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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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의 11년만의 신작 #아버지에게갔었어 를 받아 읽어보게 되었다.


"아버지, 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에 대해 쓸일이 뭐가있어...내가 무엇을 했다고"

"그런말 마셔요, 아버지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 그저, 살아냈을 뿐이야.."


1933년생, J시에서 태어나고 살아낸, 아버지에게 간 딸의 이야기.


(1) 책 표지 이야기, 포르투갈 리스본의 사진

당연히 일러스트일거라고 생각했던 책 표지는 사진이였다.

포르투갈의 리스본의 한 집과 초원과 하늘이 어울어진 진짜 사진.

어딘가 그립고, 어쩐지 푸르르고, 한없이 자유롭고 싶으면서도 오롯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아버지를 닮았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고 한다. 한 평생, 일생을 집을 떠나지 못하고 집(가정)을 지키고 살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의 표지로는, 집 뒤의 넓은 하늘의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이 사진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고.

(2) 책 제목 이야기, 딸이 아버지에게 간 내용을 그대로 적은 제목

제목은 뜻 그대로 딸이 아버지에게 가게된 내용이라 처음부터 이 제목을 쓸 생각이었다고 한다.

책에서 작가의 말에도 적혀있지만, 『엄마를 부탁해』를 집필한 뒤에 그러면 아빠에 대한 이야기도 쓸 생각이 있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어느샌가 결국 쓰게된 이야기.

『엄마를 부탁해』라는 글을 쓸 당시, 어머니라고 적던 글이 잘 풀리지 않자, 엄마라는 단어로 쓰기 시작하니 이야기가 잘 풀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만큼 모두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애틋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그런데 왜 이번에는 아빠가 아닌 아버지일까. 일단 신경숙 작가 본인이 아버지에게 아빠라고 불러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엄마에 비해 아빠에게 느끼는 어떤 본능적인 거리감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엄마'라는 단어처럼 오히려 '아버지'라는 단어가 훨씬 더 익숙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째다' 로 시작해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로 끝나는 엄마에 대한 소설

'아버지가 울었어'로 시작해

'살어 냈어야,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 냈어야'로 끝나는 아버지에 대한 소설.

둘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하면서도 결국 결이 같다.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

엄마라는 존재는 가장 만만한 존재이다. 속상한 마음을 어디에 둘 지 모를때 쉽게 응석부리기 쉽고, 안풀리는 것들에 대해 쏟아부으며 화풀이 같은 짜증을 쏟아내기 쉽다. 그리고 늘 엄마는 엄마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함부로 전부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엄마는 가여운 사람도 아니고 내가 다 알고 있는 존재도 아니고 늘 그곳에 있어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다음에야 너는 엄마의 이야기가 너의 내부에 무진장 쌓여 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던 엄마의 일상, 엄마가 곁에 있었을땐 깊이 생각하지 않은 엄마의 사소하고 어느 땐 보잘 것없는 것 같이 여기기도 한 엄마의 말들이 너의 마음속으로 해일을 일으키며 되살아났다. ( 『엄마를 부탁해』 273p)'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 『엄마를 부탁해』 275p)'

그녀가 죽었을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를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ㄹ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그녀, 나의 어머니 ( 『아버지에게 갔었어』 126p)'

아버지라는 존재는 곤경에 처했을때 가장 먼저 떠오리는 얼굴이다. 곁에 계시지 않아도 늘 영향을 주는 존재로 '아버지, 나 좀 구해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든든하게 의지하며 곁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서도 서로에게 감정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계속 다른 곳이나 바라보며 못 들을 척 하는' 나와, '보고싶다'는 말을 '너 본지 오래다'라고 소리치는 앵무새로 알게하고, 어딘가 쭈구리고 앉아 혼자 감정을 추스리는 모습을 보게되고, 몇가지의 왜곡된 정보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서툰 자식 사랑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알게된다.

살아가는 일의 얼마간은 왜곡과 오해들로 이루어졌다. 왜곡되고 오해할 수 있었기에 건너 올 수 있는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62p)

나와 내 형제들이 이 집에서 묵게 될게 될 때마다 피로한 몸을 눕히고 잠에 들었던 방에 아버지가 있었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72p)

"사는 일이 꼭 앞으로 나아가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고 뒤가 더 좋았으믄 거기로 돌아가도 되는 일이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치매 검사를 받으러 갔던 아버지. "붙들고 있지 말어라. 어디에도 고이지 않게 흘러가게 둬라. 내가 정신이 없어지먼 이 말을 안해준 것도 잊어버릴 것이라.." ( 『아버지에게 갔었어』 92p)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믄 그거는 하믄서 살라고 하는 것뿐여" ( 『아버지에게 갔었어』 142p)'

"너는 언지나 근사해따. 나는 아버지가 되어서 너의 힘이 돼지지 모타고 니 어깨만 무겁게 했지마는 너는 언지나 근사해따 너는 언지나 그래와떤 거처럼 니 자리에서 성실히 니 할 일을 해낼 거슬 나는 익히 안다, 나는 더 바랄거시 없다, 하늘 아래 니가 건강하면 그것으로 되었따, 아버지가" ( 『아버지에게 갔었어』 170p)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말 속에 깃든 아버지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개념적인 아버지, 아버지는 이러해야 한다는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모습만을 알고 있던 딸이 아버지에게 가까이 가게 되면서 아버지의 나이 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이야기다.

나는 아버지를 한 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 '개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 『아버지에게 갔었어』 197p)

아버지를 전혀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자 등을 기대고 있는 현관 문이 차갑게 느껴지고 생각지도 ㅁ소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238p)

그렇게 개념적이고 보편적인 아버지의 허물이 벗겨지고 아버지 개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이 책은 그가 이렇 모습으로 자라왔겠구나, 그도 이런 생각을 했겠구나, 누군가로 누군가에게 남는 존재구나 라는 생각들을 '이제야' 하게 되면서, 늘 부모에 대해서는 '너무 늦게 이해하게 되는 마음'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하게 하는 소설, 엄마를 부탁해, 그리고 아버지에게 갔었어.

(3) 누군가에게 있을법한 고향, J시

작가의 고향이 정읍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연히 J시를 보며 정읍을 떠올린다.

누구나 연고지가 있고 지내온 어린시절의 배경이 되는 곳이 있다. 그 곳을 특정 장소로 지칭헤서 묘사하기보다 자기만의 고향을 꺼낼 수 있도록 J시로 묘사했다.

누구에게나 푸르렀던 시절, 살아가며 푸른 잎을 남겨놓는 것,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푸르른 작별. 이는 아버지와 고향 모두에게 해당된다.

(4) '보편적이고 아름답고 한국적이고 힘이 센 이야기' 라는 서평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늘 해오던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은 나의 아버지인것 같지만 모두의 아버지를 담고 있고 개인적인 서사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한국의 역사가 담긴 책이 되었다.

아버지 뿐만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의 묘사도 마찬가지이다. 직접 만났거나 아니면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의 표현은 필히 경험에 근거할 것이고 이를 소설로 풀어내었다는 것은 그들을 녹여낸 관찰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인물들에게 애착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박무릉'이라고 했다. 아버지 이야기 속에 아버지가 되지 못했던 사람이기에 이 이야기가 아버지만의 이야기는 아니게 될 수 있었다고.

(5) 4장에 실린 인터뷰 형식, 단편모음집 느낌의 그에 대해 말하기.

총 5장으로 구성된 글에서 4장만 따로 읽어도 한편의 단편 소설을 읽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3인칭 거리두기로 딸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묘사된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제 3자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담는다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에게는 항상 아버지이나 그 역시 아들이자, 누군가에게는 친구이며, 한국의 역사를 체험하며 자라온 세대로 그 세대별 여러 아버지들을 담는 형식이 흥미롭다.

이런 마음들을 겪는거 보면 저도 아버지가 되어가는 중인가 봅니다.

( 『아버지에게 갔었어』 337p)

딸이 라는 한정적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다각도로 아버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은 앞서 말했던 개념적 아버지에서 개인적 아버지로 바뀌어 그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나, 누구에게 들은 아버지인가, 내가 본 아버지의 모습이 아버지의 전부는 맞나, 아버지의 우는 모습은 본적이 있나, 어떤 친구들과 어떤 세대를 보냈나, 전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이다.

삶에는 기습이 있다.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왜 이런일이 내게 생기나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가슴을 뜯어보이며 막말로 외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을 수도 없는..

그래도 살아내는게 인간 아닌가.. ( 『아버지에게 갔었어』 3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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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간, 이렇게 바꿨어요! - 미래 학교 만들기 프로젝트
권미나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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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교육 의 따끈한 #3월신간 #학교공간이렇게바꿨어요 책을 받아 읽어보았다.


열악한 시설때문에, 최소한 이 시설만큼은 갖춰두자 라고 했던 표준 설계가 오히려 표준화되어 보급되며 규격화된 학교가 지어지기 시작

외관은 감시와 통제가 잘 되는 교도소와 다를 것이 없지만 오히려 공사비는 교도소보다 싸다.

실제로 학교 공간의 부자재들은 상당히 저렴한 것들을 사용하고 오래된 학교들은 그대로 시설 공사 없이 낙후된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공간의 문제.

네모난 공간에 네모난 책상에 네모난 칠판이 있는 교실과 선생님들이 뛰지 말라고 외치는 복도만 초6, 중3, 고3, 총 12년을 왔다갔다 한다는 말은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창의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시대의 변화를 외치며 자주 바뀌는 교육과정과는 달리,

아이들의 배움의 터전인 건축물은 1960년대 이후부터 하나의 변화없이 그대로 인듯.

안전, 감시, 통제, 질서, 규율이라는 미명하에 자유로움은 찾아볼 수 없는 전체주의와 획일화.

특히 유현준 건축가가 짓고있는 학교 건축에 대해 '그 학교만 시설이 너무 좋아지만 형평성에 어긋난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맞는 말이다. 어느 한곳이 너무 좋아져버리면 따라 좋아질 생각보다는, 왜 저기만 하며 시기질투하는 사회. 평준화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오는 공간이 바로 학교.


책은 학교 공간의 변화를 가져온 교직원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엮여있었고 그 사례는 초, 중, 고등학교가 각각 실려있었다.

쉼, 놀이, 삶의 공간인 학교 공간이 변화하면, 자연스럽게 학습 방법과 내용, 즉 배움의 변화가 생기고, 그렇게 배움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 지는 것이 미래 학교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책을 모두 읽었을때 가장 핵심이 된다고 생각했던 글귀는,

책의 뒷부분에 소개된 덴마크 고등학교와 함께 쓰인 문장이었다.

덴마크 외레슈타드 고등학교의 내부 전경이다.

이 학교는 개방적이고 혁신적인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좌측 상단 책걸상이 놓인 공간과 하얀 기둥에 쓰인 교실 번호를 보면,

교실이 룸이 아닌 스페이스 개념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실은 Room이 아닌 Space 개념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곳은 '수업'을 하는 한칸의 '방'이야, 라고 규정짓고 생활과 교육을 분리시키는 학교 건축물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Space 에 담긴 비어있음은 확장을 의미한다.

즉 학교 공간은 수업 만 이루어지는 방이 아니라, 수업 도 하는 복합 공간이어야 한다.

결국 이책에는 초,중,고 학교 급과 관계없이 같은 말들이 반복되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공간'만들기는 '공감'의 과정이다.

학교는 누가 사용하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학교 공간의 '주인'인 학생들이 직접 학교 '공간 주권'을 행사할 때,

지속 가능한 학교 공간 만들기의 원동력이 된다.

학교는 학생들이 삶과 미래를 고민하는 곳으로,

공부와 쉼은 분절이 아니라 공유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배우는가를 통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이 책에는 공간과 수업의 변화를 가장 원하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공간을 묻고, 이를 실현시키는 과정(가능성, 기능성, 안전성 등을 고려하며 수정하는 과정)을 성실히 담아내었다.

즉, 기획(방향설정, 콘셉트 설정), 기본(비품이나 가구 설정), 실시(예산, 세부디자인 확정, 전문가에 의해 안전성 점검 및 수정), 시공과 김리, 평가까지 학교 공간을 새롭게 조성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담았다.

단순히 이렇게 바뀌었어요! 멋지죠! 가 아니라,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직접 꼬물꼬물 그려본 아이디어 스케치가 전문가들의 손을 거치며 변화한 설계도가 실제 공간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볼 수 있다.

학교라는 공간은 왜 존재하는가

당연한 것들을 짚어주고,

지금까지 지내던 곳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게 한다.

그럼 어떤 곳에서 지내고 싶니? 라는 물음을 던져주면,

학생들은 직접 새로운 공간을 요구하며 이를 만들기 위해 참여, 협력하게 되면서 수동적인 교육 소비자가 아닌 능동적인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학교에 온 손님같은 존재가 아닌, 내가 지낼 곳을 일구는 주인의 심정(공간주권행사)으로 학교에 다가가면, '우리가 지낼 수 있는 공간'에서 확대되어 '모두의 공간'으로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쉼과 놀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공간 조성은

학교가 점차 자연스럽게 '오고 싶은곳''가고싶은곳'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고

이렇게 모인 학생들은 대화, 친목, 놀이, 휴식을 통해 자연스러운 소통이 일어날 수 있다.

열려 있는 공간, 유기적으로 연결된 살아있는 공간.

이 책에서 가장 힘주어 말하는 공간 변화의 필요성은, 공간 변화가 곧 수업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문턱을 없애고 앞뒤의 구분은 물론 복도와의 경계를 없앤 개방형 교실이나,

토론과 토의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광장형 아고라 교실,

모둠과 해체가 자유로운 책걸상의 변화(여러 형태로 활용),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휴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의자는 물론,

밝은 조명과 불필요한 비품을 줄이고 공간 활용을 극대화한 수납,

용도와 모임 인원에 따라 분리되거나 합칠 수 있는 폴딩도어의 활용,

제대로 실습을 할수 있는 안전하고 깨끗한 실습실, 자치활동이 가능한 메이커 스페이스 등의 변화는 개인수업과 집단수업이 자연스럽게 병행되면서 관계맺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한다.

이렇게 되면 다양한 토의, 토론, 융합, 강의, 사색, 대화, 휴식, 놀이 등의 다양한 활동이 제공되어 다양한 수업을 실시할 수 있게 된다.

 

오픈형 교실, 자유롭게 모여 앉을 수 있는 개방형 의자

 

특수학생들만 이용하는 특수교실이 아닌 모든 학생이 놀러올 수 있는 특별반(좌)

자칫 딱딱한 상담이 될수도 있는 상담교실에 설치한 평상으로 한결 편안해진 상담실(우)

 

앞 뒤 구분 없이 책상 배열이 자유로운 교실과

폴딩도어로 시청각, 발표, 공연 등 다목적 기능을 넘나들 수 있는 다용도실

 

마찬가지로 폴딩도어로 자치활동을 분할하기도 하고 함께 사용할 수도 있는 공간활용과

한 공간안에 소모임, 아고라모임, 개인 열람이 모두 가능하도록 활성화된 동아리 교실과 도서실

 

모여서 발표수업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조별 소모임, 개별 독서공간이 두루 갖춰진 교과 교실

제대로 실슴을 실시할 수 있는 특별 교실들

책 열람과 함께 메이커 스페이스 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창의성을 마음껏 발현할 수 있는 도서관

이러한 공간이 조성된다면 위의 20가지 학습 양식을 모두 구현할 수 있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개별 열람 개인의 자습이 가능하고

그룹 공간의 공존으로 토의 토론, 아고라 교실이 가능하며

갤러리 전시는 물론, 강의, 공연이 모두 가능한 오픈형 움직이는 공간의 구성은

삶과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안전한 환경, 창의적이고 종합적(교육, 놀이, 자연, 삶)인 환경,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는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고려한 통합 교육 환경을 조성해 주는 곳이 학교여야 한다.

학교공간은 학생들의 참여로 개선되는 것 뿐만아니라 그곳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 하는 내용도 중요하고, 이후 유지하고 관리해 나가며 지속하는 것 까지 모두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책, '학교 공간, 이렇게 바뀌었어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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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전사 소은하 창비아동문고 312
전수경 지음, 센개 그림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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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창비 #사전서평단 에 당첨되었다.

깜냥 이후에 두번째 #어린이책 인 #별빛전사소은하 이다.

 

『별빛 전사 소은하』는 박진감 넘치는 서사와 우주적 서정이 결합한 SF 동화로 현실과 가상 세계, 지구와 은하 저편을 오가는 모험이 펼쳐지는 책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창비의 #한학기한권읽기 추천 신간 어린이책.

 

 

 

 

 

 

이전에 읽었던 깜냥이 '저학년'에게 어울리는 그림책이었다면, 이책은 '고학년'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사실 어른의 시점에서 어린이 책을 읽고 서평하는 것이 과연 맞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초반 부분을 읽으면서 이미, '에이~'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앞으로 펼쳐질 상상력에 대해 제동을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항마력 테스트 하듯이 중반부분으로 넘어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지금 책을 잘못읽고 있는거 같아.

 

'생각해 보면, 어렸을때 보던 만화영화나 책들 다 이런 내용이였던 것 같아. 이런 상상, 어릴때 많이 했었어'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고전 만화들 속 주인공은 항상 외계행성과 연관 있었다.

 

어렸을 때 즐겨보던 만화 들은 다 설정이 외계나 마법세계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뭔가, 그 만화속 주인공처럼 어느날 갑자기 신비한 힘이 생긴다던가, 지구가 멸망해도 나만은 뭔가 신비한 힘이 있어서 살아남는거 아니야? 라는 상상도 하기도 했다.

 

그런 어린시절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어린이의 감성으로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결말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정쩡한 애어른의 시선으로 읽었던 지라, 책을 읽으며 어쩔 수 없이 이런 부분에 중점을 두고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으음~ 작가는 이런 걸 말하고 싶었던 거로군. 하면서 교훈 찾기.

 

 

'사소한 것에 분노할 줄 알아야 세상이 바뀐다'

'어려울때 곁에 있어준 사람들을 잊으면 안된다'

'매너와 룰을 지키며 당당하고 진지하게 경쟁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경험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는 세상과 세상과의 만남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주는 것이 때로는 위로가 된다'

'도움이 필요없는 인간은 없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있다.'

 

어린이의 시점으로 상상력 충분히 즐기기, 그러면서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 찾기. 그 두가지 시점에서 읽어 본 책, 바로 『별빛 전사 소은하』이다.

 

『별빛 전사 소은하』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별빛 전사』는 가상현실인 게임 아이디,

『소은하』는 현실세계에서의 이름,

그리고 이 두계의 세계는 열결되어

게임 속의 설정이 현실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내막에는 '우주우월주의파' 에서 주장하는

'진화한 인류가 우주를 지배해야 한다'는 음모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자와

이를 저지하려는 자의 치열한 분투가 있었고,

은하는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관계에 대해서 배워나가게 된다.

 

 

10대가 되면 또래와 매체가 관계와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는데 큰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직,간접적인 체험을 하느냐가 중요하게 되는데 전수경 작가는 아이의 시점에서 그 소재들을 탁월하게 사용했다.

 

PC방, 게임랭킹, 댄스부, 피구대회, 별명, 무리짓기와 험담하기 등.

 

이무렵에 가장 신경쓰게 되는 요소들을 공상과학과 연관지어 잘 풀어낸 이야기와 맞물리니 소은하의 세계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우주엥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 칼 세이건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바법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클라크

 

작가의 말에 이 글에 영감을 두 문장이 나와있다.

사실 이 외계인 소재는 전연령을 통틀어 가장 많이 다뤄진 흔한 소재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늘 재미있는 소재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 광활한 우주에 내 곁에 있는사람이 외계인일수도 있고, 과거나 미래에서 온 사람일 수도 있고, 비밀요원이나 살인자 일수도 있고, 또 다른 모습의 나(도플갱어)일 수도 있다는 상상은 누구나 한번쯤은 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마법이라고 생각했던 기술들이 실현되는 SF적 상상도.

 

 

이 책의 사전 서평단을 신청하게 된 계기가 되는 문장은 바로 책의 홍보 문장이자, 가장 마지막인 이 문장이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있다.

-『별빛 전사 소은하』 전수경

 

이 대사가 흥미로웠다.

 

'나에 대해서 잘 알 수록 세상 일에 덜 흔들리지' 라고 했던 영화의 대사가 생각나기도 했고,

 

처음엔 그냥 정체성과 하고싶은 일을 찾는 진로찾기 같은 얘기일거라 생각했는데, 그 앞문장을 알고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남들이 뭐라고 수군거려도 속상해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잘 모르지만, 나는 나를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로 연결되는 문장을 보고, 아아 이건 '자아존중감(자존감)'과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구나 싶었다.

 

그래서 외계인인 은하와, 분노의 질주 소령과, 고스트레이더 기범이 친구가 되었고, 그들의 세계를 존중하고 협력하면서 각자의 신념과 어울어지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있었구나. 하는 생각.

 

B612행성의 어린왕자와 앙가라항성계 헥시나 행성의 소은하

어른이 되어 어린이 책을 읽는다는 것

 

 

카페에서 소은하를 읽었다.

조용히 감상을 정리해보려는데 카페 장식인 어린왕자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운건 마찬가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일,

길들이는 것에 대한 책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그를 위해 소비한 시간,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

 

이책은 분명 어린이가 그시절에 읽기 시기적절한 책임이 분명하지만,

어른이 되어 어린이책을 읽는 다는것도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유치하다'는 말은 곧 내가 얼마나 상상력이 결여되고 있었는가를 느끼게 해주는 말이되고, 그시절 당연한 것들이 지금은 당연하지 않게 되었음에 솔직하지 못한 지금을 짚어주고, 그럼에도 와닿는 말들이 있다면 추구하고 있는 가치관과 닿아있을테니. 가끔은 예전에 읽은책을 다시 들춰보거나 어린이책을 읽어보는것도 괜찮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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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트넛 스트리트
메이브 빈치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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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날은 없어요. 하루하루 행복하지 않아요. 불평하는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덤덤하게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행복해야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일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그들은 정말 친구일까?"


관계에 있어 어딜가나 존재감이 있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그들의 이름과 어떤 생일파티에 모두 초대받으며 어떤 생일을 보냈는지 꼭 알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 못한다면 틀린일일까. 


이것 또한 생각해 볼 일이다. 


주인공 돌리는 열 여섯살의 생일을 앞두고 들뜬 엄마 앞에서 그날이라고 해서 꼭 행복한 날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꼭 생일이 행복한 기억으로 꼭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엄마는 자신의 열여섯살의 생일의 사소한 기억이 행복하게 오래 남아있으므로, 자녀역시 그러길 바랬다.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리고 다른 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줘"


라는 엄마의 말에 나온 대답이 첫 대답이다. 


"행복한 날이 아닐거예요."


이때 '늘 무슨 말을 하면 될지 알았고, 그 말을 하는'어머니가 안심시켜주는 말을 파도처럼 밀어붙이지 않고, 그저 어깨를 토닥이며 '그래 일상이 늘 행복할 순 없어, 이런날도 있고 저런날도 있지, 시간이 흐른뒤에 행복했다고 느끼는 날도 있어. 네 지금의 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라고 말했다면 돌리는 스스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것 또한 모르는 일이다. 


"다른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일은,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뭐든 다해요?"


"응, 그런것 같은데. 나는 그걸 일찍부터 터득했어. 

다른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면 인생을 헤쳐나가기가 한결 수월해지지."


"하지만 그건 자신이 느끼는 것에 솔직하지 않다는 거잖아요."


"늘 그렇진 않아. 안그래."


이 대화를 통해 돌리는 깨닫는다. 
나는 저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다. 
아아, 엄마의 길과 나의 길은 다르구나. 



그날은 언젠가 그자리에 돌리가 성장한 하루로 남을 것이다.
길은 여러가지라는 사실, 어머니의 방식은 하나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날로. 
반드시 옳은 길일 필요는 없다. 클린 길도 결코 아니다. 
그저 앞에 놓인 많은 길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메이브 빈치 <체스트넛 스트리트> 중, 돌리의 어머니


저 사람은 항상 옳은 길로 가고 있고 내가 가야 할 길도 그 하나의 길일리 없다. 

틀린 길도 없고 수많은 길 중에 하나를 갈 뿐이다.


이소설의 느낌은 부드럽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단편적인 표현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이렇게 느꼈다면 그것이 맞고, 저렇게 보았다면 그것도 맞다라는 표현이 소설의 몇몇 인물을 통해서 이입되기도 하고 반감되기도 하면서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다. 한마디로 복잡한 관계가 복잡한 스트릿처럼 펼쳐져 있으니 이 소설은 체스트넛 스트리트 그 자체이다.


사람과 사람관계도 이들처럼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결코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 흐르는 방향이 틀린 방향은 아니라는 것을.  




* 문학동네 메이브 빈치의 신간소설 『체스트넛 스트리트』의 돌리의 어머니를 읽고 쓴 서평이자 기대평이다. 


"행복한날은 없어요. 하루하루 행복하지 않아요. 불평하는게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길은 여러가지라는 사실, 어머니의 방식은 하나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날로.
반드시 옳은 길일 필요는 없다. 클린 길도 결코 아니다.
그저 앞에 놓인 많은 길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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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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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빛나는 별’ 마샤두 지 아시스 작품 국내 첫 번역본.

'브라질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며 세계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가'라고 소개되는 마샤두 지 아시스는 사실 처음으로 접하는 작가였다.

글 속에는 여러 정치가, 역사가들과의 친분이나 서구 고전들(드 메스트르는 방을, 가헤뜨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고 스턴은 타인의 고향을 여행하는 등 이들 모두는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는 표현 외 고전 작품들의 영향을 다수 볼 수 있다)과도 명맥이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스탈당의 독재시절부터 갓 독립한 브라질의 정치적 상황(노예해방(1888)과 공화정으로의 전환(1889)) 등 당대 사회현실(남녀문제, 노비와 정계 등 폭넓은 사회계층의 문제)들이 녹아 있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이 세계적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19세기와 20세기의 두 세기의 생활양식이 엉켜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역시 문학은 사회의 반영이니까) 감정적인 고뇌와 정신착란의 감정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 마련이니까)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 책,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이다.




사실 어릴적 『젊은 베르테르의 죽음』이라는 책을 접한 이래,

죽음에 관한 책, 특히 자살에 관한 글이라면 관심있게 읽어왔던 것 같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 죽음으로 가고 있어.' 라는 아이러니한 문장에 열광하면서, 만화책이나 소설 등에의 대사에서 이와 관련된 문장들이 나올 때면 관심있게 지켜봤다. 현실이라기보다 다소 열병이나 환상같은 느낌으로.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내 눈에 띄었던 것은 '회고록'이라는 말 앞에 붙은 '사후'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책의 서문에 나와 있는 글귀처럼, "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이 소설인가?"

질문에 이 책에 몇몇 사람에게는 '예', 이면서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오기도 했다는 이 책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산만한 작품이오. 아마도 삶을 두루 여행한 사람인,

나 '브라스 꾸바스'가 자유형식을 취했는지, 염세주의의 투정을 집어넣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오."

이미 죽은 사람의 작품이니, 그러면서도

『브라스 꾸바스』를 『나』 라고 표현했으니 정말 소설이자 소설이 아닐 수 있겠다.

자전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다른 자전소설과 달리 (세속적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 저승에서 (세속적 의무와 책임 속에 살았던)이승의 삶을 회고하는 책이라니.

난 이 작품을 우울의 잉크를 묻힌, 소란스럽고 밝은 펜대로 썼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나는 책의 초반에 나오는 이러한 표현에 박수를 치며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적당히 삐뚤어져있고 적당히 진지한, 익살과 허무가 잘 섞인 이런 문체, 환영한다.


사망한 뒤에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건,

죽음(死)뒤에 다시 삶(生)을 살아보는 것.

글은, 총 160장(章, 번호메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번째 번호는 사후 회고록에 걸맞게 '죽음'에서 시작한다.

1. 저자의 죽음

1805.10.20일에 탄생하여 1869년 8월 어느 금요일 오후 2시, 가뚱비 별장에서 향년 64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독신이였고, 300 꽁두의 재산을 소유했었으며, 11명의 친구가 있었다.

1. 저자의 죽음, 작가가 된 고인

흥미로운 시작이며, 사후 회고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끔 만든다.

화자인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이 1869년 64세로 사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작가 마샤두 지 아시스의 삶은 1839년-1908년으로 작가의 죽음보다 100년(한 세대) 앞선 인물이다. (그래서 인지 책 속에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중학교때였나, 도덕시간에 수행평가로 이러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주제는 '미래 설계'였지만 이미 다 이룬뒤에 과거를 반추하며 써보는 '자서전' 내지는 '회고록'의 형식이였다.

그때 나와 친구들은 자신이 어떠한 업적을 남기는 것 보다,

어떠한 형태로 죽느냐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봤던 것 같다.

병사냐, 자연사냐, 사고사냐, 안락사냐 등등.

죽음을 선택할 순 없지만 마지막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돌아보게 만드므로, 살아있는 도중에 to do list/bucket list를 만들게 하므로, 그렇게 일상을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기에 그 시기에 이러한 생각들을 공유하는건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실제적 현실로 다가온다는건 다른 문제지만.

그는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 죽음은 그다지 드라마 틱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오케스트라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덜 슬펐다.'

'의식이 빠져나간 나는 육체적, 정신적 부동상태에 접어들었다.

육체는 나무, 돌, 진흙,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렸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2. (브라스 꾸바스) 고약.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의 사인이 실은 고약'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나는 이제 저승에 있으므로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

나에게 주된 영향을 끼친, 마침내 약상자에 씌어질 다음과 같은 세단어'

라며 야심차게 발명한 이 고약',

"인류의 우울을 완화시키는 숭고한 의약품"- 브라스 꾸바스의 고약.

이 고약이, [명사]로 쓰이는 '주로 헐거나 곪은 데에 붙이는 끈끈한 약'을 말하는지,

[형용사]로 쓰이는 '흉하거나 험상궂다. 성미나 언행 따위가 사납다'는 뜻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는 그 고약에 대해

'우울증의 꽃보다 덜 노란색이면서 전혀 병적이지 않은 꽃'이라며

'명성애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랑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삶을 돌아보건데 아마도 사랑(인류애)이라기 보다 갈망(명예욕)이지 않았을까 싶다.

3~160.부정적인 것에 이르기 까지.

1, 2장을 시작으로 그렇게, 족보 (18세기 다미어웅꾸바스를 시조로 서류를 위조하여 귀족이 된다), 그날(탄생일), 가족소개,를 시작으로 일생의 중요한 사건, 학교생활, 포로생활, 첫사랑 (내 젊음의 첫 감동) 엄마의 죽음, 아빠의 죽음 , 불륜, 사업실패, 주변인들의 죽음 등의 자신의 일대기와 주요 사건들을 서술에 담는다는 것은 전형적인 회고록의 형식을 갖춘다.

그러면서도 강박관념(강박을 갖기 보다 스스로 되묻는 자가 되길) 정신착란, 부도덕한 생각 등등 신념, 생각, 철학, 고정관념 등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그의 회고(책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독신의 삶으로 결핵으로 사망한 뒤에 자신의 겪었던 정신착란의 증상들을 고백하며 탄생부터의 연대기를 쭈욱 서술한다. 1805년 브라스 꾸바스는 히우지자네이루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난꾸러기였던 어린 시절의 일대기와 첫사랑(마르셀라)에게 선물을 하느냐 아버지의 재산은 물론 대출까지 손을 대어 강제로 유학을 가게 된 청소년기, 대학생활과 어머니의 사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기, 아버지의 연방하원 의원제안과 결혼제안(비르질리아)을 받아들였으나 의외의 인물(네비스)에 의해 출세와 결혼 모두 실패한 일화, 사교모임에서 결혼할 뻔 한 그녀를 다시 만나 불륜, 동거, 권태기, 이별을 겪은 일화, 어릴 적 친구(보르바)가 설파하는 ‘후마니티즘’의 철학적 대화, 장관직과 신문 창간의 실패, 새로운 여성과의 사랑(냥놀로)과 죽음, 이전 사랑(비르질리아)의 남편의 죽음, 옛 친구(보르바)의 치매와 죽음을 거치며 그렇게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어떤 피조물에게도 내 불행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았다”라는 유언을 남긴 죽음에 까지 다시 이르게 된다.



이름만 부르고 끝난다던가,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로 끝난다던가,

몇줄의 문장으로 끝난다던가 하는 니맘대로인 회고록.

연설문장이라던가 묘비명만 소개함으로써

오히려 강렬한 전달력을 주기도 한다.


재미있는건, 그가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였으므로,

아주 '감정적인 서술'이라는 점이 인상깊다.

그가 처음 '산만한 작품'이라고 경고하긴 했지만,

그 자체가 들쑥날쑥한 인간이기에 현재의 감정들을 일종의 믿을 수 없는 착각이나 일시적인 경련으로 보듯 서술하는 장면 묘사들은 역시 그가 죽어서 쓴 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서 얘기했던 '염세주의적인 투정' 때문일까.

문장력이 참으로 엉뚱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나를 믿어라. 가장 덜 나쁜일은 추억하는 것이다.

현재의 행복을 믿어선 안된다.

세월이 흘러 경련이 멈추면 진정한 행복을 즐길 수 있다.

너는 이제 무엇을 더 원하나?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된 나' 라지만 늘 '현재가 과거를 몰아내는 현실의 압도'에서 살아가고, '애벌레'이자 '숭고한 멍청이'로서 '그저 사는 것'에 대한 삶의 철학이 숨어 들어 있다. 시간엔 흘러간 순간이 아니라 다가올 순간이 중요한 법이다. 삶의 재앙과 기쁨, 삶의 영광과 비참함을 더 번식시키는 사랑, 쇠약, 욕망, 분노, 질투, 야망, 배고픔, 공허와 우울, 부와 사랑… 이 세기의 삶을 삼키며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하고, 다른것처럼 소멸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러한 삶을 맞이하는 그의 자세에 주목할만하다.

재미있고 한번 경험해볼 만하죠.

아마 단조롭겠지만 해볼 만 해요. 재미있을 겁니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망자의 경멸적인 시선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삶을 그저 그렇게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다가올 순간이 흘러갈 순간보다 중요하다.

강하고, 기쁘고, 죽고, 소멸하고 흐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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