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블레이크 모리슨 지음, 황보석 옮김 / 포레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천년 만년은 아니라도 백년은 넉근하게 사실줄 알았던 아버지가 일흔 다섯 나이에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자, 저자는 자신이 슬프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나이를 마흔 한 살이나 먹었으니, 한 집안의 가장이 되고, 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잘 나가는 작가로 상도 받고...그렇게 어른이 되었으니 이젠 자신이 대처할 수 없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영생을 살 수는 없으니 자신이 먼저 죽지 않는 한 부모의 죽음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견디기 힘든 충격으로 다가온다.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격렬한 슬픔에 저자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자신의 슬픔을 다스려 보려는 생각해서 시작된 것이, 나중엔 자신을 치유하는 글쓰기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나오게 된 계기다.

아버지를 보내면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세월을 회고하고 있던 자전적 소설이다. 아버지라는 분이 얼마나 특이하신 분이었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독특한 방식으로 자식 사랑을 드러내셨었는지,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아버지와 왜 마지막까지 그렇게 서먹할 수밖엔 없었는지라는 것에 대해 적나라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가감하는 것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첫장부터 작가는 범상치 않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의사라는 신분을 이용, 교통 체증에 막혀 누구도 꼼짝 하지 않은 도로를 청진기를 휘둘러서 빠져 나오는 아버지 아서, 가족들은 다들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지만서도 그는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것에 마냥 의기양양해 한다. 그렇다. 이 아버지는 고지식과는 거리가 먼, 지름길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길로 가려고 하는, 없다면 만들어서라고 가려고 할 그런 사람이었다. 외아들의 직업이 작가건만 유일하게 읽은 책이 <조스>라는 아이러니는 차지하고서라도, 막 부임한 신임 목사에게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었던 사람, 내연녀를 이모라는 이름으로 가족들 근처에 얼쩡 거리게 두면서도 그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 그런 비밀을 입 밖에 내지 않는 한 아내에게 상처가 될 리 없다고 생각한 사람, 마흔이 넘는 아들 주변을 완벽하게 보호하면서 그것이 아들에게 부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 남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걸 체면 손상이라고 여겼을 사람, 누구에게나 직설적이고, 참을성이 없으며, 임기 응변과 순발력의 달인이었던 사람...그는 과연 나쁜 사람이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은인이라고 여기던 그가? 하지만 가족으로써 아버지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저자는 아버지를 총체적으로 점검해 본다. 그리곤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대한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고 있던 소설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보니, 치부라고 할 만한 사실도 솔직하게 써내려 간 것이 특징. 지금이야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서도,  20여년전에 나온 책이니 당시로써는 좀 외설스럽다는 말을 듣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의사였던 아버지와 엄마 덕분에 죽음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작가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는 사실에 어찌나 당황하고 놀라던지, 내가 다 심장이 내려 앉을 정도였다. 하긴 평생 자신 옆에 있었던 사람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관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 십분 이해가 되는 상황이긴 하지만서도, 심하다 싶긴 했다. 진실에서 빗겨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작가의 필사적인 몸부림은 칭찬받아야 마땅할 것이나, 다만, 이렇게 자세하게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할까 , 꼼꼼해도 너무 꼼꼼하다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죽음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별로였다. 작가도 그런 자신을 의식했는지 이런 말을 한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글을 본다면 이런 말을 했을 거란 것이다.

  "이 한심한 얼간이 녀석아,
염병할 칠십 오 년중에서 사십 년이 넘는동안
너도 네 삶을 살았는데
하는 짓이라는 게 고작 다 죽어가는 내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라니.
이 어리석은 놈아, 너는 죽어간다는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라도 된다고,
그게 무슨 이야깃거리가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죽음에 뭐 그리 대단한 게 있어?
그러지 말고 내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우리가 누렸던 모든 즐거움과 이룬 일들이 어땠는지
내가 너와 네 동생과 네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내가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남기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나 얘기해라.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하지?"

정말로 옳은 말이다. 죽는다는 것에 호듭갑을 떨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누군가 한번쯤은 겪어야 하는 과정인 것을. 해서 죽음에 대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적어 내려가는 저자가 심하다 싶긴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정할 수 밖엔 없었다. 그가 그것을 꽤나 잘했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을 마치 옆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하면서 우아함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솔직함과 우아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서도 용케 균형을 잃지 않는 그를 보려니, 저자가 어떻게 이런 저런 큰 상을 수상하게 되었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만큼 필력이 출중했단 말씀.

제목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 제목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이 작가는 아버지가 암을 판정받은 순간에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거기에 입관하는 장면까지 함께 한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 못할리가 없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아버지의 시신은 더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리던 간에, 영혼이건, 삶의 정수건 ,생명이건 간에, 그것이 떠난 아버지의 몸은 더이상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그걸 직접 체험한 저자는 생각한다. 과연 그 사람을 본인이라고 여기게 만드는건 무엇일까 라고.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충분히 그의 말을 이해할 듯...해서 그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하고.

" 관뚜껑이 덮이기 전이었습니까?
그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였습니까?
마지막으로 일어나 앉아 무슨 말인가를 했을 때였습니까?
당신을 마지막으로 알아보았을 때였습니까?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을 때였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은 저자가 자신에게 한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겠지. 누구에게나, 그 사람과의 마지막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장면이 있을테니 말이다. 내 단언컨대, 그건 절대 관뚜껑하고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살아있음을 우리가 추앙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살아있음만 기억하기 때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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