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대화의 최대화와 최심화는 요컨대 우정 때문에 요청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인의 깊은 우정에서 대화의 최대화와 최심화가 요청되었고, 이 때문에 미평에 특수한 공간적 독자성과 함께 독특한 성격이 부여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비평가 이덕무가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미평을 창안하게 된 근원을 궁구해 들어가면 양인의 깊고도 돈독한 우정에 가 닿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양인의 우정은 몇 가지 점에서 그것만의 독특함을 갖는다. 첫째, 조선 최고의 문장가와 조선 최고의 비평가가 나눈 우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두 사람이 평생 뜻을 함께한 사제師第이자 벗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두 사람이 생에 대한 감각과 예술적 취향과 문학적 노선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서로 좋아하고 서로 깊이 이해하면서도 상호 존중심을 잃지 않았고 각자의 분수를 지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런 특별한 우정이 이런 특별한 비평을 낳은 것이다.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232~233쪽, 박희병, 돌베개
우정에 대한 글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박지원과 이덕무의 글이다. 박지원이 지음(知音)의 고사를 통해서 말한 우정의 상실이 가져오는 고통에 대한 묘사와, 이덕무가 친구를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아름다운 서술은 다른 글과 비교할 수 없은 아득한 향취를 내고 있다. 이러한 우정은 심지어 서로의 글 주고받음에서조차 일반적인 방식을 벗어나는 창의적인 모양새를 낳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들의 우정은 살아있고, 기운이 넘쳐흐른다.
나는 이 모습을 구경하며 그저 질투만이 끓어오를 뿐이다. 부럽다. 그들의 주고받음의 깊이가. 부럽다. 그들의 우정의 향취가. 부럽다. 내가 원하지만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부럽다. 그들이 나누는 살아있는 기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