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인은 사회에 의해서 잉태되고 성장한 존재이며, 따라서 사회의 억압을 개선하여 일상으로 복귀시켜야 할 책임을 가진(또는 자처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사회와 역사가 지성에게 부여한 책임이며, 그 책임감음 바로 스스로의 자부로부터 발생해 나온다. 즉 이 책무감은 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한 것이다. '무위적, 일상적 삶'의 회복을 위해, '유위적, 비상한 삶'을 살아야 하는 비극성이 바로 공자가 생각하는 지사(志士)의 삶 속에 깃들여 있는 모순이다.
  여기서 공자는 비극적 현세에 개입하기를 촉구한다. 그것이 끝내 일상성의 회복이 될지는 운명(命)이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 정치적 투신은 스스로 역사와 사회로부터 담지한 공공의 행위이기 때물일 뿐, 어떤 이로움이나 남의 눈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유가적 앙가주망, 그 정치적 개입행위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는" 비극성을 잉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불가(無不可)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정신이 다시금 무가(無可)라는 부정의 정신 속으로 내림(來臨)하지 않는 한, 무가(無可)의 세계는 기껏 야만/자연으로의 회억이며 그것은 리얼리즘을 무시한 좌파의 몽상적 사유이거나 자기 위모적인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에 불과하고 만다. 말하자면 그것은 극좌적(極左的) 이기성이다.
  공자의 무불가(無不可)의 세계는, 은자들의 무가(無可)와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즉 횡으로 맞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가(無可)를 끌어안고 뛰어넘는 것(包越)이다. 즉 공자는 무가(無可)의 세계를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자기인식, 자기 위상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라는 '법어'에 깔려 있는 공자의 속내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2> 444~445쪽, 공자,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

  대학교 시절 선배가 나를 가리켜 '낙관적 비관주의자'라는 평을 내린 적이 있다. 참으로 애매모호한 평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 선배가 왜 내게 그렇게 평했는지를 온전하게 알지는 못한다.(다만 되돌아본 그때의 모습으로 대략적인 짐작을 할 뿐이다.) 당시에는 그 알쏭달쏭한 평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인상비평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을 그떄의 평과 견주어 보면, 저 평어를 내 모습에 쓰기는 부적절해 보인다.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모습에 견주기에는 말이다. 지금의 내가 추구하는 나의 모습은, '비관적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앞 부분의 '낙관적/비관적'은 현재 세상을 대하는 자신의 관점 혹은 인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현재 내 삶이 썩 나쁜 것은 아니라 여기고 즐거이 살아가고 있었다. 비하여 지금은 내 삶과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모순을 느끼고 불만과 안타까움과 좌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뒷 부분의 '비관주의자/낙관주의자'는 자신의 궁극적인 지향점 혹은 이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의 나는 결국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차 있어서 해결할 도리는 없으며,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참여보다는 현실을 살짝 비켜서는 삶을 원하고 있었다. 굳이 거기에 현실참여를 더해야 한다면 직접적 방법보다는 간접적 방법으로, 행동보다는 말로, 정석적인 서술법보다는 풍자와 조롱과 비꼼으로 대응하는 방법론을 원했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세상이 모순에 가득하다는 인식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 글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생겼다. 결국 언젠가 세상은 달라질 것이고, 내 노력에 의해 아주 조금이나마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그 변화를 내 눈으로 봐야 한다는 집착이 사라졌다. 우공이산의 고사는, 그 집착을 버린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낙관적 비관주의자'이고 싶지 않다. '비관적 낙관주의자'로 살아가고자 하며, 그 삶 속에서 '낙관적 낙관주의자'로 변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자그한 희망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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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이 이상향과 은둔자(隱士)들의 꿈과의 거리는 또 얼마나 될까. 공자의 꿈은 근본적으로는 은둔자들의 꿈과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자에게는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론, 또는 살아내는 실제가 달랐을 뿐이다. 은둔자들의 삶이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닌", 전도된 사회현실을 체념한 채, 나 홀로의 "산을 산으로 여기며 사는", '현세 부정의 정신'에 머물고 있다면 공자의 길은 '현세 극복의 정신'이 깃들이어 있다. 즉 공자의 삶은 그 "산이 산이라"는 '원래의 꿈'(1차)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산이 더이상 산이 아니라"는 '혼란의 현실'(2차)을 극복하고 다시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현실극복의 비전'(3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은둔자들이 몸을 감추어, 혼란의 현실(2차)을 주관적으로 무시하는 길을 택했다면, 공자는 혼란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객관적 참여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은둔자들이 퇴행(re-gression)이라면, 공자는 의식적 참여(pro-gression)이다. 공자와 노자, 또는 공자와 은둔자들의 언어들이 매우 흡사하면서도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이다. 꿈은 같을지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혹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현격히 다른 것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2> 63~64쪽, 공자,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

  같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 방법론의 차이로 대립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그러한 많은 길 중, 참된 길은 존재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 안에서도 선, 경전, 수행 등 그 방법론은 다양하고, '하느님'을 온전히 믿는 크리스트교에서도 다양한 종파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한 다양한 길이 저마다의 진실함으로 정당성을 세우고, 그 진실함을 앞세워서 상대방과 대화를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로는 진정 바람직한 길이 아닐까? 다양함은 그것이 참되게 유지된다면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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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되 생각하지 않음(學而不思)'은 배우는 것에 맥놓고 매몰되었거나, 배우면서도 생각은 멀리 떠난 경우인데 이럴 때는 배워도 한 귀로 듣고 또 한 귀로는 흘릴 뿐, 내게 남는 것이 없다(罔). 객관(대상)에 휘둘리기만 해서는 소득이 없는 것이다. 이 대목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해버리면 덕을 버리는 것(道聽而塗說, 德之棄也)"(17-14)이라는 경고와 궤를 같이한다.
  한편, '생각하되 배우지 않음(思而不學)'은 제 생각에만 골똘하여 타당성을 검증하지 않은 경우다. 예컨대 성경책 한 권 달랑 들고 입산(入山)해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휴거 소동 같은 것들이 그래서 생긴다. 자기 생각에만 골똘하여(思), 근 2천 년간 성경학자들과 교부(敎父)들이 이루어놓은 성경에 대한 방대한 주석들은 공부하지 않은(不學) 결과 빚어진 혼돈(殆)인 셈이다. 주관의 오류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더욱 어려운 법이다.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변증법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배우고, 생각하며, 또 그 갈무리된 생각을 바탕으로 더 널리 또 더 높게 배워가는 것, 이것은 공자가 자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지적한바, 호학의 실행과정인 셈이다. 그래야만 몸에 제대로 학문이 배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배우고서 생각하고(學而思), 생각한 것을 바탕으로 배우는(思而學) 변증적 긴장을 늦추지 않을 때 참된 배움(學-習)이 가능하리라.


<한글세대가 본 논어 1> 96~97쪽, 공자,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

  위 인용문 자체만으로도 이미 내가 할 말은 더 없다. 저대로 따르기만 할 수 있다면! 그러나 굳이 한 마디 덧붙여 본다.
  생각하되 배우지 않음은, 어쩌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모순을 혁파하고 세상의 밝은 부분을 지향하지만, 자신의 앎이 그 생각을 현실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그런 차이 말이다. 정신적으로는 높은 격을 갖추고 있을지 몰라도, 실제 앎은 전혀 그 격에 맞지 않는 초라함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을 것이다.
  이는 결국 내 현재 모습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이 넘치고 세상의 모순에 분노하지만, 결국 실력은 전혀 없는 현재의 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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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당신을 방 안으로 데려가서 완전히 낯선 사람 옆에 앉히고, 100달러를 준다고 하자. 당신은 낯선 사람과 돈을 나눠 가져야 하는데, 1달러부터 100달러까지 얼마를 줘도 좋다. 상대방이 그 돈을 받지 않으면, 당신은 100달러를 모두 나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당신은 단 한 번만 이 게임을 할 수 있고, 방을 나간 다음에는 게임에서 만난 사람을 결코 다시 볼 일이 없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이 진정한 합리주의자라면, 그리고 당신이 모든 인간은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고 믿는다면, 선택은 아주 쉽다. 두 사람은 단 한 번 만나고, 낯선 사람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별로 선택할 것이 없다. 당신이 얼마를 내놓든 그는 이 돈을 받아서 떠날 수 있다. 돈이 얼마라도 있는 게 전혀 없는 것보다 나으니까, 그 사람은 돈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놓을 수 있는 최소의 금액인 1달러만 내놓아도 그 사람이 이 돈을 받는다고 전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당신은 99달러를 갖게 될 것이다.
(중략)
  이제까지 연구자들은 말 그대로 수백 번의 게임을 연구했다. 이런 연구에서는 대개 학생들을 모집해서 게임에 참여시키는데, 지원한 학생들을 무작위로 짝지어 10달러나 20달러로 게임을 하게 한다. 여기에서 이론가들이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단발성 실험에서 '제안자' 역할을 맡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의 40퍼센트쯤을 내놓았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거나, 너무 적게 내면 거절당할 것을 염려해서 그렇게 했다. 한편으로 '수령자'의 절반 정도는 20퍼센트 수준 이하면 거절했다. 이런 경향은 돈을 수백 달러로 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순수한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중략)
  조금 거슬리는 점은, 이기주의를 강조하는 현대 경제 이론 탓에 경제학자들 자신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 전공의 대학원생들에게 데이비드 흄이 묘사했던 농부와 비슷한 상황에서 협력 게임을 하게 했다. 심리학과와 수학과 학생들은 보통 사람들과 거의 똑같게 행동했다. 두드러지는 한 집단은 경제학과 대학원생들이었는데, 그들은 사람들이 언제나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확신했고, 자신들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자주 협력을 거절했다. 실제로 경제학(적어도 과거의 경제학)을 공부하면 사람이 탐욕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연구의 논문 집필자가 말했듯이, "이기주의 모형에 노출되면 스스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 관찰을 보면 조금 걱정스러워진다. 세계 각국 정부들이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원자> 160~164쪽, 마크 뷰캐넌, 사이언스북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그 속에 담긴 세상을 바라보는 합리적 시선에 매료되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세상이 모두 합리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고, 만물이 자로 잰 것 마냥 딱 떨어지는 것은 역시 아니다. 케플러가 행성의 공전궤도가 완벽한 원형이라고 생각하여 시간을 허비한 일화를 생각해 보면, 세상이 완벽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은 문제가 있는 생각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말이다. 나는 과연 합리적인 시선으로 얼마나 많은 재단을 해 온 것일까? 알 수 없다.
  자신이 공부하는 학문, 자신이 의탁하는 사상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사로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학문과 사상이 나의 생각을 얼마나 옭아매고 있는가? 그리고 그 생각의 구속이 나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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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진 사람의 군대이고, 왕자의 뜻입니다. 군께서는 권모술수와 형세를 이용하여 유리함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공격과 약탈과 변화와 속임수를 행하려 하는데, 이것은 제후 정도가 하는 일입니다. 어진 사람의 군대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속일 수 있는 상대란 대비에 태만한 군대이거나 함부로 부려 지쳐 있는 군대입니다. 임금과 신하와 위아래 사람들 사이가 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걸왕 같은 사람의 군대가 걸왕 같은 사람의 군대를 속인다면 교묘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다행히 승리를 거두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걸왕 같은 사람의 군대가 요임금 같은 사람의 군대를 속인다는 것은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고 맨손가락으로 끓는 물을 휘젓는 것과 같으며, 물이나 불 속에 뛰어드는 것처럼 들어가기만 하면 타 버리거나 빠져 죽을 것입니다."


<순자> 491쪽, 순자,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얼마전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컬 덕원을 인터뷰한 포스팅을 보았다. 사실 그 인터뷰 자체는 그리 맘에 들지 않는게, 노래에 대한 것보다 정치적 입장을 묻는 질문의 비중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 덕원이 한 말 중 하나가 인상적이었다. "지지 않는 전략의 일환이겠으나 염치가 없는 것입니다. 패배를 피하는 정도를 넘어 그건 보신주의에 가깝다고 봅니다. 비겁합니다."라는 말. 맥락까지 자세히 옮기기에는 공간이 부족하지만, 이 말 자체에서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나는 패배를 피하기 위해 염치없이 내 몸 하나의 안위를 지키려고 웅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었다.
  순자가 말하는 '어진 사람의 군대'는 지지 않는 싸움을 하는 군대가 아니라, 이기기 위한 싸움을 하는 군대이다. 능동적인 군대이고, 그렇기에 그 군대는 당당하고 정당하다. 그 앞에서는 권모술수를 통한 임시변통이 통하지 않는다. 과연 이러한 군대는 이상적이고 개념에 불과한 군대인가?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군대가 아닌 나의 행동으로 이 개념을 확장해 비추어 보자면, 지지 않는 싸움을 하는 삶보다는 이기려는 싸움을 하는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당당함과 올바름을 찾아야 한다. 나의 그것은 무엇인가? '바르게 살기 원한다'라는 한 가지 실마리를 붙들고, 계속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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