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에 대한 이 치열한 믿음은, 이미 배우고 익히면서(學而時習) 터져나오는 기쁨(說)에 몸을 떨 때부터 싹텄다. 그리고 멀리서 나를 알아주는 벗이 내 손을 잡았을 때(有朋自遠方來) 피어난 즐거움(樂)의 꽃송이에서 그 신념은 더욱 돈독해진다. 허나 길을 가는 것이 내 안에서 충일하는 기쁨을 위해서이거나, 또 남이 알아주어서 즐거운 그런 화기애애함만을 위해서는 아닐 터다. 오히려 그런 기쁨과 즐거움의 아기자기함을 지나서, 급기야 적막하고 팍팍하며,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외로운 길에 차라리 참다운 '길다움'이 있으렷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학(學)과 습(習)의 기쁨'에서부터도 벗어나고 또 '인정해주는 벗이 있어 즐거운 순간'으로부터도 벗어나 그저 내가 갈 길이기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운명성에 대한 잠잠한 인식'이 다가서리라. 운명성에 대한 인식이란, 내가 밟아온 길이 나의 기쁨이나 즐거움을 위한 그 무엇(수단)이 아니라, 도리어 나 자신이 '길(道)'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의 도치(倒置)를 뜻한다. 어느덧 길이 나를 위한 그 무엇이 아니라, 내(己)가 길을 위한 그 무엇으로 급전하는 순간, 길은 바로 그 자리에서 나를 수렴하고 나를 걷게 만드는 당위로 변화하고(transfiguration) 만다. 이제 우리는 그 길이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길'임을 알아채고, 남이 뭐라든 그 길이 보편이요 진리임을 '자부'하게 되는 것이다(다만 이 자부는 뻐긴다는 뜻의 자부가 아니라, 그 누구의 눈길과 입질에도 개의치 않는 개결介潔한 초탈로서의 자부다. 핑가렛은 이 길을 '갈림길 없는 길'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Fingarette, The Secular as the Sacred, 1972).


<한글세대가 본 논어 1> 26~27쪽, 공자,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

  논어의 가장 첫 단락에 대한 해설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해설이다. 더 이상 어떤 말을 더 붙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공부하는 참뜻 아닐까.
  이 해설은 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한 척도가 될 듯 하다. 이 글로 미루어 보건대 '남의 시선을 위한 나의 길 가기'나 '아무런 학습과 교류 없는 나의 길 가기'가 바른 것은 아닐 듯 하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가만히 보면 외국의 욕구 계층 발달의 이론과도 유사한 듯 하다. 매슬로우(A. H. Maslow)나 앨더퍼(C. Alderfer)의 이론을 찾아보고 비교해 보면 의미가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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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속에는 한 부인이 대여섯 살쯤 된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있는데, 어린애는 병들어 파리한 몸으로 눈을 흘기며 빤히 쳐다보고, 부인은 고개를 돌려 차마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곁에서 시중드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병든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돌린 자도 있다.
  새의 날개가 붙은 귀신 모양의 수레는 마치 박쥐가 빙글빙글 돌면서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다. 한 신장神將이 발로 새의 배를 질끈 밟고 손에 든 철퇴로 새 머리를 짓이기고 있었다. 또 머리와 몸은 사람이면서 새의 날개를 달고 있는 놈도 있고, 별의별 괴상망측하고 기이한 것들이 많아서 도대체 분간이 되질 않는다.

<열하일기 3> 287쪽,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위의 설명을 보고 저것이 무엇을 그린 그림일지를 상상해 보자. 상당히 괴상한 모습을 그린 그림일 것 같다. 혹 지옥도는 아닐까?
  이 그림은 '성모자상'이라고 한다.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그 성모자상 말이다.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다. 성모자상을 저렇게 볼 수가 있다니? 성모자상은 평화롭고 안온하거나, 위엄이 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 병든 행색과 슬픔으로 저 상의 모습을 읽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아래의 문단의 묘사는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천사와 악마를 그린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 역시 천사나 악마나 모두 '괴상망측하고 기이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도저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같아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이는 단지 그림을 그린 화공의 미숙함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그림 속에 좀 더 다양한 비유를 넣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박지원의 눈이 '완전히 낯선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저런 '오독'을 낳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물을 접할 때 오감을 활용한다. 그러나 그 오감이 모두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 먼 곳을 잘 보지 못하는 자, 가까운 곳을 잘 보지 못하는 자의 시각이 어찌 같겠는가? 시각이 이러하다면 다른 감각이야 말할 것이 더 있겠는가? 그 같지 않은 오감을 가자고 사물을 대하면, 그 사물은 보편적인 형태로 인식될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가 접하는 사물이 모두 옳은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우리가 왜곡된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경우도 많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학습을 통해 '이것이 보편적인 것이다', '이것이 참된 것이다'를 배우고, 문득 그것이 왜 그러한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가지 사물에 대해 '일관된' 인식이 생기면서 의사소통과 교류가 넓어진다. 그러나 그 '보편성'이 '참됨'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때로 '보편성'이 그 '참됨'을 보장한다 여겨, 보편적이지 못한 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아! 이는 소인이 군자를 핍박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소인은 그 수가 많으나, 군자는 그 수가 작은 이 시대에서는 말이다.
  내가 문득 웃으며 말했다.
  "아! 연암 선생은 그림을 잘못 읽었으나, 그 처음 접하는 순수한 눈으로 어쩌면 그림 너머의 본질을 제대로 읽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자가 성을 내며 말했다.
  "네 말이 요망하다. 어찌 천주의 대의와 사랑을 병든 것으로 여기는 허황된 말을 입으로 뱉는 것인가?"
  나는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이는 제 속된 식견으로 일삼은 비루한 장난일 뿐이니, 선생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원래 천박한 식견에서 천박한 모습만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선생의 고결한 식견은 그림 너머의 진짜 천국을 보고 있으시겠지만, 제 식견은 그림 너머는 커녕 옛 사람의 헛된 시선이나 따라가고자 허둥댈 뿐입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더니 비로소 그는 노여움을 거두고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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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학자 로저 핀키와 로드니 스타크는 1776년에 고작 17퍼센트의 미국인만이 교회에 충실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하지만 경쟁적으로 새로운 교파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갈구하면서 1850년에는 그 비율이 두 배인 34퍼센트가 되었고, 1926년에는 다시 배가 되어 56퍼센트에 도달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르몬교와 여호와의 증인 같은 가장 엄격하고 열광적인 교파들은 공격적으로 새로운 신도를 전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 오는 대상인 가톨릭교회나 주류 프로테스탄트 교회보다 훨씬 더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기 때문에 가장 빠른 성장세를 유지한 것이다.
  미국의 종교 서열이 변화하는 방식에는 일종의 모순이 존재한다. 1960년대에 세속 사회가 종교계에 보낸 메시지는 '현대화'인 것처럼 보였다. 종교계의 선택은 시대 속으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세속적인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고 과학적 발견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세계 전역에서 가톨릭교회가 그런 선택을 했지만 그것은 아무 효과가 없었다. 효과를 본 쪽은 그 반대 노선을 택한 교파였다. 번영을 누린 교파는 근본주의자들과 성경을 진보적으로 해석하여 설교에 반영하는 교파, 그리고 성령의 힘을 강조하는 기독교 교파들이었다. 다시 말해 과거로 한 걸음 물러서서 신앙이 일종의 벽이 됨으로써 신도들에게 높은 비용을 부과하고, 공동체를 외부와 격리시켜야 한다는 전통적 명제를 회복시킨 교파들이었다.


<모든 것의 가격> 297~298쪽, 에두아르도 포터, 김영사

  통계학자 호텔링은 훗날 '호텔링의 원칙(Hotelling principle)'으로 불리는 이론에서, 양당제에서 정당의 강령과 공약이 비슷해지게 된다는 주장을 폈다. 유권자가 두 정당 중 자신과 가까운 정당을 선택한다면, 정당이 가장 많은 표를 얻기 위해서는 유권자가 가장 많이 모인 '중심'을 노린 강령과 공약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두 정당은 그 '중심'을 향해 수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척 설득력있는 이론이다. 굳이 정치만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이 논리는 적용가능하다.
  그러나 때로는 상당히 협소한 계층만을 위한 집단이 존속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러한 집단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들은 자신의 집단 '공동체'를 제공하고 그 안에서는 외부에서 찾을 수 없는 유대감과 안온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팎으로 이동하는 것을 힘들게 만든 것도 큰 원인이 된다. 경제학 용어로 말하자면, 진입장벽(entry barrier)이 높아서 진입과 탈퇴에 큰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 좁은 '공동체'가 주는 안락함은 바람직한 것인가? 그것은 일종의 현실도피로서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닐까? 공동체의 좁은 시야를 공유하면서, 세상을 단순한 한두가지 논리로 재단하게 되고, 그 판단을 공동체의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나의 협소함을 정당화시키고, 나의 편협함을 잊을 수 있는 작용을 하지는 않을까?
  세상의 다양함을 접하는 나의 시야가 비슷비슷한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면, 주위를 돌아봐야겠다. 내가 지금 넓은 대지에 서 있는지, 아니면 좁은 우물에 나도 모르게 빠진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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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습니다. 선생의 말씀이 아주 옳습니다. 공자 문하의 70명의 제자가 스승에게 물은 내용이란 것도 인仁과 효孝에 대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후세에는 그렇질 않아서 제자가 스승을 처음 찾아와서 책을 펴고는 문득 이기理氣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선생도 옷깃을 여미고 높은 자리에 올라앉아서 문득 성명性命을 말합니다. 지금의 학자라는 사람들은 학문적으로는 하늘과 인간의 이치를 꿰뚫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고을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이치로는 만물의 현상을 살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 따위 학문하는 사람을 두고서 이학理學선생이라고 말합니다.
  시골의 글방이나 서당에서는 천품이나 자질이 고루하고 꽉 막혔으며 행동거지도 괴상하고 현실감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략 경전이나 익히고 겨우 글자의 뜻이나 통하면 모두 선생 자리를 열어서 강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묵고 썩어빠진 것을 맛보고는 좋은 곡식이라고 하고, 덕지덕지 기운 옷을 걷어모아서는 좋은 가죽옷이라고 하며, 고집쟁이의 자기주장을 도리어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라 하고, 후한後漢의 호광胡廣이라는 학자처럼 여기저기 붙는 처세를 하면서도 스스로는 중용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 따위 학문하는 사람을 일러서 도학道學선생이라고 말합니다."


<열하일기 2> 180~181쪽,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박지원이 열하에서 만난 추사시라는 선비가 이 말을 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유학에 대한 비판에 박지원은 정색하며 싫은 기색을 보인다. 그러나 그 미친 사람의 헛소리를 왜 이리도 자세히 기록해 놓았는가? 단지 기록의 공정함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미친 소리로 가장하여 자신이 정작 하고팠던 말을 기대어 빌리는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학문의 발전과정을 보면, 위에서 비판하는 이학선생과 도학선생의 풍모가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굳이 유교만 그렇겠는가. 본래 학문의 참된 뜻이나 원래 말한 이의 주장은 잊고(혹은 무시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 혹은 너무나 쏠려있고 좁아서 실제로는 제대로 쓸 수도 없는 지식놀음을 자랑스럽게 내미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혹은 어디선가 편협하게 주워들은 것을 최고라고 우기며 더 이상의 공부를 죄악으로 여기고, 자신의 이랬다저랬다 함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이것이 어찌 박지원 당시의 이야기만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혹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학선생이나 도학선생의 풍모를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고보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때로는 정색할 정도로 싫은 이야기도 옮겨 쓰고 있는데, 이는 정말로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것인가, 혹은 나 역시 나의 뜻을 가탁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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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고로 피니는 극도의 주관성…… 그리고 극도의 편집증에 빠진 세상 안에서 우리가 이런 사건을 상대하고 있는 거라고 통보해 준다. 물론 '우리'는 윌마의 말을 즉시 믿는다. 비록 우리에게 객관적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만약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책 제목을 통해서 '바디 스내처(신체 강탈자)'가 저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안다.
  처음부터 우리를 윌마의 편에 서게 함으로써, 피니는 우리를 황야에서 불길한 예언을 부르짖던 세례 요한 같이 변모시킨다. 1950년대 초반에, 공산주의자의 음모가 진행 중이라고 여겼던 사람들, 또는 어쩌면 반공주의라는 이름을 빙자해 파시스트의 음모가 진행 중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서 이 소설이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던 이유를 알아보기란 상당히 쉽다. 왜냐하면 어느 쪽 사람들의 의견이 맞든 또는 두 쪽 다 틀리든 간에, 이 소설은 강력한 편집증적 의미를 내포한 음모를 다룬 작품이기 떄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온갖 종류의 정치적 수다쟁이들에게서 정치적 우화라고 불릴 만한 딱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죽음의 무도> 520쪽, 스티븐 킹, 황금가지

  편집증적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그들은 왜 편집증적일까? 글쎄,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모르지만 나만 아는 진실'이라는 것이 주는 쾌감(우월감 같은?)과 초조함(입이 근질거리니까?)이 그들을 중독시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세상의 진실에 대해서 외치고, 그걸 모르는 자들을 욕하고 비웃는 것이 아닐까? 경문왕의 복두장이(혹은 미다스 왕의 이발사)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만 아는 비밀 때문에 편집증적으로 몰리는 것을 보라. 그나마 대숲(혹은 갈대밭)에서 자신의 비밀을 말하는 걸로 족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은 비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편집증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틀렸다면? 그들 소리높여 주장하는 '나만의 진실'이 틀렸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음모, 왜곡, 조작, 선동. 과격한 단어로 적의 비루함을 내보이며, 자신이 상대적으로 고결하다는 것을 보인다. 자신을 찌질함으로 가장하는 자들조차 그러하다. 그렇지, 암만 그래도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보다는 낫잖아? 하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야말로 진정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똥 묻은 개 같아 보인다. 글쎄, 모르는 일이다. 혹 정말로 내가 똥 묻은 개였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내가 똥 묻었음을 반성할지언정, 겨 묻었음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본받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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