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작가가 너무 좋다.

윤서 덕분에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말하기‘가 아닌 ‘듣기‘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느라 애쓴 동안 윤서는 듣느라 애썼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서교실에 계속 오겠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 P38

한번은 어머니로부터 ‘오빠보다 친구도 적고 자신감이 없다‘고 걱정을 듣는 열세 살 어린이를 만난 적이 있다. 말수가 적을 뿐 속이 아주 단단한 어린이였다.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적이 없어서 친구랑 노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중학교에 가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고. 노래는 잘 못하지만좋아한다며 뮤지컬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진로‘는 몇 살 때까지 정해야 되는 거냐고 진지하게 묻기도 했다. 동화책을 많이 읽었다기에 청소년 소설들을 보여주었더니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아.....못고르겠어요. 다 너무 읽고 싶어요."
자신감은 말하기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조심스럽지만단호하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어린이가 자신감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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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을 하라고 하면 항상 빠짐없이 말하는 책이 <어린이라는 세계>이다. 그 책의 저자 김소영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 바로 구매했다. <어떤 어른>. 역시 머리말부터 정말 좋다.

어린이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나는 ‘미래‘가 금방 온다는것도, 그 모습이 결코 모호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이를 따라서 나도 성큼성큼 미래로 간다. 어린이가 사는 세상이 곧 나의 구체적인 현실이다. 나는 미래를 예측할수 없지만 두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어린이를 대하는 방식이 앞으로 우리가 대접받는 방식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미래가 어떤 모습이 될지라도 나아가는 사람은 계속 나아가리라는 것이다. 나는그중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세상이, 내 미래가 어떻게 되든 나도 끝까지 나아지는 어른이 되고 싶다. 이 책을 읽는분들도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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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새.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p.145

내가 멈춰서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방향을 알려줬어요. 더이상 길이 없는 산속으로 접어들면 나에게 등을 내밀어 업히라고 하고, 그때부턴 당신의 발자국만 쓸어내며 비탈을 올랐어요. 업힌 채로 나는 발자국들이 사라지는 걸 똑똑히 지켜봤어요. 마술 같았어요. 매 순간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사람들처럼, 우린 단 한 점의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었어요. p.163


차분하게 기록되어있지만 내용이 충격적이다. 4.3사건의 극히 일부만 몇 줄 묘사된 건데도 너무 충격적이어서 뇌리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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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제주도에 간다. 앵무새에게 밥을 주기 위해, 사실 앵무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눈이 세차게 내리는 제주도로 향한다. 그 길에서 경하는 인선과 그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인선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아직 그 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전에 겪은 트라우마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군경의 폭격으로 마을 주민들이 무참히 살해된 그 현장에 열일곱, 열셋 시절 가족의 얼굴을 찾아다녔던 그 순간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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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이념을 가진다는 것만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아직 냉소적인 시선으로 아버지를 보지만 조금씩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를 알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온전히 한 사람으로서 ‘나’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아버지가 평생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 패배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빨갱이 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렀고, 아직도 휴전 중인 데다 남북의 이데올로기가 다르니 의견의 합치를 보기는 진작에 글러먹은 일, 게다가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주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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