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평화롭겠지
헤르브란트 바커르 지음, 신석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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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진지하게 들여다 봤더라면 못 봤을 책이다. 평화니 사랑이니 우정이니, 그런 노골적이고 감상적인 단어가 달린 책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 몇 장을 읽어 보니 내용이 예사롭지 않기에  제목을 확인해 보곤 놀라고 말았다. 너무 뻔해서 초장부터 김이 새는 제목이었으니 말이다. 첫문장의 매력에 이미  빠진 뒤였기에 망정이지, 제목부터 봤다면 안 집어들었을 것이다. 그 후에도 제목이 가져다 준 충격이 가시질 않아, 읽는 내내 내가 이런 책을 읽다니 라면서 낄낄댔다. 하니, 선입견이란 때론 나쁜 색안경이라니까. 살다보면 모든 정보를 똑같이 대할 수는 없기에, 걸러내는 것이 필요하긴 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용이지 표지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우스운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도 제목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절대 내가 집어들지 않았을 제목" 이라고만 각인되었었기때문에....뭐, 이젠 리뷰까지 썼으니 기억할 수 있겠지.


이야기는 네델란드 농부인 헬머가 아버지 아비를 위 다락방에 올려 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든이 넘은 아비는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 그간 아들이라기 보단 노예처럼 아버지의 집과 농장을 꾸려왔던 헬머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주장하기로 결정했다. 늙은 아비를 죽기도 전에 골방에 가둔 헬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사람일까? 선함이라고는 단 한톨도 몸에 지니지 않은?  집안을 내 뜻대로 꾸며놓은 뒤 비로서 안정을 되찾은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아비의 쌍동이 아들중 첫째였던 헬머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이 아니다. 천생 농부인 동생 헹크를 대놓고 편애했던 아버지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그를 무시했다. 동생이 농장을 물려 받을 거라는게 모두에게 명백해지자, 그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대학에 다닌다. 고학으로 어렵사리 문학을 전공하던 그에게 어느날 천청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동생이 애인의 차에 탔다가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한순간에 가버린 동생을 그리워 할 새도 없이 동생의 빈자리를 메우는 대타가 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가 헹크의 자리를 대신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하는 사람들, 그에게도 다른 인생 계획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외로움을 느낀다. 서툴고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묵묵히 하다보니 어느새 30여년이 흘렀고, 그는 이제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어한다. 과연 내 인생을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까? 이렇게 인생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하고 흘려 보낼 줄 나는 알고 있었을까? 내 아버지는 왜 나를 농장에 묶어 두었을까? 그것이 아버지로써 잘 하는 짓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내 행복은 상관없이, 내가 일꾼으로 필요했기에 잡아둔 것이었을까? 그의 머리속은 회한으로 가득찼지만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길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묵묵히 농장일만 해온 때문에 아는 사람이라곤 한 손에 꼽는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라든다. 오래전 헹크를 죽게 했던 그의 약혼자 리트에게서 온 것이었다. 오랫동안 망서리다 편지를 하는 것이라면서, 한번 농장을 방문하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 그녀. 편지에서 리트는 자신이 그간 다른 마을 농부와 결혼을 했으며 지금은 과부라고 근황을 전해온다. 결혼생활 내내 헹크를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 리트는 헬머와 아비가 자신의 인생을 망쳐놨다고 원망한다. 그녀는 또 자신의 아들 이름을 헹크라고 지었다면서, 엇나가기만 하는 그를 좀 봐줄 수 없냐고 그에게 청해 오는데...


네델란드 전원을 배경으로, 시골의 아름답고 한적한 전경이 눈 앞에 일렁이는 듯했던 소설이다. 무뚝뚝하고 통제적인 아버지 밑에서 한 평생을 보낸 한 남자가 오십이 넘어 자신의 삶을 되찾아 간다는 줄거리였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나, 쌍둥이 형제간의 애증, 그리고 주변 이웃들과 벌이는 실갱이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었다.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놀랄만큼 완성도가 높다. 어찌나 생생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펼쳐 가던지,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건지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건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아버지가 나이들고 힘이 없어지자 다락방에 올려버리는 아들, 이에 아버지는 자신이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묻는다. 아들의 불행이 안스럽지도,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내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내 인생을 망쳐놓았기 때문이에요.
         난 아버지가 내 인생을 더 망쳐놓는 것이 싫어서 의사도 부르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몰라요, 헹크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했는지. 헹크하고 난 쌍둥이잖아요.
         아버진 쌍둥이 형제가 어떤 건지 알기나 해요?" _246쪽  "----


헬머에게 원망의 골이 깊다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 챈 아비는 용서를 구한다. 그땐 다르게 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변명을 달아서. 물론 그것이 헬머에게 어떤 의미를 주기엔 너무 늦었지만서도, 아비로써는 타당하게 주장할 말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그가 헬머를 덜 사랑한 것도, 죽은 것이 헹크가 아니라 헬머였다면 더 좋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맞지만, 그럼에도 아들의 인생을 일부러 망쳐 놓을 의도는 없었다는 것 말이다. 위로가 되진 않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조금 가라앉히는 진실이 아니었을런지...


결국 헬머는 아버지가 묶어놓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게 될까? 궁금하시면 책을 보심 되겠다. 살아보니, 인생이란 우리 생각대로 되는게 아닌 것 같다. 우린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그렇게 믿다보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란 희망을 잃지 않지만서도, 때론 그런 희망에 배반당하는 것도 인생이다. 이 책은 인생이란 그저 그렇게 서글픈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반항을 하거나 거부를 하기보단 그것도 삶임을 흔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슬픈가? 허무한가?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시는가? 그걸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우신가? 굉장하고 드라마틱한 일들이 벌어져야만 한다고 우리는 강력하게 주장해야 하는 것일까? 누구에게? 절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고 우린 울부짖어야 하는 것일까? 글쎄...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겠지. 이 책의 작가는 아마도 울부짖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녀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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