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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평점 :
나는 그의 이름이 좋다.
약간 모자란 듯 하면서 동시에 엄격하기도 한, 남성적이면서도 리듬이 있는.
병렬에서 약간 틀어진 자신만의 순서와 각도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이런 편애는 내 아이의 이름에 '율'자 한 번 넣어보려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아쉬움과 지난번에 읽은 그의 시집에서 그가 보여준 말의 낭만을 떨쳐버리지 못한 때문이겠다.
여행중에 토끼를 기르고, 남의 개를 산책시키며 파리에 머무르고,
그의 낡은 운동화를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여자를 가졌던 사람.
여행을 하고, 그러면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것이 책이 되는 일을 완료시킨 사람.
주로 여행서를 출판하는 출판사의 대표인 사람.
너무 자유인같아 보여서 동경하게 되는 사람.
발로 찾아가서 발더러 글을 쓰라고 종용하는 여행산문집의 묘미는
낯선 곳에서 가면 도대체 어떤 내가 발견될까 하는 질문을 대신 던져주는 데 있지 않을까한다.
고생스러움은 작가가 지고 깨달음과 잔잔한 감동은 독자의 몫으로 친절하게 던져주니 관람과 체험을 동시에 맛보는 즐거움이 있다. 계획대로 현대인을 위한 알뜰모듬상품이 되어준다.
이 책은 목차도 없고 페이지도 없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 곳을 찾으려면 작은 여행을 해야한다.
제목과 내용과 사진을.
의도적이었을거다.
페이지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작가의 추억도 그렇겠거니와
여행이란 예상대로 딱 맞아떨어지는 법도 흔하지 않으니 이해하기로 한다.
조금 고약하지만 명민하다. 다시 읽고 싶어졌다면 그런 수고쯤은 일도 아니다.
*
어느 저녁 식당의 이별
사카모토라는 청년이 중국 계림일대를 여행하다 물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여인을 보았단다.
그녀가 돌아보았을 때 이상할 정도로 깊고 신비한 눈에 매료되어 수학자라고 소개하는 그녀에게 저녁식사를 제의했고 그녀는 흔쾌히 오케이 했으며 연인이 가질 수 있는 다정한 시간을 보냈으나
식사가 끝나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배가 고파서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자신은 수학자가 아니라며 유유히 식당을 걸어 나갔고, 후일 선배의 사진여행에 동승했었던 그 여행에서 돌아와 전시회를 도와주러 갔다가 한 사진을 보고 주저앉았단다.
그 사진에는 배고프다던 그 여자가 물가에서 카메라를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기에.
신비한 눈은 다른 말로 하면 난 언제든 당신을 속일 수 있어요 하는 눈이다.
남자의 젖은 눈을 조심하듯 여자의 신비한 눈도 조심해야하리라.
눈을 무기로 삼을 줄 아는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표정의 변화가 다양하고 눈빛의 변화가 계산적인 사람, 미소를 거둘 시간인데도 여전히 걸치고 있는 사람,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눈이 무기인 사람.
언제고 한번쯤은 속게 되지 않나.
이미 속아본 경험이 젊은 시절 빽빽하다.
*
리가에서의 금식일기
그가 서른 네 시간을 먹지 않으며 내린 금식의 정의는 이랬다.
금식 : 나를 여행할 때 준비하는 진지한 도시락
마흔 여덟 시간만 채우고 뭣좀 먹자했는데 마흔 시간 이십 여 분이 경과했을 무렵,
새벽 네 시에 문득 깨어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부피가 줄어든 몸을 본다.
얼른 거울을 본다. 이제 겨우 시인의 얼굴이 되었군.
*
한 사람 때문에 힘이 다 빠져나갔을 때
한 달 동안 터키여행을 다녀오겠노라는 후배에게 그는 여행이 지루하면 미련 없이 그리스로 건너가 섬 남자가 건네 오는 말을 피하지 말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기회가 되면 사랑까지 하라고했다. 그렇게 되면 아예 돌아오지 말라는 인사를 덧붙여서.
그 여자후배의 귀환은 늦어졌고 돌아온 어느 날 다시 그리스로 가겠다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도 한 달짜리 항공권을 끊은 건 아니지? 마음 내키는 대로 많이 저지르고 와,
나중에 후회없을 정도로. 알았나?”
이 위험한 충고자 같으니라고.
세상 끝 어딘가에 사랑이 있어 전속력으로 갔다가 사랑을 거두고 다시 세상의 끝으로 돌아오느라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 : 우리는 그것을 이별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나에 모든 힘을 다 소진했을 때 그것을 또한 사랑이라 부른다.
옷장을 열었을 때 같은 색깔과 모양의 옷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내 경우에는 주로 쥐색, 인디고 블루, 그리고 블랙.
문득 내가 여태껏 좋아했던 사람들도 동색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책을 읽는 여인의 모습이 그리 젊어보이지는 않지만 매력적이다.
나는 혼자인 것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어요 하는 눈동자를 숨기고 있는 듯한 저 여인의 눈.
창에 비치는 자동차의 모습은 그녀가 건성으로 책을 읽고 있을 것 같다는 시선을 갖게한다.
더불어 겹치면 다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가슴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오묘한 세계가 앉아있다.
반 이상을 잘라주면 나의 성질은 사라지지요, 하는 도마와 빵의 조화는 어떤가.
적어도 반은 고수할 수 있을 때 나머지 반을 회복시킬 수 있다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사라진 반쪽 부분엔 부스러기만 남아있어서
사랑을 하고 남은, 열정을 다해 보내고 난 삶의 재같이 느껴진다.
저 빵의 나머지 반쪽 공간에서는 마치 빵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들이 자라날 것만 같다.
혹시 붉은 꽃이, 혹은 파란 하늘만을 담는 거울이, 빨리 닦아내야한다며 향기로운 비누가.
나는 그리스로 날아갔던 이 작가의 후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반은 꼭 남겨두고 사랑하세요.
선배와 등을 지게 되는 충고일지라도.
빵과 푸른 사과.
그들이 가진 절단면을 본다.
다른 성질이지만 음식이라는 동족애로 서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왜 무엇이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 긴장감이 지닌 거리와 공기가 더 즐거운 걸까. 칼이 있는 이 사진이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남루한 속옷, 수영장에서의 급작스런 쓰러짐, 눈부신 장미 정원.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안고 있던 노인의 이야기.
이른 아침 남자가 깰까봐 분무기로 물을 뿌려가며 신문지를 넘기는 여자의 이야기,
식당에서 일할 때 커다란 나방을 바람의 방향으로만 쫓아 낸 작가의 이야기.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히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그에게 여행의 시작은 살면서 치르게 되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피해서였다고 하는데 후일에, 사랑은 여행이라고, '형편없는 상태의 네 빈 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네가 서로 껴안는 것'이라 고백한다.
나는 후일 여행에 대해 무어라 말하게 될 지 책상에 앉아 마음으로 쐐앵 달리며 눈알만 무심히 또로록 굴리고 있다.
곰국 끓여놨어. 한 달동안 나 기다리지마.
내 평생 이런 말 할 일도 없겠지만,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가봐야할 곳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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