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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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빛나는 별’ 마샤두 지 아시스 작품 국내 첫 번역본.

'브라질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며 세계문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가'라고 소개되는 마샤두 지 아시스는 사실 처음으로 접하는 작가였다.

글 속에는 여러 정치가, 역사가들과의 친분이나 서구 고전들(드 메스트르는 방을, 가헤뜨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고 스턴은 타인의 고향을 여행하는 등 이들 모두는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는 표현 외 고전 작품들의 영향을 다수 볼 수 있다)과도 명맥이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스탈당의 독재시절부터 갓 독립한 브라질의 정치적 상황(노예해방(1888)과 공화정으로의 전환(1889)) 등 당대 사회현실(남녀문제, 노비와 정계 등 폭넓은 사회계층의 문제)들이 녹아 있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이 세계적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19세기와 20세기의 두 세기의 생활양식이 엉켜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역시 문학은 사회의 반영이니까) 감정적인 고뇌와 정신착란의 감정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 마련이니까)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 책,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이다.




사실 어릴적 『젊은 베르테르의 죽음』이라는 책을 접한 이래,

죽음에 관한 책, 특히 자살에 관한 글이라면 관심있게 읽어왔던 것 같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 죽음으로 가고 있어.' 라는 아이러니한 문장에 열광하면서, 만화책이나 소설 등에의 대사에서 이와 관련된 문장들이 나올 때면 관심있게 지켜봤다. 현실이라기보다 다소 열병이나 환상같은 느낌으로.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내 눈에 띄었던 것은 '회고록'이라는 말 앞에 붙은 '사후'라는 단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책의 서문에 나와 있는 글귀처럼, "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이 소설인가?"

질문에 이 책에 몇몇 사람에게는 '예', 이면서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오기도 했다는 이 책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산만한 작품이오. 아마도 삶을 두루 여행한 사람인,

나 '브라스 꾸바스'가 자유형식을 취했는지, 염세주의의 투정을 집어넣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오."

이미 죽은 사람의 작품이니, 그러면서도

『브라스 꾸바스』를 『나』 라고 표현했으니 정말 소설이자 소설이 아닐 수 있겠다.

자전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다른 자전소설과 달리 (세속적 의무와 책임에서 벗어난) 저승에서 (세속적 의무와 책임 속에 살았던)이승의 삶을 회고하는 책이라니.

난 이 작품을 우울의 잉크를 묻힌, 소란스럽고 밝은 펜대로 썼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나는 책의 초반에 나오는 이러한 표현에 박수를 치며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적당히 삐뚤어져있고 적당히 진지한, 익살과 허무가 잘 섞인 이런 문체, 환영한다.


사망한 뒤에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건,

죽음(死)뒤에 다시 삶(生)을 살아보는 것.

글은, 총 160장(章, 번호메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번째 번호는 사후 회고록에 걸맞게 '죽음'에서 시작한다.

1. 저자의 죽음

1805.10.20일에 탄생하여 1869년 8월 어느 금요일 오후 2시, 가뚱비 별장에서 향년 64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독신이였고, 300 꽁두의 재산을 소유했었으며, 11명의 친구가 있었다.

1. 저자의 죽음, 작가가 된 고인

흥미로운 시작이며, 사후 회고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끔 만든다.

화자인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이 1869년 64세로 사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작가 마샤두 지 아시스의 삶은 1839년-1908년으로 작가의 죽음보다 100년(한 세대) 앞선 인물이다. (그래서 인지 책 속에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중학교때였나, 도덕시간에 수행평가로 이러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주제는 '미래 설계'였지만 이미 다 이룬뒤에 과거를 반추하며 써보는 '자서전' 내지는 '회고록'의 형식이였다.

그때 나와 친구들은 자신이 어떠한 업적을 남기는 것 보다,

어떠한 형태로 죽느냐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봤던 것 같다.

병사냐, 자연사냐, 사고사냐, 안락사냐 등등.

죽음을 선택할 순 없지만 마지막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돌아보게 만드므로, 살아있는 도중에 to do list/bucket list를 만들게 하므로, 그렇게 일상을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기에 그 시기에 이러한 생각들을 공유하는건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실제적 현실로 다가온다는건 다른 문제지만.

그는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 죽음은 그다지 드라마 틱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오케스트라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덜 슬펐다.'

'의식이 빠져나간 나는 육체적, 정신적 부동상태에 접어들었다.

육체는 나무, 돌, 진흙,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렸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2. (브라스 꾸바스) 고약.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의 사인이 실은 고약'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나는 이제 저승에 있으므로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

나에게 주된 영향을 끼친, 마침내 약상자에 씌어질 다음과 같은 세단어'

라며 야심차게 발명한 이 고약',

"인류의 우울을 완화시키는 숭고한 의약품"- 브라스 꾸바스의 고약.

이 고약이, [명사]로 쓰이는 '주로 헐거나 곪은 데에 붙이는 끈끈한 약'을 말하는지,

[형용사]로 쓰이는 '흉하거나 험상궂다. 성미나 언행 따위가 사납다'는 뜻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는 그 고약에 대해

'우울증의 꽃보다 덜 노란색이면서 전혀 병적이지 않은 꽃'이라며

'명성애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랑이라고 표현했지만 그의 삶을 돌아보건데 아마도 사랑(인류애)이라기 보다 갈망(명예욕)이지 않았을까 싶다.

3~160.부정적인 것에 이르기 까지.

1, 2장을 시작으로 그렇게, 족보 (18세기 다미어웅꾸바스를 시조로 서류를 위조하여 귀족이 된다), 그날(탄생일), 가족소개,를 시작으로 일생의 중요한 사건, 학교생활, 포로생활, 첫사랑 (내 젊음의 첫 감동) 엄마의 죽음, 아빠의 죽음 , 불륜, 사업실패, 주변인들의 죽음 등의 자신의 일대기와 주요 사건들을 서술에 담는다는 것은 전형적인 회고록의 형식을 갖춘다.

그러면서도 강박관념(강박을 갖기 보다 스스로 되묻는 자가 되길) 정신착란, 부도덕한 생각 등등 신념, 생각, 철학, 고정관념 등에 대해 이야기 하며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다.

그의 회고(책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독신의 삶으로 결핵으로 사망한 뒤에 자신의 겪었던 정신착란의 증상들을 고백하며 탄생부터의 연대기를 쭈욱 서술한다. 1805년 브라스 꾸바스는 히우지자네이루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난꾸러기였던 어린 시절의 일대기와 첫사랑(마르셀라)에게 선물을 하느냐 아버지의 재산은 물론 대출까지 손을 대어 강제로 유학을 가게 된 청소년기, 대학생활과 어머니의 사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기, 아버지의 연방하원 의원제안과 결혼제안(비르질리아)을 받아들였으나 의외의 인물(네비스)에 의해 출세와 결혼 모두 실패한 일화, 사교모임에서 결혼할 뻔 한 그녀를 다시 만나 불륜, 동거, 권태기, 이별을 겪은 일화, 어릴 적 친구(보르바)가 설파하는 ‘후마니티즘’의 철학적 대화, 장관직과 신문 창간의 실패, 새로운 여성과의 사랑(냥놀로)과 죽음, 이전 사랑(비르질리아)의 남편의 죽음, 옛 친구(보르바)의 치매와 죽음을 거치며 그렇게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어떤 피조물에게도 내 불행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았다”라는 유언을 남긴 죽음에 까지 다시 이르게 된다.



이름만 부르고 끝난다던가,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로 끝난다던가,

몇줄의 문장으로 끝난다던가 하는 니맘대로인 회고록.

연설문장이라던가 묘비명만 소개함으로써

오히려 강렬한 전달력을 주기도 한다.


재미있는건, 그가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였으므로,

아주 '감정적인 서술'이라는 점이 인상깊다.

그가 처음 '산만한 작품'이라고 경고하긴 했지만,

그 자체가 들쑥날쑥한 인간이기에 현재의 감정들을 일종의 믿을 수 없는 착각이나 일시적인 경련으로 보듯 서술하는 장면 묘사들은 역시 그가 죽어서 쓴 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서 얘기했던 '염세주의적인 투정' 때문일까.

문장력이 참으로 엉뚱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나를 믿어라. 가장 덜 나쁜일은 추억하는 것이다.

현재의 행복을 믿어선 안된다.

세월이 흘러 경련이 멈추면 진정한 행복을 즐길 수 있다.

너는 이제 무엇을 더 원하나?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이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된 나' 라지만 늘 '현재가 과거를 몰아내는 현실의 압도'에서 살아가고, '애벌레'이자 '숭고한 멍청이'로서 '그저 사는 것'에 대한 삶의 철학이 숨어 들어 있다. 시간엔 흘러간 순간이 아니라 다가올 순간이 중요한 법이다. 삶의 재앙과 기쁨, 삶의 영광과 비참함을 더 번식시키는 사랑, 쇠약, 욕망, 분노, 질투, 야망, 배고픔, 공허와 우울, 부와 사랑… 이 세기의 삶을 삼키며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하고, 다른것처럼 소멸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러한 삶을 맞이하는 그의 자세에 주목할만하다.

재미있고 한번 경험해볼 만하죠.

아마 단조롭겠지만 해볼 만 해요. 재미있을 겁니다.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마샤두 지 아시스

망자의 경멸적인 시선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삶을 그저 그렇게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다가올 순간이 흘러갈 순간보다 중요하다.

강하고, 기쁘고, 죽고, 소멸하고 흐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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