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8
제임스 웰든 존슨 지음, 천승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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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 too, sing America  

                                                                                                 by Langston Hughes

 

                         I am  the darker brother

                    They send me  to eat  in the kitchen

                    When company comes,

                    But  I laugh,

                    And  eat  well,

                    And  grow  strong

 

                   Tomorrow,

                   I'll be at the table

                   When company comes,

                   Nobody 'll dare

                   Say  to  me

                   "Eat  in the kitchen ."

                   Then.

 

 

                  Besides ,

                  They'll see how beautiful

                  I am .

                  And be ashamed

                  I, too , am America

 

 한 15년전쯤 타임지 표지에 실렸던 랭스턴 휴즈의 시가 생각 나 적어 보았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당시 난 아득한 감동과 함께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인종을 영원히 눌러 죽일 순 없을 거라고... 이 지구상에서 무엇보다 강인한 것이 인간의 생명력이니 말이다. 2010년 현재, 미국은 그 당시론 상상할 수도 없었던 흑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오프라 윈프리가 세계 영향력 1위 인사로 이름이 올라가는걸 보면 과거보다는 흑인 차별이 많이 완화된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인종 차별이 시정되어 갈 수 있었던 역사 뒤에는 바로 차별철폐의 야만성을 폭로하던 작가들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랭스턴 휴즈나 이 책의 저자처럼 말이다. 처음 책을 들었을때는 아무리 차별을 고발하고 있다고는 하나, 1917년에 쓴 글이라고 해서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까 했다. 읽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뒤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지금 시대를 여전히 앞서가는 사고들에 깜짝 놀라 버렸다. 도무지 어디서 이런 탁월하고 선명한 논리를 생각해 내는지 이런 작가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무지와 편견과 비논리와 시대의 미숙한 사고를 뛰어 넘는 그들의 차분한 응대 자세, 평범한 우리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만약 내가 1920년대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이었다면 과연 이런 논리를 생각해낼 수 있을까? 아니, 아마 못했을 것이다. 분노에 펄펄 뛰면서 억울함이나 주장하고 다녔겠지. 물론 분노를 터트리는 것도 때론 도움이 된다. 하지만 분노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고 두려움은 보다 큰 두려움만 양산할 뿐이다. 집안이건 나라건 간에 머리 좋은 어른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 아니겠는가.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 그들의 통찰이야말로 사태를 보다 성숙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밑거름이니 말이다. 

 

남부 백인 귀족과 그의 흑인 하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주인공은 엄마가 죽자 홀로 세상에 남겨진다.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던 계획은 동료가 돈을 훔쳐 가는 바람에 사라져 버리고, 그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담배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잘 돌아가는 머리와 손재주로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모이자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 도박장을 기웃대다 돈을 탕진한 그는 자신의 특기인 피아노 실력으로 재즈바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그의 실력에 반한 백만장자의 요청으로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난 그는 파리의 정취에 흠뻑 취하게 된다. 파리의 한 극장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이복 동생을 보게 된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새삼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흑인들만의 고유한 음악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그는 백만장자에게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백만장자 친구는 백인으로도 살 수 있는데 --그는 피부색이 백인에 가까운 흑인이었다.--굳이 흑인의 정체성을 알려가면 살아야 하겠냐며 그를 말린다. 하지만 이미 그의 결심을 굳어진 상태, 흑인들의 전속 민요들을 채집하려 남부를 돌아 다니면서 그는 흑인 차별의 현실을 목격하고 그것을 정당화 하는 백인들의 논리를 듣게 된다. 우연히 KKK단이 흑인을 산채로 불태우는 광경을 보게 된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야만에 대해 절망하게 되는데...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다음의 문장을 들 것이다 . 주인공이 남부로 향하는 기차 위에서 흑인 차별에 대해 두 백인이 건네는 대화를 엿들은 것인데,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니 차별받아 당연하다는 텍사스인의 주장에 대해 상대가 반박한 논거다.

 



 


 


 


우리는 위대한 인종이죠. 오늘날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종임(앵글로 색슨족을 말함.)에 틀림없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과거 인종들의 더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날의 이 지위를 덜 오만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할 거요. 우리는 그저 게임에서 승자의 순서를 누리고 있을 따름이요. 그리고 그 상태에서 오랫동안 익숙해진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인종적 우월성이란 역사의 시기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155


 


 


 


 게임에서의 승자의 순서를 누리고 있는 중이라...어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태를 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이나 부, 천재적인 머리,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마구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있다. 단순하게 찰나적으로만 판단한다면 그들의 주장이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엔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그들의 지위가 단지 게임에서 승자의 위치에서 온 우연이라는 점과 그 게임의 운이란게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게임의 룰이 바뀌었을때 당신의 위치가 과연 다시 승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 누구도 미래를 점 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강자로 거들먹 거릴 수 있는 현재가 단지 당신이 운이 좋았을 뿐이며, 미래엔 당신의 운명이 약자가 될지도 모른다는걸 깨닫게 된다면, 우린 현재를 보다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외에 흑인의 생명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문장도 만났다. 바로 이것이다.



 


 


 


 그 후로 나는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능력이 미국의 흑인들을 구원하는데 중요한 몫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능력이 미국 흑인이 인디언의 운명을 따르지 않게 하는데 큰 역활을 한 것이었다.--57


 


 


 


 자신의 동족이 단지 피부색이 까맣다는 이유로 산채로 불 태워지는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웃을 수 있는 능력, 즐겁게 살려고 하는 노력들 말이다. 인간이 어떻게 해야 인간적일 수 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이론을 내 놓는데, 내 짧은 생각엔 이렇다. 재밌게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미를 위한 최대의 투라자고. 웃음 없이 사는 사람이야말로 어쩜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흑인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을 보면서 내가 추론해낸 가장 근사한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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