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찌 논쟁하기를 좋아하겠느냐? 나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천하에 사람이 살아 온 것이 오래 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 어지러워지곤 했다.
요임금의 시대에는 물이 역류해 나라 한 가운데로 범람하여 뱀과 용이 그곳에 서식하자 백성들이 정착할 수 없어서, 낮은 지대에 있는 사람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높은 지대에 있는 사람은 땅굴을 파서 살았다. 『서경』에서 '큰물이 나를 경각시켰다'고 했는데, 큰물이란 홍수를 말한다.
그래서 순임금이 우에게 물을 관리하게 하였다. 우는 땅에 물길을 파서 바다로 흘러들게 하였고 뱀과 용을 몰아서 수초 우거진 못으로 내쳤다. 물이 양쪽 기슭 사이로 흘러갔으니 양자강과 회수(淮水) 그리고 하수(河水)와 한수(漢水)가 그것이다. 위험과 장애가 멀어지고 새와 짐승들이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어진 후에야 사람들이 평지를 얻어서 살게 되었다."
<맹자> 161쪽, 맹자, 홍익출판사
맹자의 이 말을 들으면 솔직히 좀 우습다. 맹자는 백가쟁명의 시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게 분명한 소위 '키보드워리어'이다. 오죽하면 주장하고 논쟁하는 법을 알기 위해서 맹자를 읽는다는 사서삼경의 독서순서가 있겠는가. 맹자에 맞설만한 논변가는 아무래도 장자 정도일 것이다. 확실히 이 두 사람의 '말빨'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장자가 휘황찬란한 비유와 예시로 듣는 이를 아득하게 만들어 넋을 빼 놓는다면, 맹자는 상대방의 약점과 헛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며 자신의 주특기분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라는 점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물론 이는 내 생각일 뿐이다.)
오늘 뉴스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한 것은 엄청나게 많이 내리고 만 비 이야기다. 이렇게 많은 비가 내려서 홍수가 되었고, 홍수는 가장 문명화되었다는 도시 지역을 엉망진창의 혼돈으로 만들었다. 과연 이는 맹자가 말한 '한 번 어지러워지는' 모습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 뒤에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한 번 다스릴'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누구일까? 과연 이 홍수로 혼란해진 세상을 다스릴 우 임금은 누구인가?
아니다. 우 임금이라는 절대적 '영도자'를 기다려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혹은 시민)이 주인인 세상 이치를 가리킨다. 우리가 그 세상을 '한 번 다스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기 위해서 다양한 의무를 행하였고 행하고 있으며 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기 위한 바른 행동 역시 행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다만 이는 바른 시민의식을 통한 정당한 행사로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라고 해서 노르웨이의 테러범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언제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행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