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해야만 하는 일이란 다른 독자와의 의사소통 없이 '현실화된 관습'을 찾아내는 일이다. '가장 아름다운 미인을 고르시오'라는 말이 주어진 규칙이지만, 이는 가장 마른 사람을 고르라거나 붉은 머리를 고르라거나 혹은 앞니가 벌어진 사람을 고르라는 것보다는 대단히 어렵다. 한 후보가 다른 후보와 구별되는 무엇을 가졌다면 이는 초점이 되며, 사람들은 그가 초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이라고 해서 완전히 완벽한 신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거의 완벽한 특징을 가졌지만, 몇몇 흥미로운 결함을 가졌기에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어필하고 초점이 된다.


<전략의 탄생> 444~445쪽, 애비너시 딕시트, 배리 네일버프, 쌤앤파커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는 이론이 있다. 인간과 흡사하게 닮은 로봇 혹은 유사물에게 인간이 불쾌함과 두려움,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눈을 전혀 깜박거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왜인지 모를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어설픈' 인간다운 로봇이 우리에게 왜 불쾌감을 주는지를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이다.(아직 이 이론이 확실하게 검증된 건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인간과 흡사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로봇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가지게 하려고 한 물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완전함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소소한 결점이나 미세한 습관들을 제외한 물건이리라. 눈깜박임, 점, 털, 체취, 약간 어긋난 좌우대칭과 같은 점까지 로봇에 재현시키지는 않았을 것이기 떄문이다.
  문득, 우리 눈 앞에 가장 완벽한 인간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틀림없이 그 인간을 보며 겁에 질릴 것이다. 그는 완벽한 인간이기에 아무런 결점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무엇인가로 보일 것이다. 아니,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도 좋다. 가장 평범한 인간은 어떨까? 그 역시도 공포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우리 옆에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가 약간의 일그러짐과 어긋남과 더러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그러한 결점이 우리의 존재를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요소가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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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집단에는 기회만 있다면 규범을 무시하고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심지어 약속을 잘 준수하는 사람들까지도 잠재적 이익이 아주 클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규범을 깨트리려는 상황도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행위 규범의 채택이 기회주의적 행동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다. 공유 자원 문제를 풀고자 하는 사용자들에게 기회주의적 행동은 회피할 수 없이 항상 존재하는 가능성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기회주의의 만연은 감시 및 제재 장치에 큰 투자를 하지 않고서도, 공동의 노력만으로 공유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를 크게 제약한다. 비용이 드는 감시 및 제재 활동이 그럴 만한 값어치를 얻으려면 그로 인한 편익이 상당히 커야 한다. 또 장기적 안목에서 신뢰할 만한 상호 간의 서약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경우에는 감시 및 제재 장치에 그리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공유된 규범은 이처럼 감시와 제재의 비용을 줄여 주며 따라서 공유 자원 문제의 해결에 적극 활용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라 할 수 있다.


<공유의 비극을 넘어> 81쪽, 엘리너 오스트롬, 랜덤하우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면, 때로는 개인의 이익을 제약하는 사회적, 국가적 간섭을 못마땅해 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그러한 간섭이 과도한 제약이라서 개인의 정당한 이익 추구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간섭을 무시하고 개인이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있는 것일까?
  이익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공익이 사익보다 우선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공익과 사익이 별개의 것이라는 '실체설'적인 입장과, 공익은 사익의 총합이라는 '과정설'적인 입장이 보는 견해가 조금 다를 것이다.(그렇다고 실체설적 입장이 공익을 사익보다 항상 우선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익의 총합이 큰 쪽을 우선해야 하는가? 현대의 다양한 이론에서, 다수결로 대표되는 다양한 투표 이론들이 가진 한계점이 드러나고 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고려하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비교 방법은 사실상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경계는 모호하며, 이 경계를 임시로 구획짓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간 합의이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 약간의 양보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길 원하는 그런 자세 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대화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언제 어느 때라도 중요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의견을 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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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물공업 부문에서 노동자의 기술과 교육 및 감독 요건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링 정방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기술은 19세기에 개발된 방적 기술로서 부분적으로는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기술수준을 최소화시켰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 링 정방공이 하는 일이라고는 다음 다섯 가지 과업이 전부다,


① 피어싱piecing: 작업 중 끊어진 실 조각을 한데 모으기.
② 크릴링creeling: 미방적 상태의 면화를 링 스펀들에 공급하는 보빈(일종의 실패)들을 제자리에 배열하기.
③ 크리닝cleaning: 정방기에 쌓인 실 꼬투리 제거하기.
④ 도핑doffing: 면사가 다 감긴 보빈을 제거하고 빈 로빈을 대신 채워 넣기. 보통 전문 도핑공들이 정기적으로 이 작업을 수행한다.
⑤ 패트롤링patrolling: 기계들을 돌아보면서 스펀들을 중심으로 위의 ①~③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독하기.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작업 구성은 극히 단순하다. 각 정방공spinner(인도에서는 'piecer'라고 함)이 스핀들 한 세트에 배정되었다. 정방공은 동일한 경로로 움직이면서 자신에게 배정된 스핀들 세트를 관리했다. 각각의 스핀들을 살펴보면서 피어싱, 크릴링 혹은 크리닝 등이 필요한지 확인했다. 이 작업이 끝나면 정방공의 일과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방공은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도 되고 하다못해 별다른 힘이나 꼼꼼함도 갖출 필요가 없었다. 미리 어떤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이들은 그저 이 스핀들에서 저 스핀들로 이동하면서 위 세 가지 작업이 필요한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직공장은 각 직공에게 배정된 스핀들 가운데 작동이 정지된 것이 몇 개인지 파악하고 이 비율을 다른 직공과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직공들의 근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 448~449쪽, 그레고리 클라크, 한스미디어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화가 가져온 놀라운 일 중에서, 육체 노동의 다양성이 상당히 사라진 걸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각각의 육체 노동 직업마다 요구하는 특정한 자질이 요구되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직업의 개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계의 발전은 과정의 단순화를 가져오고, 이는 그러한 개성 없이도 충분히 효율적인, 어쩌면 더욱 대량의 생산이 가능해지도록 이끌었다.
  여기에서 노동의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가 정말로 크게 벌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고용인은 최소한 자신이 몸담은 일의 각각의 과정을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기계를 통한 노동의 단순화는 점차 기계만 잘 사면 그 기계로 정확히 뭘 하는지를 몰라도 고용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책의 흥미로운 구절을 읽어서 간단히 옮겨 써 보며, 생각 하나를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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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까지 논의된 모든 상황에서,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각오하고 이견을 제시했으며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몇몇 맥락에서,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견을 제시했을 수도 있고, 이견을 제시하는 것이 출세하기 위한 훌륭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관행에 도전해 정치적으로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그 도전의 결과로 좀 더 저명해지고 성공하게 된다. 맥케인 상원의원이 바로 그런 경우다. 맥케인의 성공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공화당 지도부의 생각을 거부하면서 자주 이의를 제기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사회가 다양한 가치와 신념을 지닌 수많은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만 하면, 공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평판은 한 집단에서는 손상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집단에서는 강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148쪽, 카스 R. 선스타인, 후마니타스

  소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굳은 신념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그 소신을 통해 일종의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집단 안에서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는 집단 안에서 일종의 '소수파'가 된다. 그런데 그 집단에 대한 불만과 불평의 목소리가 늘어갈 경우, 집단 내부에서는 다양한 선택지로 고민을 하게 된다. 집단 전체를 모두 개혁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고 집단을 없애고 다른 집단으로 대체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적어도 그 집단 내부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렇다면 그나마 덜 아프고 빠른 결론은? 바로 집단 내부의 '소수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소수파'는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정치판에서 들려오는 소신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짧게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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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선택한다는 사실이 선택이라는 이유로 남겨진 것-삶이나 노동-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당신은 '삶'의 완전성보다 '노동의 완전성'을 선택했거나 자신의 복지보다 다른 행위목표에 우선권을 부여하려고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당신의 삶이나 복지에 중요하지 않다-당신이나 다른 사람에게-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아니다.
(주석: 이것은 심지어 개인의 선택이 행위목표들에 대한 완벽한 순위매김에 기반을 두는 경우에도 그렇다. 이 순위매김과 관련된 '최선'의 선택은 일반적으로 또는 특수한 선택 맥락에서 높게 평가된 고려사항들의 비중요성을 반영한다기보다 의사결정에 대한 당신의 적절한 '상쇄(trade-offs)'관을 반영한다. 또한 우리의 행위결정이 종종 완전한 순위매김이나 '최선'의 대안에 근거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선택하지 않은 쪽'이 실제로 특수한 선택 맥락에서조차 '높게 평가'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Sen(1970a, 1982a), Levi(1986) 참조].)
  또 다른 중요한 쟁점은 다양한 실행에 대한 개인별 비교를 이용하는 데 복지와 행위 측면이 매우 다른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사회가 개인의 복지에 대해 어떤 책임성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특히 그의 복지수준이 아주 낮은 위험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가 이 사람의 다른 행위목표의 향상에도 똑같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느 누구도 굶주려선 안 되며 심각하지만 명백히 치료가능한 질병에 대해 의학적 치료를 받지 못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보증하는 데 사회가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회가 개인의 행위목적-예를 들어 그가 특히 존경하는 영웅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 설령 그 사람이 잘 먹고 치료받는 것보다 동상 건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똑같이 보호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의미를 동반하지 않는다.


<불평등의 재검토> 130~132쪽, 아마티아 센, 한울아카데미

  복지에 대한 다양한 논쟁 중에서, '당신이 이 정책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 정책으로 인해 피해보는 특정 부류의 사람(혹은 막대하게 지출될 엄청난 세금)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잔인무도한 것이다'라는 비난이나, '나는 이런 정책을 내가 혜택받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돈으로 다른 걸 혜택받길 원한다'라는 주장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주장들은 얼마나 옳은 것인가? 위 글이 그러한 주장에 일정 부분 해답을 준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떤 기준으로 특정한 정책을 정하느냐에 있다. 빈곤에 대해서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고 들었다. 절대적 빈곤은 말 그대로 의식주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빈곤을 말하며, 상대적 빈곤은 의식주 유지에는 문제가 없으나 소속된 사회 전반으로 보면 빈곤층에 속하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복지정책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그것조차 동의하지 않는다면, 내 생각에는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싶다.) 하지만 상대적 빈곤을 해소하는 복지정책은?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상대적 빈곤을 해소하기 위한 복지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생각일까? 이에 대해서 다양한 주장들이 있으며, 그 주장들 중 억지스러운 것이 아닌 것들은 나름대로의 타당한 근거와 관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일방적 강요가 아닌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합의를 본다면 그나마 낫지 않을까.(물론 합의 과정 자체의 모순이나 여러 문제점 등을 논의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야기가 길어지게 된다.) 최근 복지에 대한 여러 뉴스들을 보면서 이 글로 생각을 아주 약간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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