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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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쉽게 좀 말해봐.>--자살을 시도한 친구가 이튼학교 출신답게 현학적으로 자살이유를 설명하자 주인공이 하는 말.

 난  살만 루시디가 다신 책을 못 낼 줄 알았다. "졸작도 상관 없는데"라는 기다림마저 지쳐 포기한 지 이미 오래... 그가 "한밤중의 아이들"이나 "악마의 시"를 쓸 당시야 팔팔하고 거칠 것 없었던 혈기 왕성한 때이고, 더군다나 사형선고를 받아 도망자로 한 세월을 보내야 하는 지도 몰랐던 때란 것을 감안하면 그에게 그와 같은 수작이 다시 나오는걸 바란다는건 무리라는 생각도 솔직히 했었다. 그래서 이 책이 나왔단 소리에 일단 무조건 집어 들면서도 반가워는 했을망정 기대는 안 했다. 그가 녹슬었다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가 누군가,살만 루시디 아닌가? 그저 감지덕지,책을 내주셨다는 것만으로도 무진장 반가웠다. 내가 누군가? 자칭 루시디 광팬 아닌가? 그를 위해서라면 눈멀은 심봉사 노릇도 기꺼이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거 왠 횡재? 읽고 보니 다행스럽게도 그는 여전히 건재했다. 이 책속에서도 그는 연륜이 밴 그만의 톡특한 시선, 그 특유의 통찰력과 조롱섞인 유머, 냉소적인 말투, 현실을 직시하는 진실의 눈,신화와 언어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들을 선보이면서 도도하게 시들지 않는 자신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와,안도의 한숨을 쓸어 내렸다.

 
줄거리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이던 솔랑카 교수가 어느날 가출하면서 시작한다.칼을 든 채 자고 있는 아내를 바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가족을 살해범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 누구에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미국으로 튀고 만 것이다. 아내는 가족을 허물 벗듯 그렇게 버릴 수는 없는거라고 난리를 치지만, 그 자신도 속에 있는 분노의 정체가 뭔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그는 아내에게도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만다. 세계의 모든 부가 몰리고 성공의 척도가 되어 버린 미국, 낯설고도 익명의 천국인 미국을 둘러본 그는 그곳의 천박함과 물질 주의 ,황색 언론, 광적인 언론의 새로운 영웅 만들기와 마녀 사냥들을 혐오감을 감추지 못한 채 바라본다. 그러나 그런 미국에도 사람들이 사는 곳 아니던가? 사람들과 엮이고 싶어하지 않아 자페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 앞에 우연히 밀라라는 아가씨가 등장한다. 그가 유명한 인형극을 만든 사람이란 것을 알아 본 그녀는 반색을 하며 달려드는데...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들이 쉴새 없이 등장하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끌어 가고 있는 소설이다.

2차대전때 독일의 유-보트에서 배관을 잘 고친다는 이유로 살아 남았다는 80세의 유대인 할아버지,유명작가었던 아버지와의 근친상간의 잔재가 남아 죽은 아빠의 대용품을 찾아 헤메는 밀라. 한때는 정의감에 불타는 기자로 불의가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나 따라 다녔지만, 어느순간 돈과 명예와 신분 상승의 욕망의 덫에 갇혀 버린 친구 잭, 잭의 애인으로 솔랑카가 첫눈에 반해버릴 정도의 미모를 가진 승리의 여신 닐라,아내를 저버린 솔랑카를 꾸짖으며 그의 아내 엘레나를 위로하다 오히려 자신의 아내를 저버리는 모건,그리고 솔랑카 자신이 그렇게 직시하기 힘들어하던 과거의 이야기가 닐라의 도움으로 마치 마법상자에서 자동으로 튀어 나오는 인형처럼 그렇게 통통 튀나오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을 하게 되는 것은 2000년 현재, 미국과 세계를 분석하는 살만 루시디의 통찰력이었다.지칠 줄 모르는 그만의 지성이  바로 지금 현재를 혀를 내두를 정도의 기민함으로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울 정도의 멋진 해부라서 보는 내내 계속된 고개 끄떡임에 고개가 아플 정도였다. 기괴하지만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작중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그는 현대의 혼란스런 가치관과 극악스러움,인간성의 상실과 인간의 모순성과 위선을 설득력있고 자연스레 보여 주고 있었다.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보는 듯해서 뿌듯할 뿐이다.

 물론 여전히 냉소적이고 빙퉁맞긴 하다. 그리고 쉬워지긴 했다.약간 통속적이여 보일 정도다.하지만 이 작가가 살만 루시디라는 것을 잊진 말기 바란다.그의 상상력과 지성과 지식들이 그대로 그의 머리속에서 살아 있는 한 그의 책은 다른 작가의 책들과는 차별되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말이다.예전처럼 우리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우릴 조롱하고 가르치고 있었다.그의 조롱이 새들의 즐거운 지저귐처럼 마냥 감미로웠으니.폭발하는 듯한 분노로 사람들을 밀어 내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고민하는 사람이나, TV에서 보여 주는 사회상에 불만이 가득하신 분들,그리고 현재의 절망감에 절어서 헤어나지 못하시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흔히 보기 힘든 통찰력을 놓치지 마시라는 말을 덧붙이면서.물론 그것을 해석해 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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