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떄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만이 더욱 깊이 뿌리내리며 복수심이 더욱 불타오를 뿐입니다.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책에도 썼듯이 제가 보기엔, 혹시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희망뿐입니다. 이 책에 제가 좋아하는 시인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했지요.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고.
  하지만 꼭 알아두십시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참 어려운 구축(構築)작업입니다.


<분노하라> 65쪽, 스테판 에셀, 돌베개

  교직에 대한 꿈이 아직 있었을 때,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체벌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대학교 4학년 교생실습 때, 나는 그 결심을 어떻게든 지켜내었다. 여기서 '어떻게든'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교생실습을 하는 4주의 기간 동안 내 결심이 점점 흔들려갔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나를 보게 하기 위해서 한 노력들은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경제학적(혹은 행정학적) 용어를 쓴다면 '투입 대비 산출이 낮은, 능률성이 떨어지는' 노력들이었다. 그 점에서, '한 명을 때려서 모두를 경계하게 한다'는 체벌의 유혹은 무척 달콤하고도 강렬했다.
  그러나 만약 내 결심이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쓰지 말아야겠다.'였다면, 나는 그것을 지키지 못한 셈이 된다. 교생 실습 4주째에 결국 학생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고, 학생들을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다. '그까짓 게 무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고함을 지르는 것은 아주 훌륭한 폭력적 수단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전혀 좋은 교사가 아니었고, 그런 이유도 포함된 여러 가지 까닭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자격증을 수령하면서, 나는 교직의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기로 했다.
  내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분명 그럴 것이다. 지금 그때의 내 행동을 돌이켜보면 아주 부끄러운 것들만 가득했다.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지위로 학생들에게 가한 다양하고 은밀한 폭력들은, 아직도 내 가슴 한켠에서 나를 짓누르고 있다.
  스테판 에셀의 말은 무척 어려운 말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비폭력으로의 길. 어떤 의미로는 '수신'의 길이기도 하다. 가끔은 정말로 꼴도 보기 싫어서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확실하다면' 혼쭐을 톡톡히 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정말 저 조건이 성립되는 경우에도, 그 폭력을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폭력의 화살은 돌고 돌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결국 다시 내게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연쇄는 '하늘의 그물은 그 그물코가 엉성하지만 무엇 하나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폭력 행동을 하지 않고, 그러한 생각마저 이기고,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 생각만으로도 힘겨움이 느껴진다.
  아직 나는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현재 추구하는 길은 또다른, 어쩌면 더욱 커다란 폭력의 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 길을 걷는 것밖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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