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 참가신청합니다. 역사 속의 한반도와 주변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새롭게 조망하는 계기가 된 책이었습니다. 강연회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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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라트 슈나이더가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들리는 외침소리에 일이 중단되었다. 콘라트 슈나이더는 잠시 책상에 가만히 앉아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단지의 엄한 규율이 흐트러졌을까 생각해보았다. 잠시 후 콘라트 슈나이더는 창문 쪽으로 걸어갔고, 밖을 내다본 순간 평생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중략)
  모래 가장자리를 따라 난 좁은 길에 이르렀을 떄 라인홀트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라인홀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땅에서 바다, 다시 바다에서 땅을 둘러보았다. 라인홀트는 잠시 후에야 하늘을 볼 생각을 했다.
  순간 라인홀트 호프만은 알았다. 콘라트 슈나이더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경쟁에서 뒤졌다는 사실을. 더구나 라인홀트는 그 뒤쳐짐이 두려워하던 것과는 달리 몇 주나 몇 달 차이가 아니라, 수천 년 차이로 뒤졌다는 것을 알았다.
 


<유년기의 끝> 14~15쪽, 아서 C. 클라크, 정영목 옮김, 시공사
 

  이 소설의 도입부를 보면서 느끼는 아득한 감정은,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으로 몰입하게 하는 훌륭한 장치이다. 우리가 미지의 존재를 처음 맞닥트리는 순간의 감정이 아마도 정말 이러하리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류와 만난 것은 불과 수백년도 채 되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으로 비로소 지구에 사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 머리 속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케냐, 라싸, 툼북투, 부에노스 아이레스, 태원, 오사카, 이스트본의 사람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렇게까지 먼, 혹은 그야말로 미지의 존재는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조차도 때로 무척 낯설다는 감정을 느끼곤 한다. 그때 느끼는 미시감(未視感) 때문에 공포와 경악을 느끼는 때도 있다. 심지어는 내가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고백 또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을 모두 받아들일 만큼 열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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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책이 없느냐? 몸에 재주가 없느냐? 눈과 귀가 총명하지 못하더냐? 무슨 까닭에 자포자기하려 드는 게냐? 폐족이라 그런 것이냐? 폐족은 다만 과거와 벼슬길에 꺼림이 있을 뿐이다. 폐족이 성인이 되거나 문장가가 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폐족이 통재달식通才達識의 선비가 되는 데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다. 거리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유리한 점이 있다. 과거에 얽매임이 없기 때문이다. 빈고하고 곤궁한 괴로움이 또 그 심지를 단련시켜 지식과 생각을 툭 틔워주고, 인정물태人情物態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두 아들에게 부침[寄兩兒]', 정약용, <다산어록청상> 182쪽에서 재인용

  곤궁함을 핑계로 모든 일을 놓으면 안된다. 혹은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의 이유를 '곤궁하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내세워서도 안된다. 이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불행 자랑' 중에서도 가장 낮은 행동이다.
  주역의 산지박(山地剝) 괘는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이 덩그러니 남은 가장 곤궁한 상황을 보여준다. 이 암담함은 과연 어떻게 풀릴 것인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음 괘는 지뢰복(地雷復)이다. 그 암담함 뒤에 남은 것은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나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회복의 의미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 속에 담긴 큰 뜻이 이러하지 않을까?
  결국 그렇게 본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내 모습은 하늘과 땅이 나를 핍박하기 원해서였겠는가? 아니면 내가 내 모습을 그렇게 이끌어놓은 것인가? 지금까지의 내 게으름을 이 글에 비추어 통렬히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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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경은 부산포 사람이다. 그는 성정이 거칠지 않고 선을 찾고 행하려 애쓰기를 즐겨하였으나,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며 굼뜸이 있었다.
  하루는 무경이 문득 탄식하여 말했다.
  "공자가 말한 이립은 자신이 바로 서는 때를 말함인데, 그것이 나이 서른이다. 아! 이제 내 나이 스물 아홉이 되었는데, 돌아보니 이립은 커녕 궁색하면서도 좀스럽게 하루하루 연명해 나갈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 심하도다, 나의 비루함이! 어찌 이런 모습을 산 사람의 행색이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을 것인가! 궁하도다, 나의 무능함이!"
  그러다 문득 어떤 이의 글을 읽고 무릎을 치며 다시 말했다.
  "여기에 내 살 길이 들어 있구나! 해가 떠서 질 때까지 글을 정성을 다해 읽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읽었던 글의 내용을 깊이 생각하여, 그 중 가장 긴요한 부분을 따로 기록하고 나의 생각을 정리한다. 이를 백 일만 한다면 잘 되면 세상에 내놓을 경륜이 깃들 것이고, 못 되어도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축이 곧게 설 것이다! 이것이 내 살 방법이로구나!"
  그리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발을 휘휘 저으며 춤을 추었다. 내가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다 배를 잡고 웃었는데, 곧 정신을 차리고 우스운 행색을 여기에 기록했다.
  아! 대저 아무런 흠이 없는 호박이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나, 그 안에 모기나 매미 같은 흠을 품은 호박을 더 높은 가치로 매기고 찬탄하니, 여기에 무경이 깨달은 바가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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