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윗사람이 벌을 주는 것은 운명이 본시 벌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 포악해서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실천한다면 왕된 자는 의롭지 못할 것이고 신하된 자는 충성스럽지 못할 것이고 아비된 자는 자애롭지 못할 것이고 자식된 자는 효성스럽지 못할 것이며 형된 자는 어른스럽지 못할 것이고 동생된 자는 공경스럽지 못할 것이다. 운명론을 고집하는 것은 악한 말의 근원이 되며 난폭한 사람의 도이다.
  그렇다면, 운명론이 난폭한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옛날 상고시대 궁핍했던 백성들은 음식에는 탐욕스럽고 하여야 할 노동에는 나태하였다. 그래서 먹고 입을 물건이 부족해, 기아와 추위에 시달려야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허약하고 무능하며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모르고, 자신들의 운명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시대의 폭군들은 자신들의 음란을 좋아하는 이목과 사악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다가 나라와 사직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허약하고 무능하며 정치를 잘못하여 그렇게 된 줄은 모르고, 자신들의 운명이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묵자> 233~234쪽, 묵적, 박재범 옮김, 홍익출판사

  자신의 모습을 미리 정해 놓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니까'라는 말로 자신의 위치를 정해 놓고서는, 그 위치대로만 살려고 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나는 찌질이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의 '찌질이짓'을 정당화시키는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을 누가 만든 것일까? 하늘? 운명?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나의 그러한 모습을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운명'이라는 단어는 무척 편리한 단어이다. 모든 책임을 거기에 떠넘기면 내가 편해진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게 내 운명인가 보지.'라는 한 마디면 무척 간단하게 해결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운명에 모든 것을 떠 넘길 것인가?
  그러나 위의 묵적의 언술에서 한 가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묵적이 든 상고시대 백성의 예시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의 세상에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 정치인들이 짐짓 국민들을 꾸짖으면서 설파하는 논리가, 묵적의 이 논리 아닌가. '자신의 게으름을 보지 않고 정부를 탓하는 무지한 국민들'이라는 논리는, 내 생각으로는 때로는 옳지만 언제나 옳은 논리는 아니라고 본다. A가 B라고 해서 B는 A일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정부가 정말로 잘못했기에(폭군이 정치를 잘못했기에)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경우 또한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운명론'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부조리함을 알았다면, 그걸 어떤 방법으로든 고쳐나갈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고 그저 방관만 한다면 이는 과연 잘 하는 행동일까? 정치가 부조리하다 느꼈다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해도 결국은 바뀌지 않으니까'라면서 회피하는 것은 옳은 결정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결국 자신이 처한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난 뒤의 일 아닐까? 그러고 난 뒤에 비로소 '그게 내 운명인가 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속의 혼돈에 못 이겨 횡설수설하게 몇 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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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떄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만이 더욱 깊이 뿌리내리며 복수심이 더욱 불타오를 뿐입니다.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책에도 썼듯이 제가 보기엔, 혹시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희망뿐입니다. 이 책에 제가 좋아하는 시인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했지요.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고.
  하지만 꼭 알아두십시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참 어려운 구축(構築)작업입니다.


<분노하라> 65쪽, 스테판 에셀, 돌베개

  교직에 대한 꿈이 아직 있었을 때,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체벌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대학교 4학년 교생실습 때, 나는 그 결심을 어떻게든 지켜내었다. 여기서 '어떻게든'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교생실습을 하는 4주의 기간 동안 내 결심이 점점 흔들려갔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나를 보게 하기 위해서 한 노력들은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경제학적(혹은 행정학적) 용어를 쓴다면 '투입 대비 산출이 낮은, 능률성이 떨어지는' 노력들이었다. 그 점에서, '한 명을 때려서 모두를 경계하게 한다'는 체벌의 유혹은 무척 달콤하고도 강렬했다.
  그러나 만약 내 결심이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쓰지 말아야겠다.'였다면, 나는 그것을 지키지 못한 셈이 된다. 교생 실습 4주째에 결국 학생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고, 학생들을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다. '그까짓 게 무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고함을 지르는 것은 아주 훌륭한 폭력적 수단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전혀 좋은 교사가 아니었고, 그런 이유도 포함된 여러 가지 까닭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자격증을 수령하면서, 나는 교직의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기로 했다.
  내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분명 그럴 것이다. 지금 그때의 내 행동을 돌이켜보면 아주 부끄러운 것들만 가득했다.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지위로 학생들에게 가한 다양하고 은밀한 폭력들은, 아직도 내 가슴 한켠에서 나를 짓누르고 있다.
  스테판 에셀의 말은 무척 어려운 말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비폭력으로의 길. 어떤 의미로는 '수신'의 길이기도 하다. 가끔은 정말로 꼴도 보기 싫어서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확실하다면' 혼쭐을 톡톡히 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말 저 조건이 성립되는 경우에도, 그 폭력을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폭력의 화살은 돌고 돌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결국 다시 내게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연쇄는 '하늘의 그물은 그 그물코가 엉성하지만 무엇 하나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폭력 행동을 하지 않고, 그러한 생각마저 이기고,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 생각만으로도 힘겨움이 느껴진다.
  아직 나는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현재 추구하는 길은 또다른, 어쩌면 더욱 커다란 폭력의 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 길을 걷는 것밖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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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들이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표현된 권력의 장소라는 명제는 19세기 시설들의 특징을 비춰내며 박물관사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담론 주제를 보다 폭넓은 문화적 이론의 관점들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분석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방문객들의 가시성 및 움직임 패턴들에 대한 통제 형식이 어떤가에 따라 다른 권력 형식들이 존재한다. 이 두 박물관의 모든 공간이 파놉티콘처럼 작용하거나, 보다 사적인 경험과 동선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대도시의 대형 건물들에서 나타나는 상호가시성은 단순히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뿐 아니라 각 개인에게 감시가 배분되는 형식으로 인해 많은 군중 속에서 그들의 익명성을 보호하는 메커니즘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시설들 모두,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19세기 박물관들이 모든 전시물을 큐레이터들과 대중들 간의 차이를 줄이게끔, 마치 그 두 사회 집단들이 지식에 대한 같은 접근권을 갖게끔 배치했다는 점이다(그림 6.7 참조). 컬렉션이 늘어나게 되면 이런 거리가 증가했고, 이는 전시의 응집성과 하나의 총체적인 백과사전처럼 작용하는 박물관의 능력을 침해했다(Forgan 1994: 151). '사실은 어떤 수준이든, 유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교육적 기능은 박물관들이 신흥 대학들과 경쟁 중에 있었음을 의미했고 이런 것들이 다른 전제들에 기초한 교수법적인 제도들을 제공했다'(1994: 151). 따라서 19세기의 박물관들은 해석의 매개체를 통해 지식과 대중 간의 거리를 두는 현대의 시설들보다 더 평등주의적이었다.


<건축과 내러티브> 207~208쪽, 소피아 사라, 시공문화사

  옛 선비들의 이야기를 보면 무척 흥미로운 모습이 눈에 띈다. 음악 연주를 위해 사용하는 악기의 차이를 통해 정치의 변화를 논하고, 시의 정묘함을 통해 천지의 앞날을 예견하는 모습을 선비들이 드러내는 것을 보면, 현대인으로서는 그저 아득할 따름이다. '르네상스 인'이라는 모습은, 어쩌면 옛 선비의 그런 모습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런 모습이 가능했는가? 지식을 특정한 곳에 한정짓지 않는 자세가 그 이유라고 본다. 어떤 한 가지 일을 보고 나면 그와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곳에 빗대어 보고, 한 가지 변화를 보고 다른 사물의 모습을 짐작하는 과감한 엉뚱함. 어쩌면 그들은 지식을 통해 무한한 상상을 세계 속에서 펼쳐 나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상상의 한가운데에는 천하를 능히 파악하는 눈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 눈이라면, 위 글에서 이야기하는 옛 박물관이라는 공간의 모습을 보고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당시 세상의 모습을 능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현실에 끌고 와서 적용시키는 모습까지도.
  19세기의 영국 박물관의 모습에서 흥미로운 모습은, 박물관이 주는 지식과 일반 대중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제나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이라는 것은, 생각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무척 좋은 수단이며, 생각의 다양성은 사색의 무한한 모험을 제공하는 방식이며, 사색의 모험은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을 다.
  생각을 해 본다. 19세기에 저 박물관을 이용했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들보다 더욱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을까? 그들은 우리보다 더욱 세상을 잘 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을까? 혹은, 인터넷이나 다양한 정보 매체를 주위에 둔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일까? 상상은 무한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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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대화의 최대화와 최심화는 요컨대 우정 때문에 요청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인의 깊은 우정에서 대화의 최대화와 최심화가 요청되었고, 이 때문에 미평에 특수한 공간적 독자성과 함께 독특한 성격이 부여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비평가 이덕무가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미평을 창안하게 된 근원을 궁구해 들어가면 양인의 깊고도 돈독한 우정에 가 닿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양인의 우정은 몇 가지 점에서 그것만의 독특함을 갖는다. 첫째, 조선 최고의 문장가와 조선 최고의 비평가가 나눈 우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두 사람이 평생 뜻을 함께한 사제師第이자 벗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두 사람이 생에 대한 감각과 예술적 취향과 문학적 노선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서로 좋아하고 서로 깊이 이해하면서도 상호 존중심을 잃지 않았고 각자의 분수를 지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런 특별한 우정이 이런 특별한 비평을 낳은 것이다.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232~233쪽, 박희병, 돌베개

  우정에 대한 글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박지원과 이덕무의 글이다. 박지원이 지음(知音)의 고사를 통해서 말한 우정의 상실이 가져오는 고통에 대한 묘사와, 이덕무가 친구를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아름다운 서술은 다른 글과 비교할 수 없은 아득한 향취를 내고 있다. 이러한 우정은 심지어 서로의 글 주고받음에서조차 일반적인 방식을 벗어나는 창의적인 모양새를 낳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들의 우정은 살아있고, 기운이 넘쳐흐른다.
  나는 이 모습을 구경하며 그저 질투만이 끓어오를 뿐이다. 부럽다. 그들의 주고받음의 깊이가. 부럽다. 그들의 우정의 향취가. 부럽다. 내가 원하지만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부럽다. 그들이 나누는 살아있는 기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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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들어서니 어르신께서는 사흘을 굶으신 채 맨발에다 망건도 쓰지 않고 창문에다 다리를 턱 걸치고는 행랑 사람과 말을 주고받고 계셨다. 내가 온 것을 보시고는 마침내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앉으시더니 고금의 정치 및 당대 문장의 유파流派와 당론黨論의 동이同異에 대해 거침없이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퍽 신기하게 여겼다.
  시각은 이미 3경을 지나 있었다. 창밖을 쳐다보니 하늘에 갑자기 빛이 번쩍번쩍하더니 은하수에 흰 빛이 뻗치는데 점점 더 희뜩희뜩하여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놀라 이렇게 여쭈었다.
  "저건 어째서 저렇사옵니까?"
  어르신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네 곁을 한번 보게나!"
  촛불이 꺼지려고 하면서 불꽃을 깜박이며 더욱 커다랗게 되어 있지 않은가. 나는 그제야 방금 전에 본 게 촛불이 비치어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 이서구, <연암을 읽는다> 91~92쪽에서 재인용

  이서구가 박지원을 찾아갔을 때, 박지원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흘을 굶고 차림새도 흐트러진, 그야말로 '폐인'이 아닌가. '군자는 그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라는 중용의 어구대로라면 박지원은 군자는 커녕 선비라 하기도 어려울 모습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폐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야말로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자리에 앉아서 천리를 꿰뚫어 본다는 표현은 이런 모습을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의 머릿속이 천하를 경륜하고 있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란히 앉은 방 안에서, 창 밖의 하늘에 변괴가 일어난다. 그 당시에는 천지에 드러나는 이상한 징조는 곧 세상의 큰 변화를 암시하는 예고였다. 그러나 그것에 놀란 이서구는 박지원의 지적에 알아차리고 만다. 그 변화조차 자신들이 앉은 좁은 방 안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이 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이 변하는 것일 뿐이다. 더군다나 촛불이 꺼지기 전이라는 것은 더더욱 비극적인 모습이다. 그들의 생활 변화는 결국 지금보다도 못한 어두움으로 향할 것이라는 점에서.
  며칠 전, 개기월식이 있다는 시간에 방 안에서 창 밖의 보름달을 봤지만, 달은 곧 창 밖의 건물 뒤로 사라졌다. 방 밖의 보름달이 가려지는 모습까지 보지 못하고 만 그날의 기억을 새삼 떠올린다. 세상에 여러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나는 이 좁은 방 안에서 보고 있다. 과연 그 변화가 정말로 세상이 변하려고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내 좁은 삶이 변화하는 모습에 불과한 것일까? 세상은 정말 변하고는 있는 것일까? 나는 변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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