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들이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표현된 권력의 장소라는 명제는 19세기 시설들의 특징을 비춰내며 박물관사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담론 주제를 보다 폭넓은 문화적 이론의 관점들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분석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방문객들의 가시성 및 움직임 패턴들에 대한 통제 형식이 어떤가에 따라 다른 권력 형식들이 존재한다. 이 두 박물관의 모든 공간이 파놉티콘처럼 작용하거나, 보다 사적인 경험과 동선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공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대도시의 대형 건물들에서 나타나는 상호가시성은 단순히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뿐 아니라 각 개인에게 감시가 배분되는 형식으로 인해 많은 군중 속에서 그들의 익명성을 보호하는 메커니즘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시설들 모두,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19세기 박물관들이 모든 전시물을 큐레이터들과 대중들 간의 차이를 줄이게끔, 마치 그 두 사회 집단들이 지식에 대한 같은 접근권을 갖게끔 배치했다는 점이다(그림 6.7 참조). 컬렉션이 늘어나게 되면 이런 거리가 증가했고, 이는 전시의 응집성과 하나의 총체적인 백과사전처럼 작용하는 박물관의 능력을 침해했다(Forgan 1994: 151). '사실은 어떤 수준이든, 유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교육적 기능은 박물관들이 신흥 대학들과 경쟁 중에 있었음을 의미했고 이런 것들이 다른 전제들에 기초한 교수법적인 제도들을 제공했다'(1994: 151). 따라서 19세기의 박물관들은 해석의 매개체를 통해 지식과 대중 간의 거리를 두는 현대의 시설들보다 더 평등주의적이었다.
<건축과 내러티브> 207~208쪽, 소피아 사라, 시공문화사
옛 선비들의 이야기를 보면 무척 흥미로운 모습이 눈에 띈다. 음악 연주를 위해 사용하는 악기의 차이를 통해 정치의 변화를 논하고, 시의 정묘함을 통해 천지의 앞날을 예견하는 모습을 선비들이 드러내는 것을 보면, 현대인으로서는 그저 아득할 따름이다. '르네상스 인'이라는 모습은, 어쩌면 옛 선비의 그런 모습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그런 모습이 가능했는가? 지식을 특정한 곳에 한정짓지 않는 자세가 그 이유라고 본다. 어떤 한 가지 일을 보고 나면 그와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곳에 빗대어 보고, 한 가지 변화를 보고 다른 사물의 모습을 짐작하는 과감한 엉뚱함. 어쩌면 그들은 지식을 통해 무한한 상상을 세계 속에서 펼쳐 나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상상의 한가운데에는 천하를 능히 파악하는 눈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 눈이라면, 위 글에서 이야기하는 옛 박물관이라는 공간의 모습을 보고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당시 세상의 모습을 능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현실에 끌고 와서 적용시키는 모습까지도.
19세기의 영국 박물관의 모습에서 흥미로운 모습은, 박물관이 주는 지식과 일반 대중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제나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이라는 것은, 생각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무척 좋은 수단이며, 생각의 다양성은 사색의 무한한 모험을 제공하는 방식이며, 사색의 모험은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을 다.
생각을 해 본다. 19세기에 저 박물관을 이용했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들보다 더욱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을까? 그들은 우리보다 더욱 세상을 잘 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을까? 혹은, 인터넷이나 다양한 정보 매체를 주위에 둔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일까? 상상은 무한히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