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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랑스의 두 얼굴 -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파괴하는 현시대의 문화 기류
밥 호스테틀러, 조시 맥도웰 지음, 유정희 옮김 / 스텝스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톨레랑스의 두 얼굴
톨레랑스[Tolerance] - 관용(寬容) 자기와 다른 종교·종파·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과 권리를 용인(容認)하는 일.
사실 처음 알았다. 이 책 톨레랑스의 두 얼굴을 읽고 나서야 톨레랑스가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거시적 관용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톨레랑스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뜻을 가진다. 관용(寬容)은 너그러울 관에 얼굴 용자가 합쳐진 말이다. 즉 마음이 넓어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 관대함을 가지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신학적 의미에서 관용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한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이 관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다소 어렵고 깊이가 있는 내용들이기에 이해함에 있어서 난해도가 요구 되지만 반드시 생각해 보고 짚어 보고 넘어 가야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용에 대한 정체성이다.
얼마 전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선교를 갔다가 순교한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때 온 나라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심지어 교계와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적극적인 선교에 대해 강한 비판을 일삼았다.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복음 전파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외면과 질타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오직 예수라는 불변한 진리에 살고 죽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관용이 없다는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관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관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전통적인 관용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관용으로 해석한다. 전통적인 관용은 사전적 의미를 말 그대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포용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의 권리도 존중하여 주는 것이다. 가령 비록 문화, 종교, 나라는 틀리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정중하게 이해하여 주는 것을 전통적 관용이라 한다. 새로운 관용은 쉽게 이야기 하면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는 원리 원칙을 내세우고 개인의 사상에 의해 오히려 더욱 매도 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 할 수 있다. 기독교를 믿는 다는 이유하나로 포용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가지는 것이 새로운 관용주의이다.
새로운 관용의 대가는 어떠할까? 새로운 관용은 문화와 행위로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이 나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나를 비방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매도한다. 또한 아이러니 한 것은 관용하지 않는 이들에게 불관용의 모습을 드러내는 딜레마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수 외에 다른 것에 관용하지 않는 기독교를 불관용의 자세로 대하는 것이 새로운 관용주의자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기독교가 관용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우상에 불관용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 그리고 그 자체를 동화 시키려는 행위 자체가 우상숭배의 전략임을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관용은 결과는 참담하다. 참 된 진리는 사라져 간다. 오로지 나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용기, 정직, 성실이 말하는 미덕이 사라져 간다. 또한 정의가 죽어가며 인권이 붕괴 된다. 인본주의적 사상이 최고점에 달하면서 타락의 일로를 걷게 된다. 오히려 더욱 악순환 적인 사회 풍토가 만연하게 되며, 그로 인한 인류애의 상실이 드러나게 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새로운 관용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그것은 이미 사회와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깊숙이 나타나고 있다. 음악, 영화, 과학, 의학, 교육, 문학, 스포츠 등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면 심지어 교회 내에 영적인 신앙생활에도 동화 되어져 있다. 이러한 것에 비관용적인 자세를 드러낼 때 그들의 자세는 과연 어떠한가? 편협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광신도 취급을 해 버린다.
이미 이 시대는 톨레랑스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급속과 고도의 문화적 발달은 더욱더 참 된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시 할 것이다. 동화 혹은 동참하지 않는 이들을 시대에 동 떨어진 이들로 취급하고 분류하는 현 기류 속에서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할 기독교인들에게 남은 숙제는 무궁무진하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가장 훌륭한 변증이다."(P223)
결국 이것에 대한 해답은 별과 같이 빛나는 삶을 기독교인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야 그리고 올바른 우리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이다. 오직 그것만이 해답인 것이다. 조시 맥도웰의 톨레랑스의 두 얼굴. 우리 한국의 정서와 조금 차이점을 보이기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 기독교인의 믿음을 붕괴 시키는 고차원적인 사탄의 전략에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합의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이라 말이 생각나게 하는 톨레랑스의 두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