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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저자는 폐암 말기 환자 폴 칼라니티이다.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많은 독서를 하였고, 독서는 그가 문학적 교양을 쌓고, 인생의 기준과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 형제는 추천 도서들을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면서 무수한 작품들과 작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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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몇몇 작품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면서 나는 도덕 철학의 기초를 쌓았고, 그 책을 대학 입학 논술 주제로 삼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햄릿’은 내게 사춘기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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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또 밤늦게 엉뚱한 장난을 치고 새벽에 집에 들어가다가 어머니에게 걸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십 대들이 손대는 마약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열거하며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정작 내가 그때까지 경험했던 가장 지독한 마약은 자신이 지난주에 건네준 낭만시집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 책은 잘 다듬어진 렌즈처럼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많은 문학 작품을 접한 덕분인지 인간의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 철학, 신경과학, 영문학, 의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접하고 탐구하게 만드는 기초가 된다. 의학기술을 연마하는 레지던트 기간을 거치는 동안에는 의사의 사명이 기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 해부학 실습 시체에도 인간성을 느끼고, 그것을 잠시 망각하면 그러한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은 내가 이제껏 상상하던 의사들과 달라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내가 만났던 의사들은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만난 기쁨과 안도감보다는 허무함을 앞서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의사 생활을 하는 내내 환자들의 인간성, 존엄성, 죽음에 개입하는 데 대한 책임감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톨스토이가 묘사한 정형화된 이미지의 의사,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기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변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인간적인 의미를 완전히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는 누구보다도 죽음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정작 불치병 진단을 받자 혼란스러워한다. 촉망받던 외과의사에서 갑작스럽게 폐암 말기 환자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심정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그 힘든 시기를 가족들의 응원과 학문을 통해 위로받는다. 사뮈엘 베케트의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라는 구절을 읊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용기를 얻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앞날에 일말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망스럽게도 8개월 된 딸과 아내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폴은 자신의 강인함과 가족 및 공동체의 응원에 힘입어 암의 여러 단계에 우아한 자세로 맞섰다. 그는 암을 극복하거나 물리치겠다고 허세를 부리거나 허황된 믿음에 휘둘리지 않고, 성실하게 대처했다. 그래서 미리 계획해둔 미래를 잃고 슬픈 와중에도 새로운 미래를 구축할 수 있었다. ...
폴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줬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단순히 투병과정만을 나열했다면 이 책이 주는 감동이 덜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의 글처럼 그가 어떤 순간에도 인간적이고자 했기에 그의 글이 마침표를 찍은 이후에도 생전에 그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인생의 모든 의문과 깨달음과 반성이 내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었고, 이제는 나의 숙제가 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