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이 이상향과 은둔자(隱士)들의 꿈과의 거리는 또 얼마나 될까. 공자의 꿈은 근본적으로는 은둔자들의 꿈과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자에게는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론, 또는 살아내는 실제가 달랐을 뿐이다. 은둔자들의 삶이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닌", 전도된 사회현실을 체념한 채, 나 홀로의 "산을 산으로 여기며 사는", '현세 부정의 정신'에 머물고 있다면 공자의 길은 '현세 극복의 정신'이 깃들이어 있다. 즉 공자의 삶은 그 "산이 산이라"는 '원래의 꿈'(1차)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산이 더이상 산이 아니라"는 '혼란의 현실'(2차)을 극복하고 다시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현실극복의 비전'(3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은둔자들이 몸을 감추어, 혼란의 현실(2차)을 주관적으로 무시하는 길을 택했다면, 공자는 혼란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객관적 참여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은둔자들이 퇴행(re-gression)이라면, 공자는 의식적 참여(pro-gression)이다. 공자와 노자, 또는 공자와 은둔자들의 언어들이 매우 흡사하면서도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이다. 꿈은 같을지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혹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현격히 다른 것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2> 63~64쪽, 공자, 배병삼 주석, 문학동네

  같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 방법론의 차이로 대립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그러한 많은 길 중, 참된 길은 존재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 안에서도 선, 경전, 수행 등 그 방법론은 다양하고, '하느님'을 온전히 믿는 크리스트교에서도 다양한 종파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한 다양한 길이 저마다의 진실함으로 정당성을 세우고, 그 진실함을 앞세워서 상대방과 대화를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로는 진정 바람직한 길이 아닐까? 다양함은 그것이 참되게 유지된다면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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