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들어서니 어르신께서는 사흘을 굶으신 채 맨발에다 망건도 쓰지 않고 창문에다 다리를 턱 걸치고는 행랑 사람과 말을 주고받고 계셨다. 내가 온 것을 보시고는 마침내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앉으시더니 고금의 정치 및 당대 문장의 유파流派와 당론黨論의 동이同異에 대해 거침없이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퍽 신기하게 여겼다.
시각은 이미 3경을 지나 있었다. 창밖을 쳐다보니 하늘에 갑자기 빛이 번쩍번쩍하더니 은하수에 흰 빛이 뻗치는데 점점 더 희뜩희뜩하여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놀라 이렇게 여쭈었다.
"저건 어째서 저렇사옵니까?"
어르신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네 곁을 한번 보게나!"
촛불이 꺼지려고 하면서 불꽃을 깜박이며 더욱 커다랗게 되어 있지 않은가. 나는 그제야 방금 전에 본 게 촛불이 비치어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 이서구, <연암을 읽는다> 91~92쪽에서 재인용
이서구가 박지원을 찾아갔을 때, 박지원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흘을 굶고 차림새도 흐트러진, 그야말로 '폐인'이 아닌가. '군자는 그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라는 중용의 어구대로라면 박지원은 군자는 커녕 선비라 하기도 어려울 모습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폐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야말로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자리에 앉아서 천리를 꿰뚫어 본다는 표현은 이런 모습을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의 머릿속이 천하를 경륜하고 있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란히 앉은 방 안에서, 창 밖의 하늘에 변괴가 일어난다. 그 당시에는 천지에 드러나는 이상한 징조는 곧 세상의 큰 변화를 암시하는 예고였다. 그러나 그것에 놀란 이서구는 박지원의 지적에 알아차리고 만다. 그 변화조차 자신들이 앉은 좁은 방 안의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세상이 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이 변하는 것일 뿐이다. 더군다나 촛불이 꺼지기 전이라는 것은 더더욱 비극적인 모습이다. 그들의 생활 변화는 결국 지금보다도 못한 어두움으로 향할 것이라는 점에서.
며칠 전, 개기월식이 있다는 시간에 방 안에서 창 밖의 보름달을 봤지만, 달은 곧 창 밖의 건물 뒤로 사라졌다. 방 밖의 보름달이 가려지는 모습까지 보지 못하고 만 그날의 기억을 새삼 떠올린다. 세상에 여러 일이 일어나는 것을 나는 이 좁은 방 안에서 보고 있다. 과연 그 변화가 정말로 세상이 변하려고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내 좁은 삶이 변화하는 모습에 불과한 것일까? 세상은 정말 변하고는 있는 것일까? 나는 변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