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칼로레아 세계사 - 깊이 있는 질문은 시대를 관통한다
임라원 지음 / 날리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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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아마추어로서 '역사'에 꽤나 남다른? 공부를 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다르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한민국의)역사의 갈등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전 학교 등에서 당연하게 학습했던 '결과 (또는 정답)을 암기 해야만 했던 방법이' 바로 위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나름의 경각심이 들며, 결국 '나' 또한 그러한 틀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특히 어느 '인물과 대한 비평' 과 '어느 역사의 인식에 대한 갈등' 등이 일어날때, 많은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결과에 집착하여 과정을 소홀하게 다루는데 있다. 실제로 서로의 역사관과 주장에 따라, 과정(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흐름)은 그 어느 부분에 따라 선택되어지고 또 외면당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과거의 사실을 증명하고 기록하며, 이에 미래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중심점이 되어야 할 역사의 진실이 도리어 '진실'이라는 단어 속에서 서로가 바라는 해답을 위해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이에 '나'는 적어도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역사 교육과 인식등에서 필요한 제일의 요건 중, 우선 인문학적 사고와 철학을 통한 논리로 보다 '해답에 다가서는 교육'이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바칼로레아'는 이전부터 선진교육의 표본이 되어 주었다. 물론 어느 사람들은 그저 프랑스 고등교육 시스템으로서, 또는 학생들의 자유과 권한이 집중된 교육법 등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 책에 비추어진 바칼로니아의 가치관 아래 표현된 역사의 면면을 살펴보게되면, 의외로 결과보다는 원인과 과정에 더 집중하는 교육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중세의 등장과 장원제도의 발달' 을 설명할때, 단순히 "중세시대에 이르러 장원제도가 발달하였다" 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우선 저자는 고대 로마의 몰락을 초래한 대농장을 통해 '어째서 고대 로마에 소작농이 적어지고 귀족 중심의 대농장이 성행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표현한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확장(정복) 정책을 통한 토지의 증가에 비해 도리어 자영농의 증가가 아닌 대농장의 증가로 이어지며, 그 내면의 상호관계 역시 수직적으로 변화하여 이후 로마제국의 몰락을 통해 (비교적)작은 규모의 자급자족인 구조와 함께 땅을 지닌 자에게 예속되거나 충성해야 하는 이른바 봉건제가 굳어지는 현상이 일어난 것을 주목하기도 한다.

우리가 답하고자 했던 질문은 이렇습니다. '고대 유럽이 중세 유럽인의 생활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질문을 통해 의미 있게 살펴보고자 했던 핵심은 바로 인간의 생존 전략입니다. (...)

33쪽

이처럼 바칼로니아의 가치관은 어느 결과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왜 당시의 시대는 여느 사회현상을 용인했을까? 하는 수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특히 오늘날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평등, 그리고 건전하고 공정하며, 또한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 대한 지향성은 물론 과거에 비추어 존재한 야만과 암흑, 또는 독재의 시대에 대한 저항에서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당연하게도 과거 로마제국이 맞이한 변화 또한 대농장의 확산, 그 주인인 귀족계층의 부가 확산되고 누적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한 점, 그리고 약자로 몰락한 소작농이 스스로 생존을 위해 권력자에게 굴종하고 부역하는 것을 국가 차원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이 결국 미래의 중세의 가치관과 중세인의 생활을 만든 큰 원인이 된 것이라 정의한다면, 결국 위에서 언급한 미래지향적으로 지켜가야 할 어느 가치를 '역사에 비추어' 발견하기 위한 제일의 조건은 치밀한 해석보다는 스스로 대상을 이해하고 의문을 가지며 (스스로 합리적인)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전략적 회로'를 내면에 만들어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 교육의 가치는 주입받는 것보다 생각하고 더욱이 새로운 창의를 도출하게 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마땅하다.

결국 스스로 내면에 만들어낸 비판적 사고는 단순히 대상의 주장이나 해석을 무조건으로 수용하는 오류에서... 아니 함정에서 '나'를 보호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과거와 다르게 세계 이모저모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폭발하고 또 전쟁으로도 이어지는 와중에서, 어쩌면 많은 이들이 행한 가장 큰 잘못 중의 하나는 빈약한 정보와 (스스로의) 확신을 통해서 대상의 선과 악을 구분짓고 또 저마다의 역사관과 정의를 앞세워 너와 나를 구분지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세상의 흐름을 파악할 때는 결론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결론이 어떻게 도출됐는지 그리고 그 결론이 도출될 수 밖에 없던 전제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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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야식
하라다 히카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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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이전, 나는 소개글에 등장한 도서관 음식이라는 단어에 큰 흥미를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열린 독서실이나 다름없던 오프라인의 장소가 오늘날 점차 문화공간과 까페 등 여러 다른 영역과 융합되며, 흡사 현대인들의 새로운 쉼터가 되기 위한 변화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 역시 과거의 기억이 아닌 오늘날의 새로운 문화 등을 표현한 소설로서 큰 기대가 되었다. 특히 '음식을 맛갈나게 묘사하기로 일가견이 있다' 라는 주장에 걸맞게 분명 소설이 풀어가는 문장들은 오늘날 음식의 시각적 미디어... 즉 '먹방'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매력을 품어줄 것을 은근히 기대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에게 있어선 책의 주제와 함께 문장의 여러 부분에 있어서, 위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하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소설 속에는 여느 독서실과는 다른 독특한 환경이 형성된 '이야기의 무대'와 함께 오롯이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던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보다 잔잔하지만 일상적이지는 않은 톡득한 서점원(또는 사서)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야말로 독서실 특유의 독특한 컬렉션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오너는 꽤나 깐깐하고도 기묘한 조건을 달아 직원을 구하고 또 손님(돈을 받기에) 가려 받는다. 이는 다르게 생각하면 비록 도서실이기는 하지만, 오너 개인의 사업장으로서, 그는 상업적 번창보다는 그 장소에 보관되어진 장서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설 속의 독서실은 이미 생을 마감한 수 많은 작가들의 유산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물론 이는 해당 작가 스스로가 남긴 '문학 작품'을 포함하여, 생전 작가 스스로가 소장했던 다른 다양한 서적 또한 포함되는 것이기에, 의외로 '여느 작가의 진실된 내면을 접할 수 있는 장소로서' 해당 독서실은 꽤나 색다른 매력을 품은 장소이기도 하다.

때문에 주인공을 포함한 '직원 일동'은 어느덧 단순한 '책의 존재' 의외에 그 밖에 이 장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고인의 여러 가치를 노리고 방문하는 다양한 괴짜?들을 만나게 된다. 이에 나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았던 손님은 소설의 첫번째 이야기... 즉 끝까지 작가이자 라이벌이였던 상대의 진심을 이 독서실의 '유산'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을때, 이에 내심 들키고 싶지 않았던 스스로의 옹졸함에 대한 부끄러움과 반대로 상대 역시 오롯이 자신의 작품을 진지하게 마주해주었다는 순수한 기쁨이 함께 밀어닥쳤을때, 이에 이미 문학의 거장으로서 높은 명성을 얻은 괴팍한 노인이 어느 순간 환의에 주체 못하는 사람으로 변모하고 말았다는 것은 어쩌면 그 조건이 되어 주었던 문학의 세계에서 적어도 그 둘의 감정은 꽤나 진지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각설하고 이처럼 직장의 일과 다르게 '사람의 감정'에 의해 표출된 다양한 사건과 경험을 겪는 사람으로서, 그의 심신을 다독여주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그야말로 심야에 일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위안이 바로 '야식'이라면, 적어도 주인공의 독서실은 그 나름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낸 '(도서) 작품에 표현된 다양한 음식들을 직접 음미함으로서 문장과 현실의 벽이 허물어진 증거인 '맛'을 한껏 즐기는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나는 "빨간 머리 앤'을 자세히는 모르고 소설 자체도 잘 모르지만, 그 장면이 그 소설에서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솔직하게 맛을 표현한 장면... 특히 식사의 기쁨을 표현한 장면이 아닌가 싶었지.

177쪽

빨간머리 앤이 먹었던 오이 샌드위치, 등 일본 문학 뿐만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작품 속의 음식이 재현되는 작은 독서실의 존재... 비록 주인공의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때의 주인공은 좋은 사람들과 진귀한 책들, 그리고 풍부한 맛의 경험을 안겨줄 이 장소에서의 '일'을 보다 오래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는다.


여기가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영원하지 않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라고 오토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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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일주 인문기행 - 이제는 시칠리아다! 역사, 문화, 예술, 신화를 아우르는 멀티플 여행
한상원 지음 / 슬기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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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지중해의 시칠리아는 그 위치와 풍요로움으로 인하여 주변 강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가 이집트를 속주로 삼기 이전까지 시칠리아는 한때 카르타고와 로마라는 강국 사이에 시달려왔으나, 이후 속주이자 '로마의 곡창'으로서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 속에서의 시칠리아는 언제나 여느 제국의 통치 아래 세력권에 편입되어야 했고, 심지어 근대의 열강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동안에도 그 스스로의 자주를 희생한 번영... 즉 힘에 의한 굴종으로 얻어낸 평화를 바탕으로 여러 문화 등을 흡수해왔다.

물론 이러한 침탈의 역사가 비교적 과거 한반도의 역사와 비교해 나름 '고된 저항과 자주적 열망'등을 공유하는 접점을 발견할 수 있기에, 지금껏 많은 인문학자들이 고대 지중해 문명의 총본산인 로마(이탈리아) 보다 시칠리아 행을 택했다. 실제로 나 역시도 시칠리아의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을 관찰하고자 하는 주제로 여느 서적 등을 접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책 역시 이전의 기억과 함께 나름의 잣대롤 가지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서적은 스스로가 기행문이라고 칭한 것 만큼 저자 개인의 체험 의외의 기록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인문학적 가치를 직업으로 학문적 탐구를 지속하는 사람의 글과,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는 인문학적 척도를 근거로 대상을 관찰하여 써내려 간 글은 비록 그 주제는 같을지 모르나, 내용의 성격은 크게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가 시칠리아를 방문하여 수많은 장소를 돌아다닌 것은 비교적 그 장소의 오늘과 내일을 가늠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생각이 된다. 비교적 다양한 문명의 지배를 당해왔기에, 그에 따른 유적이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섬, 그리고 세계2차대전이후 시칠리아의 역사와 문화적 독창성을 인정받았지만, 정작 정치.사법의 혼란을 말미암아 조직된 마피아에 의해서 도리어 과거의 지배와 다른 형태의 또 다른 (보다 직접적인 폭력의) 지배를 받아온 과거를 뒤로하고, 아직 가난하지만 아름다움을 간직한 지중해의 시칠리아는 지금도 그 아픔의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한 걸음 더 내일의 충실함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

이처럼 활발한 무역항?인 시칠리아는 지금껏 위대한? 문명의 영향력 아래 다양한 문화를 축적해왔다. 때문에 문득 생각해보면 위에 언급한 '시칠리아만의 독창적인 문화와 그 증거는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때가 있다. 이때 아쉽게도 이 책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의 발걸음에 도달한 다양한 장소에서 과거 시칠리아를 위해 헌신한 사람, 또는 시칠리아를 무대로 문화적 메시지를 남긴 사람들의 여러 면면을 살펴보게 된다면, 그 나름대로 그 문화의 사람들의 가치관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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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부자 멘토와 꼬마 제자
조지 S. 클레이슨 지음 / 퍼스트펭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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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부자의 돈 버는 지혜'

2002년 학생시절 처음 위의 제목을 가진 책을 접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을 통해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금전적 가치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던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저 저자 스스로가 책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 고대 바빌론을 무대로 활용했을 뿐 오롯이 인류 최초?의 지혜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시 양장본이였던 책의 면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이 책을 읽었다. 물론 그 이유에는 책의 내용이 유익했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으나, 그저 개인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설정과 등장인물 등이 (의외로) 나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각설하고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문명사회가 출연한 이후, 점차 세상에는 가난한자와 부자가 생겨나게 되면서, 결국 사회의 이면에는 부의 가치를 깨닫고 또 이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책 속에서 바빌론 최고의 부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줌으로서, 이른바 부를 축척하는 방법을 설명하게 되는데... 이에 책을 접하는 현대의 독자들을 비롯하여, 작품 속의 청객들에 이르기까지. 부자가 감히 "황금보다 귀중한 지혜"라 자부하는 이것들을 마주하게 되면,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도 지혜인가?' 라며 의구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갑에 동화 열 개를 넣어놓고, 아홉 개만 꺼내 쓰는 겁니다.

94쪽

그도 그럴것이 돈을 모으려면 저축을 해라, 검소하게 생활하라... 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바빌론)지혜의 본질은 이미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때문에 세상에는 유망주에 투자하거나, 보다 효율적인 절세법과 같은 현실의 지식에 기댄 방법론이 대세를 이루고, 위의 바빌론의 가치는 마치 이상론에 불과하다며 평가 절하 할 수도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저자는 이 바빌론의 부자의 입을 빌려 '실천한 한다면 이것으로도 충분히 부를 축척할 수 있다'고 독자들을 설득한다.

젊은 친구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말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하지만 명심해야 해. 오늘 빛나고 있는 저 태양은 너의 아버지가 태어날 때도 빛났고, 너의 손자가 세상을 떠날 때도 여전히 빛날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62쪽

물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 덕을 보았는지 1926년 저자가 처음 이 책을 지은 이후로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책은 세상에 등장하며 바빌론의 지혜를 전한다. 실제로 나의 기억에도 몇 권의 책들이 절판되고 또 다시 출판되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수 많은 책들이 새로 지어져도, 바빌론의 부자 '아카트'의 말이 예나 지금이나 변화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지혜... 그럼에도 고루하거나 이미 사장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오늘날에도 당당히 실천 할 것을 권장하는 그 지혜란 과연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이에 비교적 오래도록 책 속의 가치를 따르는 나의 경험에 따르자면, 나는 이 지혜의 가치를 '거북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오랜 동화의 토끼와 거북이처럼... 분명 이 지혜는 이 세상 누군가는 성취했다는 '대박'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만들어낸 부를 성장시키고, 어리석은 선택으로 부를 상실하는 것을 막아주었다는 것에서 나는 지금도 책의 가치는 충분히 빛을 발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황금빛 도시를 눈앞에 두고 있네, 내일 자네들은 지금까지 일한 대가를 받게 될거야. 이 돈을 어떻게 썼는지 10년 후에 말해 주겠나? (...) 현명한 행동은 우리의 삶을 즐겁고 풍요롭게 한다네, (...) 우리를 따라다니는 고통의 맨 앞에는 우리가 해야 했던 일과 우리가 잡지 못한 기회에 대한 기억이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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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헴 폴리스 2049 순정만화 X SF 소설 시리즈 1
박애진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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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를 무대로 그려낸 작품세계.

즉 SF라 불리우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 각각의 이야기들이 드러내는 미래기술과 무한한? 긍정적 가능성 등에 대한 로망을 느끼게 된다. 이에 대표적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려보게 되면, 그 영상 이모저모에 드러난 첨단 문명의 이기가 실제 21세기 오늘날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미 익숙하거나 또는 공감할 수 있는 가치관을 공유하게 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또는 '미래의 비전을 영상화 한' 영화로서 가장 모험적인 SF의 가치를 드러낸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위의 가치관으로 생각해보았을때, 과거 한국형SF를 재해석한 이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흔히 '미래에 대한 로망' 보다는 반대로 미래를 현실로 이끌고 내려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하늘을 나는 에어카가 등장하고 자동화 된 편의시스템이 인간의 삶 여러곳에 침투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작 (소설의)이야기가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최첨단의 기계문명이 들어서 있음에도 변치 않는 낙후된 장소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이후 먼 미래의 정부와 정치 또한 이러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며, 저마다의 이익과 성취감을 위해 반대로 약한 존재를 이용하는점 등 분명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변화를 요구하는 (대한민국의) 정치 문화의 그림자를 더욱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가 비추어진다.

기본적인 집기와 도구만 줘도 여기에 집을 일구고, 가게를 열어 상권을 만들며 살아갈 수 있지, (...) 하다못해 짓다 만 하수구 공사를 끝내주기만 해도 사망률을 낮출 수 있네, (...) 하지만 꼼짝을 하지 않지. 그들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양 숨죽이고 살길, 안락하고 편안한 자기들의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

33쪽

특히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낙후된 도시 '라비헴'에서 근무하는 경관이기에, 더더욱 권력자와 시민 사이의 경계에서, 도시의 문제점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진행되는 여러 사건들을 마주하는 경관으로서, 이들은 정작 문제의 예방은 커녕 이미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도 곧 여러 한계를 맞이한다. 질병, 범죄, 마약, 그리고 차마 나열하기 힘든 인권유린형 범죄에 이르기까지... 이에 마치 슬럼가처럼 인간의 삶과 환경이 쇠퇴한 곳에서, 현실적으로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된 이들이 바로 경찰관으로서 일하는 그들이다.

현실을 겪으며 생겨나는 무력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위의 무력감과는 다르게 무대 '라마스 지구에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진다. 그야말로 약자로서 스스로의 환경과 대우에 분노를 표하고 변화와 지원을 요구하는 라마스의 대중들, 그러나 반대로 위험하고 더러운 라마스를 해체하여 국제적 규모에 걸맞는 공연장을 짓는 것이 결국 라비햄과 해당 시민들에게 더욱 큰 복지와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시장과 권력자들, 그리고 오랜 역사의 흐름에서볼 수 있듯이 이러한 양극간의 이해관계와 다툼 와중에서, 결국 일어나는 일은 진행되는 음모와, 누군가의 희생... 그리고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감추어지는 무수한 진실과 실종된 정의이다.

때문에 '나' 는 이 소설의 주제를 통하여, 때때로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나 '장소'가 만들어질때, 그리고 그 인식이 해소되기까지의 긴 시간 동안 인간이 얼마만큼 잔인하고 또 무감각해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다시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겼다. 분명 쇠락한 라마스 지구는 질병과 범죄의 온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공권력이 더 나은 해결책을 모색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 이유에는 오롯이 라마스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빈민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인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배급되는 식권을 훔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게 된 원인은 단순히 그 사람들의 윤리의식이 일반인과 다르게 때문일까?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라비헴 시민들에게는 공연을 즐길 권리가 있습니다. 라비헴의 관광수익까지 늘려주니 일석이조입니다. (...) 자기 삶을 스스로 망친 자들이 왜 우리에게 생존권을 요구합니까? 왜 우리가 피해를 보아야 합니까? (...)

105쪽

이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시청은 이러한 환경의 개선을 위해서 최선의 행정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저 단순히 소수의 권력자나 선한 사람들의 자비에 기댄 후원금을 모집하거나, 하루하루 연명할 빵을 배급하는 것이 아닌! 그리고 결국 골칫덩이를 덜어내기 위해 '무법'과 '폭력' '나태'의 단어를 달아 그들을 강제로 내버리는 것이 아닌! 더욱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분노한 시민들을 경찰의 방패벽으로 몰아 사망하한 그 불운한 사고가 일어나기 이전에... 적어도 시를 대표하는 권력자이자 행정기관으로서 상식적인 행동은 그들을 품고 다시 시의 일원으로서 일어서기까지 기꺼이 어깨를 빌려주는 존재가 되어주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미친다.

적어도 서로 편을 갈라 끝없는 갈등을 이어가는 오늘날의 모습이 미래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죽음이전시되는 순간이였다.

(...)

화재 현장 영상을 바베큐, 생선구이와 교차 편집한 영상이였다. (...)

댓글은 더 가관이였다. (...)

하이하가 호흡을 골랐다. 라마스 사람들에 대해 갖은 비하와 조롱이 오가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으나 화재 현장을, 고인과 부상자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건 충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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