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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자연은 말을 하고 경험은 통역을 한다.’
카톡 상태메시지를 보고 남편이 탄복을 한다.
“우와, 이거 니가 한 말이야?”
“어머나,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알면 지금 인세로 이자놀이 하고 있겠지. 사르트르님의 말씀이셔!”
모든 엄마들은 아이에게 하루라도 빨리 말을 가르치고 싶어서 안달한다.
“엄마, 엄마, XX야, 엄마 해봐"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칠 때처럼 엄마들이 친절과 인내로 자녀교육에 일관성을 가진다면 이 세상에
청소년문제 따위란 단지 외계어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열심히 가르치려는 젊은 엄마들을 보면 한마디 거들고 싶어진다.
“거, 말 빨리 가르쳐봤자 말대꾸 밖에 더해요?”
목이 쉬도록 낱말을 반복하던 엄마들의 얼굴로 제일 많이 되돌아오는 말들이란,
‘싫어’,‘미워’ 인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친구와 라볶이를 먹으며 주인아줌마가 단무지를 넉넉히 안준다고 푸념하고 있어야할 18살의 나이에 문정희시인은 ‘꽃숨’이라는 시집을 냈었다. 흘러내리는 콧물을 들이키며 그 무의미한 운동성에 재미에 열중할 때, “으그, 코 풀어!” 하는 엄마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쾌락을 포기하고 코를 풀 아홉 살의 나이에 사르트르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오프닝 멘트로 돌아가 살펴보면,
여기에서 자연이란 아이이고 경험이란 노인을 나타내고 있다.
즉 어린 사르트르가 하는 말을 통해 할아버지가 철학 위에 겉옷을 입혀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이들이란 아직도 자연과 가까운 존재이며 바람과 바다의 사촌이다. (...)
할아버지는 철학보다 시적인 명상이 더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의 명상의 대상은 나였다.(...) 내가 두서없이 지껄이는 말들 속에서 무슨 예지를 찾아보려고 하고 실제로 찾아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후에 할아버지의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웃어넘긴 일이 있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황홀경을 만들어서 죽음의 불안과 싸워보려고 한 것이었다. p 33
<말>은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보낸 유년시절의 기록한 자서전이다.
사시 기운이 있는 키가 작고 야윈 아이,
누군가의 친구가 되기에 불완전했고, 할아버지의 손자가 되기에는 완전했던 소년.
이 책은 1부 읽기, 2부 쓰기로 이루어져있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1부는 어떻게 읽기를 습득하게 되었는가, 아버지를 1살 때 여의고 외가댁에 들어간 후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책들과 조우한 이야기이고 2부는 그 읽기를 토대로 자아를 구축했던 연극에서 벗어나 쓰기를 통해 어떻게 자아를 완성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좀 자세히 이야기한다면 유년 시절, 어른들의 말이란 진실하지 않다는 것,
그들의 세계와 아이들을 대하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
그래서 고독했고 그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연극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읽기에서 솟아나와 자란 덩굴 같은 표절의 세계에서 어떻게 쓰기를 확장해갔는가에 관해 쓰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그가 책을 읽는 할머니를 유심히 관찰한 일이 있었다.
그는 할머니가 당시 유행하던 소설책(통속적인 책이라 표현되어 있다)을 손에 쥐고 창가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피로감과 행복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책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퍼지던 미소는 후일 모나리자의 입술에서 다시 발견한 그런 미소였다는데.
책의 무엇이, 구체적으로는 어떤 말이 그런 미소를 피워 올릴 수 있었는지 일곱 살의 사르트르로써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그가 책을 읽고 있는 연극을 하고 있으면 어른들은 감탄 어린 칭찬을 했고 그 칭찬을 듣는 사르트르의 연기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급기야 그 연기에 동화된 할아버지는 여덟 살인 그를 학교에 입학시키며 “이 아이의 결함은 나이에 비해 너무 앞서간다는 것이지요.”라고 허세를 부리게 했고 첫 받아쓰기 시험이 끝난 후 반을 강등시켜야한다는 교장선생님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할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게 했었다.
그 후 열 살이 되어서야 다시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르트르에게 할아버지의 서재는 온갖 유물들로 가득찬 신전이었다. 퀴퀴한 잉크냄새가 나는 서재에서 뜻도 모르는 책을 펼쳐들고 어른들의 숭배해 마지않는 그 눈빛을 즐겼다.
그러다 글을 깨우친 사르트르가 기쁨을 쓴 대목이다.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식물표본처럼 그 조그만 상자 속에 들어있는 말린 목소리,
할아버지가 들여다보면 다시 살아나는 목소리, 할아버지 귀에는 들리지만 내 귀에는 들여오지 않았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내 것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것을 귀담아 듣고 의젓한 이야기들을 몸에 가득 지니고 모든 것을 다 알고 말리라.
할아버지의 서재를 마음대로 배회할 수 있게 된 나는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오늘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p 53
사르트르는 어른들의 부조리를 알았다. 아이들 앞에서 아이들에게 동화된 것처럼 그들의 말을 흉내 내었으나 어른을 만나면 곧 아이들을 따돌리고 어른들만의 언어로 아이들을 소외시켰다.
연극은 그에 대한 반항이었으리라.
내 유년시절에도 집에 이웃집 아주머니가 놀러 오시거나 친척이 오랜만에 방문할 때면 엄마는 평소와 달라보였다. 때로는 나에 대한 칭찬을 부풀리거나 때로는 얼굴이 붉어질 만한 나의 단점을 내 면전에서 웃으며 이야기해서 나를 겸연쩍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들의 내력이라 나도 똑같이 행동했는지 내 아이가 어느 날 말한다.
“엄마, 제발 내 얘기 좀 하지 마세요!”
어른들의 기쁨을 빼앗아가려고 작정한 어린이들이나, 아이들의 자존심을 괘념치 않는 어른들이나
바람직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그렇게 말은 모순의 친족이다.
말을 사물의 진수로 여기며 사물은 말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사르트르.
언어로 사물을 생포하는 그의 특이한 경험을 보자.
나는 뤽상부르 공원에서 우선 플라타너스의 멋있는 허상을 꾸며보고 스스로 홀려들었다.
플라타너스를 관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허공을 믿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자 금방 단 하나의 형용사의 모습을 띠고, 또 때로는 기나긴 한 문장의 형태를 띠고 진짜 잎사귀가 솟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세계를 바르르 떠는 초목으로 가득 채웠다.
p 196
머릿속은 바스락거리는데 그것이 안에서만 웅얼대고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화가는 인터뷰에서 사물이 말을 걸어오기까지 대상을 관찰하며 기다리는 일이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비단 화가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사물에 말은 건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말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는 경험을 즐겼다고 하니 그 ‘예술하시는 법’이 경이롭다. 그렇지만 따라하려면 주위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좀 이상해!’라는 말 들을 각오는 단단히 해야겠다.
2부가 시작되면 사르트르는 연극을 꾸며내기 위한 읽기를 중단하고 쓰기에 돌입한다.
연극을 쉽게 벗어버릴 수 없었지만 표절을 통해 거짓말을 꾸며보며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간다.
소설을 쓰는 자신에게 주어진 절대 권력에 도취되기도 하고, 무엇이든 상상하기만 하면 되는 그 세계에서 좀처럼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놀이밖에는 없었다.
한데 최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한 어린 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다.
나는 글을 씀으로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어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공중의 노리개와 같던 어린애가 이제 자신과 사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p 166
자신과의 데이트를 즐기던 사르트르는 명성을 얻게 된 순간, 그것을 외롭게 누리기만 했다고 고백한다. 영광을 위해 죽느냐, 영광이 자신을 찾아와서 죽이느냐, 다를 것 없는 종말에서 고뇌한다.
희미하게 태어났듯이 희미하게 죽을 것을 염려했으나 결국 책이라는 순수한 사물로 남게 될 자신에 안도한다.
나는 수다를 떠는 나의 의식을 활자화하고 삶의 소움 대신 불멸의 기록을 남기리라.
그리고 육체 대신 문체를, 시간이라는 연약한 나선 대신 영원을 얻으리라.
언어의 침전물로서 성령 앞에 나타나고 인류에게는 집념의 상징이 되리라.
요컨대 나 자신과도 다르고 삼라만상과도 다른 ‘타자’가 되리라.
우선 나의 신체를 영원히 닳지 않게 만든 다음 소비자들에게 바치련다. p 208
정말 9살의 나이에 그토록 많은 사유를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문학천재였을 것이다.
그가 천재였음을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인간의 굴레>에서 프라이스양이 말했던 것처럼
‘천재란 무한히 할 수 있는 능력, 바로 그거예요. 그것 말곤 없어요. 무슨 일이든,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그거죠.“ 라는 말이 나를 더 쉽게 설득한다.
인생을 읽고 쓰는 것, 그 두 가지로 단순하게 나누었으나 가장 세밀하게 밀고 나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천재성이란 말년까지 좋은 소문을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작문천재 사르트르가 오늘날 설교시간에 이렇게 인용이 되고 있다.
“신을 부정하고 죽음을 부정했던 세계의 지성 사르트르, 그는 폐수종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숱한 추태를 보였다고 합니다.”
최고의 지성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별 수 없었다는 부정적 메시지를 전할 때 줄곧 들먹여지는 예화이다. 무신론을 바탕으로 한 무의미와 무목적을 내세웠던 실존철학이란 실존하는 동안에만 유효했던 것일까. 본문 중에 그가 배교(?)하게 된 우스꽝스러운 계기를 소개한다.
어는 날 나는 예수의 수난에 관한 프랑스어 작문을 선생에게 제출했다. 그 작문은 온 집안이 감탄하고 어머니가 손수 베끼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은메달밖에 타지 못했다.
이 실망이 나를 배교로 몰아넣고 말았다. (...) 그 후에도 몇 해 동안은 전능하신 하느님과 공식적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다. p112
그러나 그것은 구교와 신교가 혼재하던 시기에 가져온 신앙적 혼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해이한 시기가 아니라면 카톨릭 집안이던 그의 할머니가 루터파 집안이던 그의 할아버지와 결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절대적 신앙이 분리될 때의 부작용이었으려나.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라는 존재가 불현듯 역사의 흐름에 휩쓸려 오용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아닐른지.그래서 억울함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죽음이 그렇게 조롱당하는 것이 불편하여 나는 본문 중에서 죽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가 신화적인 침묵으로 가득찬 <위인들의 유년시절>을 읽으며 후에 죽음으로부터 삶을 거슬러 읽어갈 독자와의 만남을 내다보는 예언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줄곧 그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몸이 떨렸다.
나의 모든 언행의 진실한 의미를 지닌 내 죽음이 무서워졌다. (...)
나의 작품과 나의 죽음이라는 두 개의 열쇠, 나의 비밀을 풀어줄 그 두 열쇠를 갖게 될 2013년의 사람들은
이 갑작스런 불안과 의혹을, 이러한 목과 눈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p 220
나는 그의 비밀을 풀 역량이 없지만 미약하나마 그의 편이 되어주고 싶다.
내 딴에는 문학에 몸을 바쳤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인즉 나는 성직에 들어간 것이었다.
문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이 결국 신에게 돌아가기 위한 우회도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조의 행위를 거듭하다보면, 사르트르가 느꼈던 절대권력을 계속 맛보다보면, ‘보기에 좋았더라’는 신의 마음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자신에게서 신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급기야는 신도 말로 창조할 수 있는 우주적 문학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을 죽인 문학가들의 변호는 이정도 해두자.
시학에 관하여 <활과 리라>라는 명작이 있다면 문,학,에 관하여서는 <말>이라는 걸작이 있다.
말에 관한 본질과 성격에 대하여, 그리고 문학도가 되기 위해 준비되었던 한 소년의 성장과정과 내면의 갈등, 주변과의 상호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 책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이것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책에 살고 있는 사르트르이다.
글을 씀으로 존재했던 사람, 그로 인하여 생각한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되는가....
이것은 일곱 살의 사르트르가 고민했던 문제이니 오늘 나는 이 회춘을 기뻐해야할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