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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의 심리는 무엇인가?’
그 남자를 고치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재미있는 답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본디 야수를 길들이고 싶은 사육사의 본성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 큰 남자도 아우를 수 있는 울트라수퍼의 모성애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일까
생물학적인 여자의 눈으로 볼 때 여기 돼먹지 못한 한 남자가 있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스트릭랜드. (이름은 퍽 놀이동산스럽다.)
내가 책을 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나와 알고 지내기를 원했는데 스트릭랜드 부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베푸는 오찬회에 나는 문인들과 함께 자주 초대되었고 그녀의 집은 늘 따뜻하고 우아하고 상쾌한 예술적 정취로 가득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의 남편이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녀로부터 남편을 찾아가 한 번 만나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여자와 함께 달아났을 거라는 소문과 달리 스트릭랜드는 파리의 허름한 호텔에 혼자 묵고 있었다. 나는 가장으로써 어떻게 가족을 무책임하게 버리느냐, 자식들을 생각해보라고 힐난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에 찬 말투로
“왜, 그래선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소? 난 그 사람을 십칠 년 간 먹여 살려 왔소.
그러니 이제 자기도 혼자 힘으로 살아볼 수 있잖나?
아이들도 어렸을 때는 귀여웠지만 다 크고 나니 별 감정이 들지 않아요.”
그의 단호함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나를 오히려 무안하게 했다.
단지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고 했다.
사십이 넘도록 증권거래만 해오던 그가. 열일곱 살짜리 딸과 열네 살짜리 아들을 둔 그가 말이다.
결국 나는 그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 채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스트릭랜드 부인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내겐 네델란드 출신의 화가 더크 스트로브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대가들의 작품과 현대 화가들의 작품 모두에 공감할 수 있는 높은 안목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조잡한 이태리의 풍경만을 그려 주위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있다.
파리에서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의 괴팍한 성격과
무례한 말투를 넉넉하게 견디고 있었다.
심지어는 앓고 있는 그를 빈민굴에서 끄집어내 자기 집에서 간호하기도 한다.
미칠 듯 날뛰며 반대했던 아내도 결국 두손을 들고 스트릭랜드를 정성스럽게 간호하기 시작한다.
“그를 집안에 들이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거예요.”라는 암시와 함께.
그의 생김새를 궁금해 할 것 같아 잠깐 그의 모습을 옮겨본다.
‘스트릭랜드는 거칠고 투박하게 생겼다.
눈의 표정은 초연하고 입은 육감적이며, 몸집은 크고 건장했다.
그는 야성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자신의 스튜디오까지 빌려주었던 스트로브는 갈수록 방자해지는
스트릭랜드의 행동을 못 견뎌 그만 나가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때 가방을 싼 것은 그의 아내 블란치였다.
“저도 따라가겠어요.”
스트릭랜드의 야수성에 본능적으로 끌린 블란치는 어느 새 스트릭랜드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금방 버림받을 것이라는 위험도 감수한 채 누구보다 가련해질 운명의 길을 들어서고 만다.
아내가 가난때문에 고생할 것을 염려한 스트로브는 결국 두 사람에게 스튜디오를 내어주고 오히려
자신이 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온다.
당연히 그들의 동거는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믿으며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라 당부한다.
그러나 스트로브의 사랑이 무색하게 얼마 후 블란치는 독극물을 삼킨 후 죽고 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스트릭랜드는 야멸차게 말한다.
“그 여자는 나한테 버림을 받아서 자살한 게 아니야.
어리석고 균형 잡히지 않은 인간이라 그랬지.”
나온 김에 여기 스트릭랜드의 야수성을 드러내는 문장을 한 번 더 옮겨 적는다.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난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왠일인지 주변 인물들은 그런 그를 미워하지 못한다.
최대의 피해자인 스트로브조차 그를 용서하고 네델란드로 같이 갈 것을 권유했었고 소설 속의 화자인 나 또한 스트릭랜드를 극도로 혐오하는 마음과 동시에 알고 싶어 하는 냉정한 호기심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너무 그를 나쁜 남자에 촛점을 맞추어 묘사하고 있나?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 한 토막을 적어본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몇 년 후, 타히티로 갔을 때 그 섬에서 우연히 스트릭랜드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열일곱 살 난 토박이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깊은 산 속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았다한다.
거기서 종일토록 그림을 그리고 아이도 둘씩이나 낳아 잘 살고 있었다한다.
아마도 그 곳에서 보낸 최초의 3년이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어린 아내 아타는 어떤 여자였을까.
“그 애는 간섭을 안 해. 내 밥을 지어주고, 애들 뒷바라지도 하지.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하네. 내가 여자에게 바라는 건 다 해줘.“
토착민처럼 파레오를 두르고 원시적인 생활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의사가 찾아온다.
아타가 진료를 의뢰해서 모셔온 것이었다. 의사는 스트릭랜드를 보고 그가 나병에 걸렸음을 알려준다.
그는 그 선언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후일 닥터 쿠트라는 죽음의 선고를 의연히 참아내는 그의 금욕적 용기에 감탄했다고 말한다.
스트릭랜드는 조용히 떠날 준비를 했으나 아타는 죽어도 스트릭랜드 옆에서 죽겠다며 다리를 놓지 않는다. 이를 물리치지 못한 스트릭랜드는 오두막에 계속 남았다.
두어 해가 지날 즈음 닥터 쿠트라는 아타의 긴급한 전갈을 받고 다음 날 아침에 오두막에 도착한다. 그는 집 안에 들어서자 벽에 가득 그려진 신비한 그림을 보고 순간적으로 내뱉었다.
“천재다.”
벽에 그려져 있던 그림들은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동산 같은 거였어요. 뭐랄까. 인간의 형상, 그러니까 남녀형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이기도 하고, 숭엄하고 초연하고 아름답고 잔인한 자연에 대한 예찬이기도 했어요.
그걸 보면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이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쿠트라는 집 안으로 더 걸어들어가 심하게 뭉그러진 채 죽어있는 스트릭랜드를 발견했다.
그리고 곁을 지키고 있던 아타와 함께 그를 나무 아래 묻어준다. 아타는 스트릭랜드의 유언대로 집과 벽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렸고 최고의 걸작이었을 그 그림은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 후 나는 타히티섬에서 알게 된 일들을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전하기로 마음먹고 그녀를 찾아간다. 부인의 생활은 이제 퍽 안정적이었고 거실도 다시 활기를 찾고 있었다.
스트릭랜드가 이미 세상에서 천재로 인정을 받은 터라 벽에는 그의 복제화가 하나 걸려있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말한다.
“그림이란 장식으로는 그만이지요.”
이 소설은 고갱의 삶에서 소재를 얻어 만들어진 소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스트로브와 스트릭랜드.
이름에서 발견되는 상관관계는 고흐와 고갱을 떠올리게 하고 마침내 그들이 공동화실을 가지게 되었을 때 느끼던 환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자신의 스튜디오를 빌려주며 그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기뻐했었다. 고흐 또한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며 함께 살게 될 노란 집에 얼마나 온갖 정성을 들였었던가. 마침내 고갱이 찾아갔을 때 고흐의 기뻐하던 모습이란.그러나 오래지 않아 찾아온 그들의 불화와 결별.
그들이 마시던 싸고도 강한 압생트의 알코올 기운은 쓸쓸하다.
끝까지 스트릭랜드를 포용하려 했던 스트로브가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뒷모습 또한 쓸쓸하다.
어떤 계기로 스트릭랜드가 화가가 되기를 결심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동기는 나타나 있지 않다.
화자는 그에게 잠재되어있던 창조의 본능이 암세포처럼 자라나 존재 모두를 정복하여 가정까지 버리고 도피행각을 벌이는 행동까지 이어졌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우둔한 증권중개인에게 그런 일이?
하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어떤 인간들의 혼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다가 그들을 성령으로 굴복시키고
수도원의 금욕적 삶으로 몰아가는 신의 뜻보다는 덜 이상하다고 말한다.
예술성이 주어지는 것과 신앙심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그것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 그것처럼 불가사의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스트릭랜드는 한 때 욕정에서 벗어나 온 힘을 그림 그리는 일에 쏟고자하는 소망을 가졌었다.
방법은 가혹했지만 그는 그 소망을 생의 끝에서 이룰 수 있었다고 본다.
스트릭랜드가 추구했던 예술의 길은 성한 육체를 가지고 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극한의 고통속에서 자신의 육체를 부인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되 육체의 물질적인 것은 다 걷어버린 후 정신에만 집중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했기에 더욱 강한 정신력과 사물을 꿰뚫는 직관, 더 없이 신비로운 색채를 부여받았을 것이다.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바랐던 걸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된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 버린거죠.
예술성의 극한은 창조의 신비를 들여다보고 종말의 환상을 체험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스트릭랜드의 예술성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스트릭랜드는 물질적인 것에서 어렴풋이 어떤 정신적인 의미를 발견했던 모양이나 그것이 너무 이상스러워서 불완전한 상징으로 암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주의 혼돈에서 어떤 새 양식을 발견하고 그 온 영혼으로 괴로워하면서 그것을 서투르게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나는 표현의 출구를 찾아 애타게 고뇌하는 정신을 보았던 것이다.
자자,
그렇다면 이제 그를 계속 '여자를 비하하고 물질화시키는 나쁜 남자'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극도의 고통과 쾌락의 완성을 맛본 최고의 예술가로써 받아들일 것인가.
해설에 의하면 달과 6펜스는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 달은 꿈과 열정이 있는 이상향을, 6펜스는 돈과 물질이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달과 6펜스가 신성과 야수성으로, 물질과 정신으로도 읽힌다.
성직을 수행함으로 신성을 갖고 살아가는 아들 로버트 스트릭랜드,
거친 태평양을 가르는 배 위에서 달빛아래 신나게 춤을 추는 아타의 아들의 야수성,
스트릭랜드에게 존재했던 신성과 야수성의 계보가 강줄기처럼 두 아들 위로 흐르는 것을 본다.
그를 사랑했던 세 여인들은 어떠했나.
'그림이란 장식으로 그만'이라는 말에서 보듯 정신도 물질화시켜버리는 스트릭랜드 부인,
물질을 정신과 혼동하다 불행해진 블란치,
물질의 세계에서 동떨어진 섬처녀 아타,
나쁜 남자의 야수성을 길들여 정착하게 한 것은 어떤 힘이었을까.
스트릭랜드로 보아 야수성의 끝은 신성의 발견이었을까.
서머싯 몸은 어렸을 때 양친을 잃고 목사였던 백부 밑에서 성장하였다고 한다.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을 영예로 아는 세대와 '종교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믿는
차세대와의 갈등을 그도 느꼈을까. 하지만 나는 이 소설 전반에 흐르는 그의 따뜻한 체념을 읽는다.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라 했던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라 했던가.
그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회의에도 불구하고 내겐 이 책을 통틀어서 하나의 핵심구를 찍으라면
‘신을 믿는 마음’이라 하겠다. 그 핵심어를 발설한 사람은 타히티섬에서 만난 브뤼노 선장이다.
그는 나무뿐이던 섬 하나를 사서 혼자의 힘으로 아름답게 가꾼 사람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생활을 하며 그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두 분 모두 의지도 강하고 성격도 굳세어야했겠군요.”
라고 내가 말하자 선장이 대답했다.
“하지만, 한 가지 요소가 더 없었더라면 우린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게 뭔데요?”
“신을 믿는 마음입니다. 그게 없었더라면 우리는 실패했을 거예요.”
신이 띄워놓은 거대한 공 안에서 우리는 달리며 경쟁하며 서로 미워하고 또 사랑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이 예술성으로 혹은 각자가 믿는 신앙심으로 부피를 키워간다.
고통이 곧 쾌락인 예술, 그리고 진리를 알기엔 너무나 짧은 생,
신성과 야수성을 가시처럼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알 수록 모르는 것뿐인 삶 속에서 나는 무엇을 깨달았다 말할 수 있을까.
날로 후패하는 육체 가운데 과연 내 생의 온도를 결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을 믿는 마음.
결국 그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