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는 한 부인이 대여섯 살쯤 된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있는데, 어린애는 병들어 파리한 몸으로 눈을 흘기며 빤히 쳐다보고, 부인은 고개를 돌려 차마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곁에서 시중드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병든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돌린 자도 있다.
  새의 날개가 붙은 귀신 모양의 수레는 마치 박쥐가 빙글빙글 돌면서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다. 한 신장神將이 발로 새의 배를 질끈 밟고 손에 든 철퇴로 새 머리를 짓이기고 있었다. 또 머리와 몸은 사람이면서 새의 날개를 달고 있는 놈도 있고, 별의별 괴상망측하고 기이한 것들이 많아서 도대체 분간이 되질 않는다.

<열하일기 3> 287쪽,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위의 설명을 보고 저것이 무엇을 그린 그림일지를 상상해 보자. 상당히 괴상한 모습을 그린 그림일 것 같다. 혹 지옥도는 아닐까?
  이 그림은 '성모자상'이라고 한다.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그 성모자상 말이다.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다. 성모자상을 저렇게 볼 수가 있다니? 성모자상은 평화롭고 안온하거나, 위엄이 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어찌 병든 행색과 슬픔으로 저 상의 모습을 읽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아래의 문단의 묘사는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천사와 악마를 그린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 역시 천사나 악마나 모두 '괴상망측하고 기이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도저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 같아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이는 단지 그림을 그린 화공의 미숙함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그림 속에 좀 더 다양한 비유를 넣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박지원의 눈이 '완전히 낯선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저런 '오독'을 낳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물을 접할 때 오감을 활용한다. 그러나 그 오감이 모두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 먼 곳을 잘 보지 못하는 자, 가까운 곳을 잘 보지 못하는 자의 시각이 어찌 같겠는가? 시각이 이러하다면 다른 감각이야 말할 것이 더 있겠는가? 그 같지 않은 오감을 가자고 사물을 대하면, 그 사물은 보편적인 형태로 인식될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가 접하는 사물이 모두 옳은 것만은 아니며, 때로는 우리가 왜곡된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경우도 많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학습을 통해 '이것이 보편적인 것이다', '이것이 참된 것이다'를 배우고, 문득 그것이 왜 그러한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가지 사물에 대해 '일관된' 인식이 생기면서 의사소통과 교류가 넓어진다. 그러나 그 '보편성'이 '참됨'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때로 '보편성'이 그 '참됨'을 보장한다 여겨, 보편적이지 못한 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아! 이는 소인이 군자를 핍박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소인은 그 수가 많으나, 군자는 그 수가 작은 이 시대에서는 말이다.
  내가 문득 웃으며 말했다.
  "아! 연암 선생은 그림을 잘못 읽었으나, 그 처음 접하는 순수한 눈으로 어쩌면 그림 너머의 본질을 제대로 읽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자가 성을 내며 말했다.
  "네 말이 요망하다. 어찌 천주의 대의와 사랑을 병든 것으로 여기는 허황된 말을 입으로 뱉는 것인가?"
  나는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이는 제 속된 식견으로 일삼은 비루한 장난일 뿐이니, 선생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원래 천박한 식견에서 천박한 모습만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선생의 고결한 식견은 그림 너머의 진짜 천국을 보고 있으시겠지만, 제 식견은 그림 너머는 커녕 옛 사람의 헛된 시선이나 따라가고자 허둥댈 뿐입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더니 비로소 그는 노여움을 거두고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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