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래생은 ‘개들의 도서관’에 소속된 암살자이다. 그는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에서 생활하면서 스스로 글을 익혔고 많은 책을 읽었다. 그것은 너구리 영감이 우려했듯 래생이 푸주의 다른 암살자들과 다르게 남의 인생을 사유할 줄 알게 만들었다. 암살자로 키워진 만큼 기계적으로 암살을 하며 살지만 어느 순간 그의 인생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훈련관 아저씨와 추, 노인과 늙은 개의 죽음은 래생도 언젠가 필요없는 패가 되면 가차없이 죽음을 당하리라는 쓸쓸한 예감에 빠지게 한다. 래생은 암살이 끝난 뒤 찾아오는 무력감에 어쩔 줄 몰라하지만 개들의 도서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공단에서 만난 여공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기회를 버리고 다시 너구리 영감에게 돌아온 것으로 보아 익숙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그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설계자 미토는 래생에게 놀라운 계획을 털어놓으며 너구리 영감을 버리고 자신과 함께할 것을 요구한다. 미토와의 만남, 정안의 죽음, 너구리 영감과 감정적 대립 이후 이발사와의 대결은 긴장감을 최고조에 달하게 한다. 그 와중에 끊임없이 래생을 자극하는 미토의 말들은 나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당신 말이 맞아. 하찮은 청부업자 몇 명 없앤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 그래서 나는 의자를 없앨 생각이야. 아무도 앉을 수 없도록」,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우리가 너무 얌전하기 때문이야. 무엇을 하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당신 같은 체념주의자들 때문이지.」
책 속에서 래생이 ‘의아한 북극곰’이라는 동화를 이야기해주는데 래생뿐 아니라 나 또한 동화 속 북극곰과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되돌아보게 된다. ‘설계된 대로 살 것인가, 그 설계를 깨부수고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갈 것인가’
**책 속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은 창으로 찔린 자국이 있지. 창녀와 포주는 농부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직업이고,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아들이 한 일도 살인이었니. 그 이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었지. 문명이던 예술이던 종교관 하다못해 평화도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것이 인간이란 종이야. 인간이라는 종은 처음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거지. 살인자의 편에 기생하거나 아니면 상대편을 죽이거나.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지. 인류는 그런 아포토시스로 지금까지 버텨왔던 거야. 그게 이 세계의 참모습이지.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그곳을 멈추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결국 누군가는 포주와 창녀와 청부업자 노릇을 하며 살겠지. 웃기기도. 그래야만 세상이라는 수레바퀴가 또 돌아가는 거고."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우리가 너무 얌전하기 때문이야. 무엇을 하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당신 같은 체념주의자들 때문이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렇게 쿨한 척 말하면 멋있니? 너구리 영감이나 한자 밑에선 찍소리도 못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착하게 고분고분하게 살면서, 결국 제 밥그릇 챙길 걱정밖에 못 하는 당신 같은 인간이 술자리에선 뭘 다 안다는 듯 욕하고 투덜거리기 때문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거야. 당신은 한자보다 더 역겨운 인간이야. 당신은 한자를 너무나 유명한 악인으로 만들면서 자기는 여전히 한자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믿고 싶은 거지. 결국엔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당신보다는 차라리 한자가 더 나아."
"갑자기 왼쪽 눈이 몹시 아파왔다. 래생이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정의, 신념,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래생은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래생은 언제나 누가 시켰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 그것은 누군가가 명단에 올랐기 때문이고 래생이 자객이기 때문이었다. 미토는 무엇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믿는 그 무엇을 위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설계자들의 세계일 것이다."
"그 후론 계속 도망의 연속이었죠. 제 실수로부터, 훈련관 아저씨의 죽음으로부터, 평범하고 성실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로부터,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죽은 훈련관 아저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한 번 눈을 감아버리면 그때부턴 계속 눈을 감게 된다' 제가 눈을 감아버린 거죠. 훔련관 아저씨도 추도 못 이기는 무시무시한 이발사와 대적하게 될까봐 늘 무서웠거든요. 그리고 그때부터 제 인생에서 뭔가가 꺼져버린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