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굴곡진 삶의 아리랑이 드디어 독립을 맞이 하였다. 아리랑에서의 무장투쟁이 해방된 조선의 태백산에 이르러 이념 의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건 완벽한 자주독립이 아닌, 또 하나의 덫에 걸린 한이 맺힌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님 은 조선의 독립을 못내 아쉬워 하셨다. 조선의 힘으로 이룬 자주 독립이 아니었 기 때문이다. 선생은 3천만 동포에 읍고 하였다.
[ ~ 우리가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요.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민족의 공 고한 단결로 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일절 내부 투쟁은 정 지하자!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 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은 자꾸만 이념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민족을 통합 시키 기 위해 읍고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념으로 남과 북은 갈라 졌고, 남쪽은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에게 끝없는 총을 쏘아대었다.
태백산맥 1은 여순반란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념의 갈등에서 비 롯된 이즘의 폭력화로 촉발된 사건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념 의 갈등으 로만 볼수도 없다. 1-6의 소제목 처럼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를 맹글었다. 조선이 제대로된 해방을 맛 볼수 있었던 건 두 달 남짓 뿐이었다. 미군정이 들어서자 나라는 다시금 혼돈속으로 빠져 들었다. 새나라 세우기는 미군의 점령 과 함께 시작된 군정의 조선인 인민공화국 부인으로부터 균열 을 일으키기 시작 했다. 공산당의 합법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전 환될 수밖에 없었고, 도망갔던 지주들과 친일파들이 다시금 활 개를 쳤다. 해방이 되고 풀려난 독립 투쟁자 삼분의 이가 다시 잡혀들어갔다. 일정치하에서 경찰질을 해 먹었던 자들의 손에 다시 잡혀들어간 그들의 죄목은, 일본이 미국으 로 바뀌 었을 뿐인 것처럼, ‘독립투쟁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바뀌어 있었다. 미곡수매라는 억지법은 그들을 또다시 배불렸다. 관리들의 부 정으로 균형을 상실한 배급제도 때문에 백성은 굶주림에 시달 렸다 좌익이 되고 싶어 된 사람 보다는 나라가 백성을 좌익으로 생각을 돌 리게 만들었다. 옳은 소리를 해도 바른 소리를 해도 모두 좌익으로 몰았다. 일정때보다 더 못한 세상이라고 아우성 이었다.
˝ 정치라는 것만큼 본질을 전도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염상진은 그 전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백 명쯤은 의당 죽일 수 있는 타당성 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적인 힘은 두 배 이 상의 가격을 해야 할 필연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정치폭력의 역 학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닌 것이다. ˝서로 따귀 갈기기˝ 처벌법 이 갖는 가해성과 마찬 가지였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상 대방을 세게 갈길 수밖에 없 는 가해성, 그때 내가 때리고 있는 것이 내 친라는 사실은 이미 망각 해버린 것이다. 그건 오직 나 를 아프게 하는 적일 뿐이고, 내가 아프 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공격성만 가속화하는 것이다 김범우는 그 정 치적 가해성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건 비탈길을 굴러 내리기 시 작한 수레바퀴의 불가항력적인 힘이었기 때문이다.˝
군정과 공산당의 치킨게임. 군정의 폭력으로 인한 말살정책은 공산 당의 숙청으로 돌아왔고, 또 다시 군정은 뿌리뽑기의 학살 을 하였다. 내부의 투쟁을 정지하자는 김구 선생님의 바램은 이 루어지 못했다.
˝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 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 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싸워도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우리끼리 해결했어야 했다. 제3의 개입으로 본질은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로크니, 맑스, 스탈린의 철학이 아닌 우리의 철학으로, 다투고, 싸우고, 회해하 고, 다투고, 싸 우고, 화해하고 했더라면 언젠가는 하나로 뭉쳐 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