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학생들이 누구나 읽었던 『통감』은 『자치통감』을 간추린 『통감절요』였다. 중국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잊혀진 책을 조선시대 내내 무슨 대단한 경전처럼 떠받들었다. 거질을 간추리다보니, 이 책은 곳곳에서 앞뒤 맥락도 없고 이야기가 뚝뚝 끊어졌다. 그래도 온 나라가 홀린 듯이 이 책만 읽었다. 아이들은 이 책 읽다가 질려서 그만 공부에 정을 뗐다. 개중에 열심히 읽어 문리가 제법 나면 『통감절요』 덕분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을 다른 경전에 나눠 고르게 썼다면 그 보람과 효과가 얼마나 컸을지는 아무도 생각지 않는다.


<다산어록청상> 129쪽, 정민, 푸르메

  우리나라에서는 천하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추앙하는 학문이, 정작 세상에서는, 심지어는 그 학문이 시작된 곳에서조차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는 하찮은 것인 경우가 왕왕 있다. 혹은 세상 모두가 높게 쳐 주는 사람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여기까지는 그저 역설적인 상황으로 여기면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자신이 따르는 학문만이 가장 높다고 여겨 실상의 초라함을 가리고 자신을 스스로 높이 떠받들어 주위를 윽박지르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혹은 자신이 남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은 곧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것이라 으스대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이는 천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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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물부족 시에 굶주림으로 인한 소요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소요는 다시 공포를 불러일으키거나 강화시켰다. 민중들은 자연재해가 그들이 겪는 빈곤의 유일한 원인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왜 풍요로운 시기에 곡물을 예비용으로 비축해두지 않았다는 말인가? 부자들 - 지주들과 차지농들 - 이 상인들과 담합하고 또 유력자들에게 항상 우호적이었던 대신들과 국왕 관리들의 공모 하에 잉여곡물을 유리한 가격으로 팔기 위해서 외국에 수출했던 것이 아닌가? 밀의 경작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빵 가격이 비싸야 하며 또 그 결과 곡물부족 사태로부터 벗어날 것이며 모두에게 사정이 좋아질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을 때 민중들은 코웃음을 쳤다. 일반의 이익이 희생을 요구한다면 왜 가난한 사람들만 그 부담을 져야 하는가? 빈민들의 빈곤을 심화시키는 그러한 정책은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증대시킬 따름이다. 따라서 진보는 가난한 자들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18세기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그렇다고 말했다(오늘날에도 공언하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결코 그렇게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1789년에 그들은 자신들과 아이들이 굶어죽을 수는 없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만약 정부가 빵 가격의 인상을 방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면 정부는 임금도 마땅히 올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자들로 하여금 빈민들을 먹여 살리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가난한 자들은 들고일어나서 복수를 할 것이었다.


<1789년의 대공포> 51쪽, 조르주 르페브르, 까치

  계층이 가지고 있는 시각의 차이는 상당히 다른 경우가 많다. 아니, 그 시각의 차이 때문에 계층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위 '높으신 분들의 말씀'이라고 하는 관용구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이유는 이 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합리적인 시각에서 현상을 바라봤을 때, 현상이 내포한 문제점을 바로 찾아내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현상의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 해결책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소리인 경우가 많다. 좋게 받아들인다 해도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고 여겨지거나, 나쁜 경우 '자신들을 죽이고 끼리끼리만 살려고 하는 수작'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괴리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것일까? 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어느 한 쪽, 혹은 양쪽 모두의 분노로 커다란 충돌을 겪는 것 밖에는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대화로는 갈등을 해소할 수 없는 것인가?
  세계화의 요소 중 하나인 자유무역에 대해서, '스톨퍼-사무엘슨 정리(Stolper-Samuelson Theorem)'라는 것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 정리는 자유무역이 사회후생의 증대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결국 누군가의 후생, 간단히 말해서 이익이 줄어들게 되는데, 그렇다면 누가 그러한 손해를 보게 되는가? 그리고 그 손해를 어떻게 납득시키고 갈등을 해소해야 하는가? 위 글과 함께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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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팃포탯 프로그램은 컴퓨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다양한 전략들을 상대로 상호작용을 잘했기 때문이다. 평균으로 보았을 때, 팃포탯은 대회에 참가한 다른 어떤 프로그램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팃포탯은 참가 프로그램들과 대전을 하면서 단 한 차례도 상대방보다 좋은 점수를 얻은 적이 없다! 사실 그럴 수가 없다. 상대방이 먼저 배반하게 하고, 상대보다 더 많이 배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팃포탯의 점수는 매 수에서 상대방과 같거나 상대방보다 약간 적을 수밖에 없다. 팃포탯이 우승을 한 것은 상대방을 무찔러서가 아니라 함께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행동을 상대방으로부터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팃포탯 전략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함께 높은 점수를 얻도록 상대를 유도함으로써 다른 어떤 전략보다 높은 총점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비제로섬의 원리가 작동하는 이 세상에서 전체적으로 좋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매 게임마다 상대방보다 잘해야 할 필요는 없다. 매우 다양한 사람들과 수많은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더욱 더 그렇다. 내가 주의해서 잘하는 한, 각 상대들이 나와 같거나 조금 높은 점수를 얻도록 내버려두어도 좋다. 상대방이 거둔 성공을 질투해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랜 기간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는 상대방의 성공이 사실상 내가 성공을 거두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협력의 진화> 138~139쪽, 로버트 액설로드, 시스테마

  팃포탯 전략은 간단하다. 우선 처음엔 상대방과 협력하라. 그리고 그때 상대방이 보여준 태도를 다음번에 그대로 상대에게 되돌려주어라. 만약 상대방이 협력의 손길을 내밀면 나 역시 다음번에 협력을 한다. 상대방이 배반의 비수를 들이밀면, 나 역시 다음번엔 배반으로 보복한다.
  이 간단한 전략은 '죄수의 딜레마'를 계속 반복해서 실행하는 게임에서 다른 전략들을 제치고 승리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나만 선을 행하지 말고, 타인과 함께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략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악조차 선으로 되갚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악은 그만큼 징계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 유심히 관찰해 보면, 좋은 공동체에서는 함께 공동체의 선을 행하길 권장하는 구조와, 악이 행해졌을 때 그것을 징벌하는 구조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팃포탯 전략에서 진정 중요한 부분은, 타인이 자신의 악을 뉘우치고 다시 협력을 요청할 때, 과거의 악을 용서하고 협력을 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과거사 청산'이라고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팃포탯 전략의 논리로 아주 간단하게 말해 보자. 상대방이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고 함께 나아가는 길을 택하면 된다. 이는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승리를 주는 길이다. 그러나 현재 '과거사 청산'을 외치는 전직 가해자들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있기 때문에 옛 일은 잊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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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적어도 이런 종류의 일반상식 문제에서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을 게 없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문제풀이 능력은 비슷했다. 그러나 집단에 속하면서 참가자들의 믿음은 부풀려졌다. 정답률은 좋아지지 않고 대신 자신감만 높아진 것이다! 더욱이 둘 다 자신감이 낮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의 자신감이 가장 많이 증가했다. 이 집단의 정답률은 그대로였는데도 서로를 북돋아 11퍼센트 향상된 자신감을 나타냈다. 이 실험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야기한 그루지야 정부의 대담한 결정이 어느 한 개인의 자만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 각자는 자신감이 낮았을지도 모르고 아마 혼자였다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집단을 이루면서 이들은 실제로 위험하고 불확실한 조치가 성공하리라고 믿을 정도로 자신감이 팽창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156쪽,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 김영사

  <머피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위원회라는 것이 얼마나 무능한 것인가에 대한 농담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우리는 혼자서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고, 집단의 '합리적'인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그러나 집단의 논의는, 때로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상황을 악화시키고 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결론을 공유하도록 결론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황우석 교수에 대한 PD수첩의 방송을 놓고 벌어진 지지자들(어쩌면 대다수의 국민들)의 비난 같은 경우를 예시로 들 수 있겠다.
  내가 속한 집단이 언제나 옳기를 바라는가?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집단의 이야기가 어떻게 사실을 왜곡하고 호도하는지를 계속 보아오고 있다. 이는 좌와 우, 무식과 유식, 국내와 국외, 나와 너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과오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정의라고 믿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의이기 때문에 언제나 옳다고 믿으면 안 된다.
  집단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은 무척 아프지만, 그 지적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 명의 입은 호랑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호랑이는 대체 말 너머 어디에 실재하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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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미국의 이민자 노동 제도는 노예 제도가 인기를 끌지 못하는 듯 보이는 이유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노예 제도는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성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알아보기 힘들게 변형된 형태로 이뤄진 것이다. 불법 이주 노동자들은 연한 계약 노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일터에서 자신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불법 이민자들은 다른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고용주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다. 합법적인 이주 노동자라고 해도 그중 일부는 대체 일자리 모색을 금지하는 비자 요건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현재 일자리에 구속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답은, 평균적으로 노동자들이 너무 저렴해서 굳이 노예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부 근로자들, 예를 들어 은행가 또는 벌이가 좋은 기술을 갖춘 여타의 전문가들은 높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연방 최저 임금은 30년 전보다 낮아졌다. 게다가 국제화 떄문에 제조업자들은 값싼 노동력을 풍부하게 제공받게 되었다. 2010년 3월, 베트남 정부는 월 최저 임금을 73만동(40달러에 못 미치는 액수)으로 올렸다. 노예들도 이보다는 싸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의 가격> 178~179쪽, 에두아르도 포터, 김영사

  노예가 없어진 이유는 인권에 대한 의식 각성 때문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 뿐만은 아닐 것이다. 보이는 노예에서 보이지 않는 노예로의, 혹은 노예에서 노예보다 더 싼 노동자로의 전환 역시 그 원인이라는 주장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잣대는 상당히 냉혹해 보이지만(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지만), 세상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세상에 한 가지 단순한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하나의 시점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세상에 대한 해석 속에 오류가 생길 가능성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항상 자신의 앎과 배움을 되돌아보고 점검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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