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오늘의 한국정치는 안락한 보수주의에 빠져 있다. 우리 정치가 이렇게 안락한 보수주의에 젖어 있는 한 발전은 힘들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다뤄야 할 정당과 이들로 구성된 정치적 대표체제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책임성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정치 엘리트들이 사회를 무시할 때 사회 역시 그들을 무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정치를 조롱하면서 이런 정치를 정당화하는 들러리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투표율의 하락은 대안이 억압되어 있는 유권자의 절망적 항의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244쪽, 최장집, 후마니타스

  사회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걸맞는 책임성을 보여주는 것을 가리켜서 노블리주 오블리제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았으면 하는 덕목이자, 가장 보기 힘든 덕목이기도 하다. 최근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좌우를 막론하고, 그 품위라는 것은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 때문일까. 넷 문화에서 상대를 대하는 가장 품위없는 방식이 정치를 조롱하는 방식에도 쓰이는 경향이 보이는 것은. 어차피 너도 나도,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품위없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이 그 조롱 속에 담긴 것일까. 특정 웹사이트에서 흔히 말하는 조롱, '패드립', '고인드립'이 정치를 향해서도 횡행하는 것은 그런 이유일까. 과연 이러한 '막돼먹은' 모습은 정치와 윗사람을 향한 절망적 항의일까. 상대방을 무작정 이유 없이 혐오하고 싫어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도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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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을 위한 진단은 '구속적 제약조건'을 찾아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한 사고과정은 의사결정나무 모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모형은 정책결정 문제를 구조화하며,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적절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도와준다.
  불충분한 투자수익률이 문제인가? 수익의 사적 전유성(專有性, appropriability)이 문제인가? 아니면 자금 공급 부족이 문제인가? 만약 투자수익률이 문제라면, 인적 자본이나 기간시설과 같은 생산 보조요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적절한 기술을 도입할 수 없기 때문인가? 만일 전유성이 문제라면, 높은 과세율, 재산권이나 계약의 법적 구속력의 문제, 노사 간의 갈등, 혹은 학습의 외부효과가 문제인가? 투자수익률이 아니라 자금공급이 원인이라면, 국내 금융시장과 해외 금융시장 중 어디가 문제인가?
  의사결정나무를 따라 다음 가지로 한 단계씩 이동하는 것은 구속적 제약조건의 후보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책입안자는 이렇게 찾아낸 제약조건에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 85~87쪽, 대니 로드릭, 북돋움

  일반적인 과학 실험에서 실패는 딱히 나쁜 것이 아니다. 실패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고, 그 정보는 성공을 위해서 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실험, 특히 국가 규모의 실험은 그럴 수 없다. 과학 실험은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회적 실험은 똑같은 상황을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그 실험의 실패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더욱 크다. 특히 국가 규모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그런 신중한 정책 입안을 위해서, 즉 다시 말해 실패 없이 성공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 글은 그러한 한 가지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책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각각의 요소 간의 관계를 파악한 뒤,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과정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실패한 정책은 단기적이고 장기적으로 국가의 국민들에게, 심지어는 세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판단에 신념의 개입 여부이다. 어떤 것을 진리라고 확고하게 믿는 사고가 여기 개입했을 경우, 명확한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이러한 사고가 정책결정에 개입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 사고가 더 나아가서 '신념 이외의 상황'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경우, 문제가 생긴다. 사람의 일에서 가치 판단 영역을 떼어 놓을 수는 없지만, 이 가치 판단을 내리는 상황은 제한적이고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는 모르지만, 인류를 위해서 공익을 실현하는 일을 하고 싶다. 앞으로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숙지하고 신중하게 움직이고 확고하게 사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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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의 옆얼굴을 보다 보니, 급수탑 언덕에 있는 하얀 아파트로 놀러 갔을 때 마룻바닥에서 잠들어버린 누나를 관찰하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의 일도 노트에 잘 기록해놓았지만 오늘의 일도 노트에 기록해둘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런 식으로 누나와 함께 지낸 일들을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렇게 누나와 함께 있는 건 누나와 함께 있는 걸 기억해내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게 아닐까. 누나와 함께 지금 이렇게 수영장 옆에 있고, 무척 덥고, 물소리와 사람소리가 시끄럽고, 그리고 하늘에 소프트크림같은 뭉게구름이 떠 있는 걸 올려다보고 있는 것과, 그것들을 노트에 기록한 문장을 나중에 읽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른 게 아닐까. 상당히 다를 거야.
  나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 느낌은 잘 기록할 수 없었다. "헤이, 소년" 하고 누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만약 내가 펭귄을 만들어낼 수 없게 되면 넌 더 이상 나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을 거니?"
  "내 연구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계속될 거에요."
  "왜?"
  "왜냐하면 누나는 무척 흥미로운 사람이니까요."


<펭귄 하이웨이> 266~267쪽, 모리미 토미히코(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정신

  나는 기억에 유난히 서툴다. 5년 전에 한 달 내내 고생을 했던 장소를 지나치면서도, 그때의 막연한 느낌만이 남아 있는 경험을 오늘 했다. 만약 거기서 내 고생을 지켜본 사람들을 다시 본다 해도, 나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었다고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래서 무척 슬픈 일이다. 내 기억 속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얼굴이 어느 순간 느낌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조차 없어지고, 막연한 '아'라는 감탄사 하나로만 남게 되면, 그때는 소중한 사람이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연구를 계속한다. 소중한 사람이 언제나 계속 소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마도 나의 잃어버린 마음은 그 연구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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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오  (전략) 선악을 둘로 나누고, 이것은 선, 이것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칫하면 위험한 일입니다. 선이 악을 구축한다, 그렇게 되면 선은 뭘 해도 상관없다는 얘기가 되죠.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에요. 옴진리교 신자들도 자기들은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죠. 저도 모르게 나쁜 짓을 저질러버렸다…… 그런 차원과는 다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인데, 악 때문에 일으킨 살인은 수가 매우 적습니다. 그에 비하면 선을 위한 살인은 엄청나게 많죠. 전쟁도 그런 셈이에요. 그래서 선이 기세 좋게 나서면 굉장히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악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몹시 곤란하죠.
하루키  취재하면서 느낀 점은, 어느 연령 이상이 되면 "옴진리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옴진리교를 "그놈들은 절대적인 악이다"라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20대에서 30대에 걸쳐서는 "그 사람들 심정도 전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물론 행위 자체에는 분노하지만, 동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정적이었습니다.
하야오  선악의 정의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살아온 삶의 방식에 따라 주입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것이 선이다, 라는 게 있으면, 육체가 아예 그것에 따라 변해버리죠. 지하철 역무원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런 면이 굉장히 두드러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탄이 들 정도에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게 없습니다. 판단이 유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약속된 장소에서> 272~274쪽,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선과 악의 이분법이라는 것은 무척 위험한 것이 아닐까? 과연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어떻게 절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선인가? 다른 이에게는 악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악이라고 생각하여 경멸하는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선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주체가 인간인 경우, 인간의 존재가 사라진 지구는 인간이 있기 전보다 훨씬 살기 좋은 땅이 될지도 모른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인간은 악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악이라고? 섬뜩한 이야기이다. 역사의 경우, 어떤 집단의 침략은 피해자에게는 악으로 여겨지지만, 결과적으로는 피해자에게 좋은 일이 되었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이러한 논리의 대표적인 예가 '식민지 근대화론'일 것이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결과적으로 한반도 경제 발전의 바탕이 되었으니, 일제의 통치는 선이다?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생각하자, 라고 이야기해 왔지만, 여기서 나는 큰 딜레마에 빠진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무엇이 '바른' 마음이고 생각인가? 내가 생각하는 '바름'이 사실은 '그름'이 아닌가? 이 문제는 언제나 나를 괴롭히고 있고, 그래서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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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어찌 논쟁하기를 좋아하겠느냐? 나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천하에 사람이 살아 온 것이 오래 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 어지러워지곤 했다.
  요임금의 시대에는 물이 역류해 나라 한 가운데로 범람하여 뱀과 용이 그곳에 서식하자 백성들이 정착할 수 없어서, 낮은 지대에 있는 사람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높은 지대에 있는 사람은 땅굴을 파서 살았다. 『서경』에서 '큰물이 나를 경각시켰다'고 했는데, 큰물이란 홍수를 말한다.
  그래서 순임금이 우에게 물을 관리하게 하였다. 우는 땅에 물길을 파서 바다로 흘러들게 하였고 뱀과 용을 몰아서 수초 우거진 못으로 내쳤다. 물이 양쪽 기슭 사이로 흘러갔으니 양자강과 회수(淮水) 그리고 하수(河水)와 한수(漢水)가 그것이다. 위험과 장애가 멀어지고 새와 짐승들이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어진 후에야 사람들이 평지를 얻어서 살게 되었다."


<맹자> 161쪽, 맹자, 홍익출판사

  맹자의 이 말을 들으면 솔직히 좀 우습다. 맹자는 백가쟁명의 시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게 분명한 소위 '키보드워리어'이다. 오죽하면 주장하고 논쟁하는 법을 알기 위해서 맹자를 읽는다는 사서삼경의 독서순서가 있겠는가. 맹자에 맞설만한 논변가는 아무래도 장자 정도일 것이다. 확실히 이 두 사람의 '말빨'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장자가 휘황찬란한 비유와 예시로 듣는 이를 아득하게 만들어 넋을 빼 놓는다면, 맹자는 상대방의 약점과 헛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며 자신의 주특기분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라는 점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물론 이는 내 생각일 뿐이다.)
  오늘 뉴스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한 것은 엄청나게 많이 내리고 만 비 이야기다. 이렇게 많은 비가 내려서 홍수가 되었고, 홍수는 가장 문명화되었다는 도시 지역을 엉망진창의 혼돈으로 만들었다. 과연 이는 맹자가 말한 '한 번 어지러워지는' 모습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 뒤에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한 번 다스릴'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누구일까? 과연 이 홍수로 혼란해진 세상을 다스릴 우 임금은 누구인가?
  아니다. 우 임금이라는 절대적 '영도자'를 기다려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혹은 시민)이 주인인 세상 이치를 가리킨다. 우리가 그 세상을 '한 번 다스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기 위해서 다양한 의무를 행하였고 행하고 있으며 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기 위한 바른 행동 역시 행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다만 이는 바른 시민의식을 통한 정당한 행사로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라고 해서 노르웨이의 테러범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언제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행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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