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김희진 옮김 / 현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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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학의 신기원이라 일컬어지는 <파타고니아>의 저자 브루스 채트윈이 쓴 두번째이자 마지막 여행서이다. 좋아하는 작가를 꼽으라고 하면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브루스 채트윈, 특히나 <송라인> 이 책은,  오래전부터 읽고 싶어했음에도 여태껏 읽지 못한 채 보관함에 넣어져 있던 것이었다. 원서로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호주 여행기라는 정보에 다소 뜨악해져서 매번 망서리고 있었는데, 기대하지 않고 있던 번역서가 나왔다는 소식에 어찌나 반갑던지... 냉큼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고작 <파타고니아> 한 권만 달랑 읽은 작가임에도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흥분하는 이유는 그가 단 한권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게 할 만큼 매력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호들갑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다. <파타고니아>를 처음 출간할 당시 원고를 검토하던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원고와의 만남은] 내가 출판 편집 일을 하면서 경험한 가장 짜릿한 열 가지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지금껏 내가 검토해온 다른 저자들의 원고들과는 전혀 달랐다.” 고 말이다. 난 그의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란 것을 안다. 나 역시도 " 그와의 만남은 나의 독서 생활에서 경험한 가장 충격적인 열 가지 '사건' 중 하나였으며, 지금껏 보아 온 다른 작가들의 책과 전혀 달랐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식상하기 짝이 없는 기행문이라는 장르에 독특하고도 색다른 문법으로 여행기를 적어 내려가던 브루스 채트윈의 등장은 그만큼 신선했었다. 오죽하면 기행문계의 <콜럼부스의 달걀>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아무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쓰지 못한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자연스럽고도 재치있는 입담으로, 기행문의 새로운 어법을 제시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이야기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하지만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독창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브루스 채트윈, 그 자신이였다.  그 어떤 여행지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영혼을 그는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어디를 가건 간에 당신을 가지고 가는 것엔 변함이 없을 거란 말한 소크라테스의 말은 과연 틀리지 않아, 기행문에서 우리가 종국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영혼이니 말이다. 어디를 갔건, 어떤 사람을 만났건 간에 결론은 그렇다. 그런걸 감안해보면 내가 왜 이 작가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하게 되실 것이다. 내가 열광하는 상대는 바로 다름아닌 브루스 채트윈이란 것을 말이다.

 

그 브루스 채트윈이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가 <송라인>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지... 송라인은 보이지 않은 길이다. 일명 <꿈의 자취>라고 일컬어지는 그 길은 호주 애보리진 사이에서 자신의 영역을 나타내주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말로 하자면 노래로 된 토지 문서라고나 할까. 태어나면서부터 애보리진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송 라인은 그가 가질 수 있는 땅이며 보호하는 토템, 그리고 혈연관계등을 나타내 준다고 한다. 호주의 그 드넓은 땅에 대해 아무도 권리가 없다고 백인들은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애버리진은 자신의 땅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줄 명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백인들은 문서화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이 애매하기 짝이 없는 노래로 구전되어 온다는 이유로 무시했다는 것이다. 척박한 호주 서부 사막에 백인들이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그나마 갈등이 덜했으나, 그 땅이 금 기타 광물의 보고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래서 기찻길이 놓여야 하는 이유가 생긴 뒤부터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지만 자신의 땅에 누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백인과 애보리진, 강자와 약자, 문서와 구전 사이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브루스 채트윈이 송라인에 관심을 갖고 호주로 여행을 가게 된 것이 바로 그 즈음이라고 한다. 그는 백인들에게 배타적인 애보리진을 설득해가면서 송 라인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것을 절대 애보리진에게 나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 특유의 친화성도 한 몫 했었겠지만, 그를 믿고 중간자 역활을 한 러시아계 이민자의 후예인 '아카디'의 도움이 컸다. 채트윈 혼자라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 내진 가보지 못했을 곳까지 그가 안내했으니 말이다. 그의 도움과 호주 체류 기간동안 만난 많은 사람들 덕분에 채트윈은 애보리진들의 송라인에 대해 점차 감을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정 중간 중간 그는 자신이 그간 적어온 유목민에 대한 단상에 대해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유목민의 자손, 즉 노마드의 후예이며, 지치지 않는 방랑벽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끊임없이 땅을 배회하는 애보리진이야말로 자신과 같은 노마드임을, 그래서 자신이 송라인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데...


리뷰가 길어지는 관계로 골자만 적어보기로 한다. 역시나 채트윈의 명성이 아깝지 않는 여행서였다. 어제 쓴 것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현대적인 목소리는 나온지 25년이 지난 책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고, 비록 그가 죽었음에도 우리와 같은 시대 사람임을 자각하게 해줬다. 문장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시야로 세상을 보게 만드는 능력은 대단히 드문 것인데, 능수능란한 이 작가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더라. 이제 내가 왜 채트윈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실 것이다. 그는 매같은 영혼을 가진 노마드 였는데,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이 매의 등에 타고 올라가 호주를 여행하고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눈을 통해 바라본 호주는 내가 여지껏 읽어본 어떤 호주보다 더 친근하고 이질감이 없어서 놀랐다. 그건 어디에서건 이질감보단 동질감을 찾아내는 그의 친화력 덕분이 아닐까 싶었는데, 빌 브라이슨조차 괴이함과 낯설음을 숨길 수 없어 하던 호주를 마치 자기 모국처럼 편하게 대하는데 두손 두발 들고 말았다. 애보리진에 대한 것은 또 어떤가? 애보리진을 진화 과정상 원숭이와 인간 그 중간 단계에 끼인 원시인이라고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는 아무런 편견없이 그들을 대한다. 아예 편견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렇다. 살다보면 종종 이런 사람을 만난다. 아주 아주 드물게...본질 그대로를 볼 줄 아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때면 부끄러워 진다. 세상에 색안경을 쓰고 사는 내 자신을 보게 되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능력으로 독자들을 가르치거나 모욕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었으니, 그것이 대단히 드문 자질이라는 것을 아마도 모르는 듯했다. 직접 그를 만났던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놀랍지도 않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단박에 짐작이 되는 사항이니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내려 가다 정말로 나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장을 읽어본 느낌으로 나는 그가 꽤 오랫동안 죽음에 대해 고찰해 왔으며, 어떻게 죽는가에 대해,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왔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반응은 이랬다. 왜? 고작 마흔 다섯의 나이에 왜 이런 생각들을 하고 다닌 것이지? 라는...<파타고니아>에서 그가 중국을 여행중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그가 예기치 않게 비명횡사한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걸 짐작하고 있더란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는 어떻게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이라는걸 알 수 있었지? 라는 의문이 머리속에 떠나지 않았는데, 그 뒤에 나오는 역자의 말을 읽고 나니 이해가 갔다. 양성애자였던 브루스 채트윈은 80년대 초에 AIDS걸려 1989년 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듯 멍한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의 병명을 알면서도,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껴안고 이 여정을 강행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80년대라면 AIDS에 대한 편견과 치욕과 두려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다. 과연 그는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이 책 안에서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던데 말이다. 그나마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었더라면 나는 결코 그가 죽음의 망령을 껴안고 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서도 자신이 아닌 미지의 것에 눈길을 돌리는 그의 천진난만함이 애처로워지던 순간이었다. 아마도 신은 그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매력적인 성품을 주시고, 그가 그것을 다 쓰기도 전에 서둘러 데리고 가신 모양이다.  그는 만족 했을까? 자신의 정체성 혹은 영혼이라 말할 수 있는 방랑벽에 대해 사람들에게 토로할 수 있어서 말이다. 그의 넘치지 않는 유머 감각이, 그의 다정한 성품이, 그의 통찰력과 안목이, 그의 멈추지 않는 입담이, 그리고 과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리고 그의 영혼이, 아스라히 그리워 지는 밤이다. 그가 한때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그가 이 지구에서 겪었을 고통이 끝나버린 것에도 감사를...비록 오래전 일이지만서도 말이다. 내가 그때 그걸 알았다해도 바로 그런 심정이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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