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단 - 카푸시친스키의 아프리카 르포 에세이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 지음, 최성은 옮김 / 크림슨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 쓸데 없는 눈물이나 환상을 만들어 내는 삼류 문인 천명보다 카푸시친스키 한 사람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르포르타주에 예술적 가치를 결합시킨 그의 비범한 재능 덕분에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는 카푸시친스키 본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리샤드르 카푸시친스키의 다른 책인 < 생의 또 다른 하루>의 영문판 서문에 쓰인 살만 루시디의 찬사다. 같은 책도 아니고, 더군다나 의례 쓰여져 있기 마련인 추천사를 굳이 처음에 소개하는 이유는 저 문장이 작가를 이해하는데 이보다 더 없이 정확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삼류 문인 천명보다 가치가 있다는 말이 얼핏 거슬리게 들리시려나는 모르겠는데, 일단 그의 이력을 들여다보고, 그의 책을 읽어보면 생각이 달라지실거다. 책 중간에 조금은 지루한 구석이 있어 추천작으로 넣을까 망설였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즈음 생각이 달라졌다. (조금 지루했단 이유로) 추천작으로 넣기엔 문장이 너무도 탁월하고 훌륭했기 때문이다. 유일무이라고 할 만한 그 만의 목소리, 놀라운 집중력, 아프리카를 다루는 폭 넓은 시야,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추릴 줄 아는 재능, 어디서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허함, 학살을 다룰 땐 분노를 다스려야 함을 아는 본능적인 절제력, 어디에 있건 간에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해 내는 통찰력에 상상력, 따스한 인간애, 현실을 직시하는 냉철한 이성에 유머 감각등... 이렇게 걸출한 작가를 이제서야 소개한 것인지 의아 할 정도였다. 문장들이 너무 좋아 혹 그의 다른 책도 나왔는가 검색해보니, 역시나 이 책이 첫 타자다. 이럴때면 우리나라 출판계가 좁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째서, 이런 훌륭한 책들이 작가가 사망한지 몇 년이 지나서야 나오게 되는 것인지...인간이나 세계에 대한 시야를 트이게 해주는 진솔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가 그리 흔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저자인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는 폴란드 태생의 기자 출신 작가다. 기자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는 20대 시절 아프리카 통신원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아프리카와 인연을 맺게 된다. 폴란드라는 가난한 나라의 통신원, 비록 가난이 그의 발목을 잡을 지라도 최대한 남에게 빌붙는 기지를 적극 활용해 그는 아프리카 전역을 뽈뽈대며 다니기 시작한다. 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아프리카를 말이다. 생각해 보시라. 그 기간에 이보다 더 비참한 대륙이 어디 있었는가 하고. (아, 물론 킬링필드의 아시아도 있긴 했지만.) 이보다 더 비이성적일 수 없다는 가난에 무지에 내전에 학살에 종족 분쟁에 쿠테타에... 사자가 무서워? 마주칠 일이 없으니 걱정 말란다. 오히려 모기야 말로 아프리카 최대 복병이란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경험자의 말이니 맞는 말일게다. 내전때는 최전방에서 취재하다 잡혀 사형 선고를 4번이나 받았으며, 40여회의 체포와 구금까지...그 30여년의 기간동안 저자가 발로 쓴 르뽀를 묶어낸 것이 이 책이다.  도무지 취재하려고 이 생고생을 해야 하나요? 툴툴대며 물어봄 직도 한데, 그는 그보단 아프리카의 저간 사정과 미래에 더 골몰하는 눈치다. 도대체 이 고통의 땅을 어찌해야 하오리까? 그는 묻고, 고민하고 있었다. 왜냐면 아프리카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에 지식인에 유럽인이니, 거들먹 거리면서 거만하게 꼬나 앉아서는 무지몽매하고 거렁뱅이에다 야만인들을 성토한다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을텐데, 그는 편견이나 오만, 오해로 자신의 시야가 흐려지는 것은 거부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듣고, 보고, 겪어내면서 그는 아프리카를 통채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그것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되어 있는 유능한 기자라고 해도 외부인의 시선을 가진 자가 현지인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감상에 젖지 않으며, 속지 않고, 현지인들이 복잡한 사정을 꿰뚫어 본다는 것은 보통의 집중력이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우선 지쳐서도 못하고--과연 우리가 남에게 그렇게 관심이 있던가, 생각해보시면 금세 이해가 되실 것이다.--통찰력이 부족해서도 못한다. 그걸 잘 알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내고, 이런 문장들을 써 내려 갈 수 있을까? 살만 루시디의 말에 태클을 걸 수가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때문이다. 한나 르랄이란 폴란드 작가는 이런 말로 저자를 예찬한다.

 

" 카푸시진스키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가장 행복을 느꼈던 세상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하는 척박한 오지였다. 그런 곳에서 인간은 결코 다른 사람인 척 가장할 수 없으며, 자신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게 된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이 책이 위대한 것은 결코 다른 사람인척을 하지 못했던 한 사내의 본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인간애도 그렇지만, 그가 목격한 모든 것들에 지지 않은 채, 우리가 흑백이라는 인종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길 바라던 지성 역시 감탄스러웠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 정치적인 색깔만을 지녔는가 오해하진 마시길. 아프리카 사정이 사정이던 만큼 정치적인 에세이가 많긴 했지만 "압달라 왈로 마을에서이 하루 "같은 지극히 서정적인 에세이나, 유머감각 넘치는 탁월한 단편 소설 같았던 " 마담 디우프, 집으로 돌아가다." 나 "오시차의 웅덩이" 도 있으니 말이다. 기자출신이라고는 하나, 문장력이 너무 탁월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썼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한다. 어쨌거나 그가 들려주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아프리카란 대륙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의 애정이 전염된 탓이다. 총체적으로 이기적이고 부패중이라는  21세기에도 이런 살아있는 작가들을 배출해 낸 지구에도 새삼 자부심이 느껴진다. 하니 너무 기죽지 말지어다. 인간종도 때론 이런 멋진 인물을 만들어내니 말이다. 

 

 

   
   언젠가 나는 아프리카에 8년째 머물고 있는 나이 많은 영국인과 같은 테마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일반 문화와 달리 유럽인과 유럽 문화의 힘은 상황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 그중에서도 자아비판적인 태도에서 나온다. 분석과 조사, 그리고 끊임없는 탐구와 꾸준한 의심이 그 원동력이다. 유럽인의 정신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회의적인 시각으로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늘 물음표를 던진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처럼 강력한 비판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애쓰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완벽하다고 여기려는 경향이 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무비판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잘못의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다른 세력(음모나 스파이, 다양한 형태로 조재하는 외부의 통치)탓으로 돌린다.그들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비판을 악의적인 공격이나 차별의 징후, 혹은 인종주의의 소산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비판을 자신에 대한 모욕이나 업신여기는 시도로 간주하며, 심지어 사디즘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만약 그들에게 도시가 지저분하다고 이야기하면 ,그는 마치 자신을 욕하기라도 한 듯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자기의 귀와 목, 손톱이 깨끗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은 자기 비판적인 시각 대신 미움와 열등감,시기심과 짜증, 유감으로 가득하다. 이런한 인식은 문화적으로, 사회 구조적으로 계속 영향을 미쳐 스스로 진보적인 개발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결론짓게 만들며, 발전을 갈망하는 내적인 변화를 유발시키는 데 있어 치명적인 걸림돌이 된다.아프리카의 문화가 바로 이런 무비판적이고 다루기 힘든 문화에 속하는가? 사디그 라시드와 같은 아프리카인들은 대륙 간의 경쟁에서 유독 아프리카가 뒤처진 이유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면서 바로 이 점에 대해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350

 


일반적으로 아프리카에 머무는 동안 유럽인들은 그곳의 극히 일부만 보게 된다. 대부분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 별로 흥미롭지 않고 쓸모없는 단면들만을 본다. 모든 대상들 속에는 나름대로 드러나지 않는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듯, 그들이 시선은 수박겉핥기식으로 피상적인 곳에서 겉돌 뿐 정작 그 내부를 꿰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유럽의 문화는 깊숙한 본질로의 침투, 자신과 다른 세상, 다른 문화의 근원을 파고드는 탐구에는 영 익숙치 않다. 역사적으로 볼때 유럽 문화를 포함하여 수많은 문화들을 최초로 접촉하는 단계에서 그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강도나 용병, 범죄자, 투기꾼, 노예 상인등 ,별로 질이 좋지 않은 유형의 사람들이었다.....국경을 초월한 탐욕스러운 약탈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문화교류를 독점하면서 그 기준과 분위기, 색깔을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배우며, 상대방과 소통할 수 있는 공통된 언어를 찾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부분 예의나 품위를 저버린 몽매하고 아둔하고 몰상식한 장사꾼들로, 그중 상당수는 문맹이며,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정복과 약탈, 학살뿐이었다. 이런 시행착오로 인해 각각의 개별적인 문화들은 서로를 좀 더 깊이 알아가면서 가까워지고 소통하는 대신 적대관계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나마 조금 나은 경우가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 정도였다...결국 이異문화 교류는 무지한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고, 인간관계 역시 가장 원시적인 기준, 즉 피부 색깔에 의해 좌우되었다.---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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