따라서 히브리 모델에서 학생은 교사를 진정으로 존경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는 자녀가 교사를 도덕적 모델로 삼고 닮아가도록 격려했다.
- P201

17세기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 지도자 존 밀턴(John Milton)은 교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움의 목적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그분을 본받고 닮아가며, 그분에게까지 자라감에 따라 우리 영혼이 진정한 덕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류의 첫 부모가 남긴 폐해를 극복할 수 있다." 밀턴이 한 말은 히브리 모델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에게 교육은 단지 개인의 잠재력과 재능, 지성을 개발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교육은 학생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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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금쯤 히브리 사회가 훌륭한 철학자를 배출하지 못한 이유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지혜를추구한다. 그래서 신의 계시에 비추어 지혜를 추구하는 히브리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히브리인은 이미 주어진 교훈을 상고한다.하지만 그리스인은 자신들이 스스로 교훈을 만들어낸다.  - P133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사람의 잘못된 선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혼동은 우리가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이예비하신 것에 동참하는 일을 방해한다. 히브리인에게 거룩함은물리적 세상과 이 세상이 주는 정당한 즐거움에서 분리되는 것을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이 땅의 즐거움을회피하며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는 것도 의미하지않는다. 거룩함은 창조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열정에 지배되기보다 그 열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 사랑의 경계 안에서 인생의 선한 것들을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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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를 들면, 자기 마음이나 지성에 따라 다른 길이 끌린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것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일이 아니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신적 계시를 통해 진리를 확인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기댈 수 있는 믿을 만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계시를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인간의 이성으로 계시에 순복하면 그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을수 있다.
- P74

더 많은 예가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사업, 자녀 양육, 직장, 결혼 등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다음과 같은질문을 던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과 감각으로 옳음.
적절성, 선, 진실 등을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초월적인 도움이 필요한가?
히브리인은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인정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고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큰 그림을 이해할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인에게는 만인이 따라야 할 객관적 근거나 도덕 기준이 없다. 그들에게는 성경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없었다. 그들이 인격적이고 무한하신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리스의 대중은 수없이 많은 유한한 신을 믿었고, 철학자와과학자는 말 한마디 못 하는 비인격적인 자연만을 신으로 믿었다.
객관적 계시와 그에 따른 도덕률은 그리스인의 사고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삶에 필수적이지도 않았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도덕과 사회법, 가족의 삶, 사업 그리고 인간관계는 인간이 스스로 제정한 기준에 따라 규제되었다. 그 결과 사는 법과 가치에관한 다양한 생각과 표현이 존재했고, 이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 P76

인간은 이러한 법을 위반할 수는 있어도 그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가인에게 동생 아벨을 죽일 자유가 있다고 해서, 자신의행위를 정당화할 자유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절벽에서뛰어내릴 ‘자유‘뿐만 아니라 도덕률을 어길 ‘자유‘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로 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선택을 막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그에게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도 막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땅에 떨어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따라서그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사랑할 자유‘나 ‘선택할 자유는 어떠한가?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하기 전에 그 결과를 반드시 상고해봐야 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도덕률을 무너뜨릴 자유는 없다. 하나님의 법이 지켜지지 않을 때 그 법은 인간을 무너뜨릴 뿐이다.이것은 문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P81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는 세상을 초월한 법과 질서에 순종하여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선을 위해 규정하신 테두리를 지키며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진정한자유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자신을 두는 것이다. 그것은 상황과상관없이 성령을 의지하여 이루어내는 내면적 자기 절제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가장 높은 선함에 항상 집중하신다. 따라서 성경은 사람의 의무와 규칙을 가르치는 데 주저함이없다. 뜨거운 오븐에 손을 대려는 아이에게 부모가 경고하는 것이 사랑이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것은 신실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은 곧 그분의 사랑과일치한다. 하나님의 법을 선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법도 기쁨으로받아들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거나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며 주님의 법을 기뻐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시 1:3) 하게 될것이다.
- P83

우리는 때로 인간의 장애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질문한다. 이질문의 답은 장애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서 찾을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약자가 지닌 놀라운 힘이다. 분명 하나님은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우리 안에 더 큰 내면의 장애가 있음을 깨닫는다.
- P109

그러므로 모든 어린이는 신적 기원과 재능을 지닌 특별한창조물로 받아들여야 한다.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개인으로서 인정받아야 하며, 개인의 가치는 그 아이의 미래 모습이 아닌, 있는 모습 그대로 온전히수립되어야 한다. 요점은 아이들은 (인간으로서) 적절한 존중을 받기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자라나야 할 필요나) 성장할 필요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도 없고, 엄마 배 속에서 수정된 순간부터 온전한 인격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 가치는 외모나 힘 혹은 지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바탕을둔다.
- P111

전제는 자녀가 가정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뜻 들었을 때 이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대조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않다.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존재라고 해도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음을 배워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며, 부모의 권위를 따르고 인정하는 훈련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복종해야 할 더 높은존재가 있음을 마음에 새길 수 있다. 만약 아이들이 부모의 더 높은 뜻에 순종할 수 있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라는 더 큰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지지 않겠는가?
- P114

공식적으로 성경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부모는 교사다. 가르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의 일상을 보고 들으며 배운다. 또 부모에게서 배우거나 자녀와 부모가 서로 깨우치게 되든 어쨌든 학습은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모 자식관계의 본질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도록 가르치지 않는 것은 곧 아이가 하나님을 무시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배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는가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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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가 가진 전제에 관한 내용이며, 이러한 전제가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 전제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를 형성하고,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는 토대가 된다. 전제는 우리가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영향을 준다. 누구에게 투표할지, 어떤 옷을 입을지, 무엇이 옳고그른지, 누구와 결혼할지, 언제 은퇴할지를 비롯한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결정에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제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된다. 우리는 보통 전제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당연하게 여길뿐이다. 레이디 비 굿의 조종사들은 전투기가 그렇게 빨리 비행할수 없다는 전제를 설정했다. 그 결과 치명적인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도 다른 가능성 있는 전제를 생각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이미 형성된 전제를 받아들일 때가 많다.
- P16

이처럼 같은 알파벳 나열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요점은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볼 수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숙련된 전공의 두 사람이 태아를 검진하고 있다. 둘 다 초음파검사로 아이의 크기를 재고, 심장 박동을 들으며 태아의 움직임을확인한다. 그러나 한 의사는 이 태아를 인격이 없는 세포로 여겨,
산모가 원한다면 이 태아를 암세포 없애듯 제거할 수 있다. 또 다른 의사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 그래서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태아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 이런 상반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일까? 자연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관점은 인류 기원에 대한 전제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기때문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만약 태아가 거듭된 우연의 결과물이라면, 비인격적 화학 물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인간의 기원이 비인격적이라면, 발달 과정 중에 갑자기 인격이 생겨날 수는 없다. 아미노산이 물고기로 진화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비인격적인 화학 물질에 불과하다. 물고기에서 진화한 인간도 마찬가지다.
- P49

두 도시는 인간의 가치를 전혀 다른 기준으로 보았다. 한 도시는 개인주의를, 다른 도시는 집단주의를 추종했다. 그리고 아테네의 개인주의와 스파르타의 집단주의는 지금도 존재하며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 두 가지가 형태와 정도의 차이만있을 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극과 극으로 보이는 두 양상은 본질적으로 같은 세계관에 기초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한통속이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현상을잘 설명하는 것도 없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똑같다. 그리고 이것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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