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여자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멜론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읽으면서 내내 이 책이 몇 년도에 쓰여진 것인지가 궁금했다. 왠지 한참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다. <우연한 여행자> 보다는 먼저 쓰여진게 아닐까 싶었는데, 맞는가는 모르겠다. 하여간< 우연한...>보다 세련된 된 점이나 유머나 개연성이 부족한 것을 보면 분명 

그 전 작품이 맞지 싶다. 우연한 이후 작품에서 보여주는 낙관성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앤 타일러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작품마다 드러나는 요소들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신경을 거슬리는 것은 구원신드롬이었다. 왜 앤 타일러는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에 이다지도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아버지가 목사 였다고 들은것 같은데, 아마도 어린 시절 목사관에서 자란 영향일까? 그녀의 주인공들은 다 누군가를 구원하거나, 아니면 구원 당하는 사람들이다. 어렸을 적엔 그녀의 이런 작품관에 열광했었다. 누군가 나를 구원해주면 하고 바랐었고,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밝아진다는 컨셉이 마음에 들었으며, 혼자 살수 없는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이끌어줄 존재를 간절히 갈망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 앤 타일러의 작품에 내가 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아마도 그건 앤 타일러 역시 마찬가지였는가 보다. 최근작< 노아의 나침반>을 보면 과감하게 자신을 구원해주겠다고 다가오는 젊은 여자를 뿌리치는 육순의 아저씨가 주인공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책이 작가의 초기작이 아닐까 짐작하는 것이다. 그녀가 아직 젊을때,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낭만적인 시선은 버리지 않았던 그런 시절의 글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나도 나이를 먹은 모양이다. 젊은 시절 읽었다면 이 책도 반색을 하며 보았겠지만, 지금 보니 한심하단 생각밖엔 들지 않으니 말이다. 왜 작가는 이렇게 구원 신드롬에 잡혀 살았던 것일까?가 궁금했고, 왜 그렇게 착해야만 한다고 그녀는 생각한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것이 시대의 산물인지, 아니면 그녀가 이 글을 쓸때 젊었기에 가지는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분히 감상적으로 보였다. 왜냐고? 우리는 누구를 구원해줄 수 없으니까, 결국에는 말이다. 모든 관계를 냉정하고 냉혹하게 바라보는게 아니라, 그저 구원의 관점에서 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것이 주인공이다라는 설정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과연 그게 자연스러운 관점일까? 우리는 정신 병자들을 늘 그렇게 구원해줘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행복으로 끝나는 것이 가능할까? 맞다.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과연 그런 구원이 과연 마지막까지도 행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앤 타일러는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이야기처럼 그저 그들이 헤어지지 않고 다시 살게 되는 것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이제 더 이상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답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던데, 과연 그렇게 될까? 문제가 많은 인간들을 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것이 단지 구원을 하겠다고 나선 당사자의 희생정신만으로 한방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것일까? 목소리는 작지만 비교적 패미니스트적인 톤으로 이야기하시던 작가라서 좀 의아했다. 이제와서 보니 그녀의 책은 모두 비슷하게 구원 스토리나 신델렐라 스토리라는걸 깨달아서 말이다. 그녀는 여자의 희생이 모든 것을 평정하게 하리라 믿었던것 같다. 그녀는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도 구원해줄 자만 나타난다면 모든게 다 정상이 될 거라고 믿은 것 같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정상이 아닐지라도 그래도 파국에는 이르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흠...과연 그럴까? 거의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여지껏 그녀의 작품속에 들어있던 구원 스토리에 내가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분했다. 나는 어디까지 어린아이였던 것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신델렐라를 믿는 그런 어린아이에 불과했던게 아니었는지 반성하면서 본 책이 되겠다.


이야기는 이렇다. 평생 부자로만 살아서 부족함 없이, 그리고 우아하게 평생을 살아온 에머슨 부인은 남편의 죽음으로 평정을 잃는다. 결국 평생을 보아오다 시피한 정원사를 해고한 뒤 우연히 만난 엘리자베스를 채용한다. 목사인 부모집을 떠나, 대학을 휴학하고 여기저기 떠돌던 엘리자베스는 의외로 집안 잡부일에 소질을 보인다. 남편이 죽은 뒤 허전해 하던 에머슨 부인은 그제서야 서서히 일상을 찾아 나가고, 엘리자베스는 그녀대로 잡부로써의 자긍심을 갖게 된다. 에머슨 부인이 낳은 일곱 자녀들은 다들 조금은 괴짜에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그 중 의대생이던 티모시와 데이트를 하던 엘리자베스는 나중에 그의 형인 매튜와 친해지게 된다. 둘이 사랑하는 사이라는걸 알게 된 티모시는 엘리자베스 앞에서 자살을 하고, 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집으로 달아난다. 그런 사연을 알지 못했던 매튜는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애원을 해보지만, 돌아가지 않겠다는 엘리자베스의 결심을 확고하다. 결국 한없이 멀어진 두 사람은 몇 년이 흐른 뒤 에머슨 부인이 쓰어짐에 따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우선, 형제 둘과 같이 만난다는 설정이 기가 막힌다. 엘리자베스는 꼭 그래야만 했을까? 티모시가 자살한 것에는 그만의 이유가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형제 둘을 갖고 놀 꼴밖엔 안 되는 엘리자베스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왜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 수가 있나? 60년대의 모럴이 그랬었나? 형제와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에 조금은 당사자에게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았나? 난 남동생이 둘 있어서 그런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 여자를 두고 형제가 싸우다 , 동생이 자살을 한다. 그런데 여자는 절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물론 자살이 그녀의 탓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상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만큼은 자신을 책해도 좋지 않을까? 더군다나 형제 사이에 양다리란... 그냥 양다리도 기분 나쁜 것이구만서도 말이다. 하여간 여러모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소설이었다. 마지막 역시 찜찜함으 남긴 채 끝이났고.물론 책에선 해피엔딩이었만서도, 그게 영 믿겨지지 않더란 말이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의문 부호가 여전히 남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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