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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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써놓은 글을 다시 읽을 때면 왠지 젊었을 적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때로는 침흘리는 유아기를 인정하며 글을 내릴 때도 있다)

비록 미숙함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되지만 거기엔 나름 풋풋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 미숙함이 흉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너그러운 밤,

모 인터넷서점에 올려놓은 신간 리뷰를 읽다가 그 아래에 달린 다른 리뷰를 보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글은 자판을 두드렸던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을 만큼 ‘삐까뻔쩍한’ 글이었다.

내심 그 글을 쓴 사람이 업자(?)였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며 읽는 사이 글의 생기발랄함에

이내 경계심이 풀어지고 말았다. 이건.... 너무 재미있잖아.

그러다 그가 스스로 비정규직 냄새가 폴폴 나는 ‘생계독서가’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친 김에 그의 책을 검색하게 되었다. (업자여서 나는 너무 행복했다.)

 

 

시원하게 사서 보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가 ‘생계독서가’라면 나는 ‘도서비지출할애불가’한 독서가였기에 다른 도서관에서 상호대차 순번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중고생학부모로 산다는 게 그렇다)

그러다가 알림서비스를 받게 되었고 5KM이상은 족히 흔들려서 멀미하며 왔을 책을 다시 장바구니에 환승시켜 집으로 데려왔다.

 

 

이 책의 제목에 나타나는 ‘비행’에도 김애란의 <비행운>처럼 중의적 의미가 부여되어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서서’라는 앞 두 글자에 중의적 의미를 더 강하게 느꼈다.

서서는 書書를 뜻하지만 나에겐 standing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지다 보니 수많은 책을 뜻하는 ‘서서’보다는 화장실에서의 ‘서서’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금정연은 여자입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럴 리가 없어요!’ 하며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심한 부정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뭐, 이건 순전히 웃자고 하는 말이다. (이게 금정연식 발랄체(?)다)

 

 

인터넷서점 인문MD(merchendiser)로 일했던 저자는 당연히 책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읽었고,

3년 6개월 동안 기를 쓰고 책을 팔았으며, 이제는 김수영의 말처럼 ‘속물 중에서도 고급 속물'인 소위 글 쓰는 사람으로 매문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 골수까지 빼먹는 독서법을 고수했다면 현재는 매일 쏟아지는 수백 권의 신간들에 치어 고기 몇 점만을 건성으로 먹어버리는 신독서법을 갖게 되었다한다.

읽어야할 책은 많고 인생은 짧으니 선택하게 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때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일종의 구원이 된 셈.

그 책은 봄과 읽음 사이에서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고, 더구나 서재에 가득 채워진 책을 가리키며

“이렇게나 많은 책을 다 읽으셨나요?”라는 인터뷰어의 말에 “다 읽은 책을 뭣 하러 꽂아놔요?”

재기발랄하게 응수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일화도 든든한 지원사격이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 속에서 평화와 기쁨만을 찾는다면, 차라리 사랑의 문으로 나가

겨울도 없고 봄도 없고 여름도 없는 곳으로 가라. 그곳에서 당신은 웃겠지만 마음껏 웃을 수는 없을 것이고, 울겠지만 모든 눈물을 흘리지는 못할 것이다.

-마누엘 푸익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요즘은 읽은 책을 연결하면 만리장성도 돌고 남는다는, 책장에 바른 침이 한 드럼쯤은 되노라는 독서가들이 책의 일부분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옮겨놓고 이국적인 저자들의 이름을 소환해내며 서평 내지는 에세이로 만든 책들을 내놓고 있다.

감명 깊게 읽었던 정여울이나 정혜윤의 책들도 그러했다.

책벌레들에게 자극을 준 멋진 책들을 소개받는 장점이 있지만 책 사이들의 비행은 때론 너무나 많은 인물과 인용으로 인하여 멀미가 날 지경.

잠언들도 때로는 느끼해서 콜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독후감만으로도 훌륭한 책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혹시 ‘모듬회를 좋아하는' 작가들의 기호때문일까? 어떻게든 책의 소비를 증진시키려는 출판사들의 적극적인 기획일까.

 

그런 오해와 불신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새 <날로먹는(?) 문체>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

레몬을 뿌려 소독과 비린내를 잡고 와사비 듬뿍 푼 간장에 찍은 그의 문장들은

‘역시 회가 맛있긴 하지?’ 반문하게 한다.

이 시점에서 ‘독자로써 작가가 좋아질 때’ 경계해야할 것에 대한 그의 충고를 전한다.

여러분, 저자와 독자를 친밀하게 만들려는 출판 마케팅은 그리 좋은 게 아니랍니다.

저자와 독자의 사이가 성공하려면 그것은 책이라는 공간에서여야 합니다.

 

 

명료한 언어의 대적은 위선이다.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긴 단어와 진부한 숙어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어대듯 말이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가끔은 조지 오웰이 내리친 죽비로 눈물이 쏙빠지고 뇌가 얼얼해지기도 한다는데.

덕분에 이 책은 참 솔직해진다. 든 게 없어서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거운 것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덜어내어 가벼워진 상쾌함이 있다. 책을 읽은 후 발효된 생각들이 생활의 에피소드와 연결되어 꼬리를 무는 유쾌한 사유와 언어의 유희가 감칠나다.

예전의 한 광고카피처럼 통쾌한 맛도 있으니 이 책은 그야말로 ‘유쾌상쾌통쾌’한 책이다. 쾌쾌하다.

 

 

스타워즈를 보고 원숭이가 섹시하게 느껴졌다는 여자친구의 말에 털북숭한 일개 원숭이보다

책 읽는 인간이 더 섹시하다는 것을 증명받기 위해 <모비 딕>을 집어든 이야기,

그러다 다른 남자보다는 원숭이에게 섹시함을 느끼는 것이 본인에게는 무척 안도가 되었다는 이야기,

친구가 아이문제로 고민하자 <부모와 아이 사이>를 추천하고, 회사문제에는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을, 인생에 대한 고민에는 <신화와 인생>을 추천해주자 연락이 끊겨버린 그 친구의 충고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나.

자전거가 타고 싶을 때는 자전거를 타는 대신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었고, 달리기를 하고 싶을 때는 <잘 달린다>를, 현재 <백수생활백서>를 읽고 있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는데. 그러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꽂아두고 <잰틀 매드니스>를 읽게 되었다는 이야기,

 

 

세상을 뒤흔들만한 문장을 써놓고 혼자 흐뭇해하고 있을 때 이내 그것이 70년 전 카뮈가 먼저 썼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는데 그것은 작가들이 동시대를 뛰어넘는 미래의 독자들을 겨냥해 쓰기에 그것을 <예상표절>이라 부른다는 피에르 바야르의 책을 소개하며 환호하는 이야기,

작가라는 놈이 멋이나 부리고 라고 비난했던 김수영과 박인환의 관계처럼 피츠제랄드의 뒷담화를 멈출 줄 몰랐던 헤밍웨이의 괴상한 우정에 야유를 보내는 이야기.

 

 

특히나, 20페이지에 달하는 ‘낭만의 엔진을 꺼보자’라는 이야기는 퍽 인상적이다.

예술가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하여 일반인들은 “좀 남는 표(책) 없나요?”라고 하고 좀 교양 있는 사람들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도 있잖아요. 조금만 참으시면 훌륭한 예술가가 될 거예요.

그런데 정말 남는 표(책) 없나요?” 라고 한다는 이야기,

예술은 배고프고 예술이라는 낭만은 아름다워서 슬프기만 한데, 영혼을 위할 수는 있으나 위장을 위할 수 없는 '생계형예술가'말고, 좀 수준낮고 형편없을 지라도 '여가형예술가'가 됨으로 자신의 영혼을 위하는 삶을 살며 예술의 상품화와 게토화의 관계에서 낭만적인 악순환을 끊자는 이야기 말이다.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문학의 세부사항을 잘 알아차리면 삶의 세부사항을 잘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은 맞는 말일까?

그 세부사항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 최고의 지혜를 발휘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답은 잘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행동하러 한 발 나아가던 환멸로 한 발 더 움츠러들던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덕분에 가혹한 운명의 중심에서 꿋꿋하게 일어선 등장인물들을 불러내어 조언과 위로를 얻고 여러 운명을 겪어낸 다른 사람을 품게 되게 되는가보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말이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다.   - 332p

 

 

작가 김훈이 어떤 인터뷰에서 <근사록>을 인용하여 했던 말이라는데 <책을 읽지 않고도 말하는 법>과는 비교 되지 않을만큼 비독서가에게 환영받을만한 문장이다. 비독서가들은 이 문장을 보고 그러니까 독서를 할 필요가 없네? 라고 알아들었을 것이고 독서가들은 그러니까 깨달음과 감동은 실천으로 이어져야하겠구나 라고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실한 독서가로써 나를 살펴보게되는 것은 달랑 고기 몇 점 뜯어먹고 이 맛이 최고라며 글에 취해 있는 건 아닌가하는 것이다. 쉽게 옮겨적는 주제에 마치 어떤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체 하는 것은 아닌가. 굵게, 밑줄이라는 옵션까지 넣어가면서 그것도 매우 신나게.

한 물음이 떠오른다.

 

이 책을 다 읽은 당신, 무엇이 달라졌는가.

 

다른건 몰라도 책을 통해 얻은 한 톨정도의 통찰을 가지고서 자식에게 응용하며 실험하는 우에서는 건져지기 바란다.

(성인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만만하고 애먼 아이들에게 말이다.

아이들은 내가 책따위 읽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그래서 장남은 책을 싫어하나보다.)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혹시 책이 덜 감동적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라는

핑계를 댈 수 있는 독자의 위치에 서있는 게 나는 지금 눈물 나게 고맙다.

그러면 금정연씨, 이런 때는 어떤 책을 읽어야하는 거죠?

 

 

디딩.

대출 신청해 둔 <죽은 철학자들의 서>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뜬다.

자, 이제 또 다른 책들을 멀미시키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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