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개과改過' 즉 허물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심하게는 처음부터 허물이 없었던 것보다 오히려 낫게 여기기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대개 사람의 정리란 번번이 허물이 있는 곳에 대해 부끄러움이 변해 분노가 된다. 처음엔 아로새겨 꾸미려 들다가 마침내는 어그러져 과격하게 되고 만다. 허물을 고치는 것이 허물이 없는 것보다 어려운 까닭이다.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마땅히 급하게 힘쓸 것은 오직 '개과' 두 글자뿐이다. 세상을 우습게 보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기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영예를 탐하고 이익을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뜻이 같으면 한 패가 되고 다르면 공격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잡서를 즐겨 읽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요, 새로운 견해 내기에 힘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이 같은 병통들은 이루 다 꼽을 수가 없다. 한 가지 마땅한 약재가 있으니 오직 '개改'란 한 글자일 뿐이다.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정약용, <다산어록청상> 60쪽에서 재인용

  '사숙록'이라는 이 글뭉치의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나의 허물을 고치기 위해, 그리고 작은 생각들을 모으고 정리하기 위해, 때로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돌이켜 보기 위해 이 글뭉치를 써 왔고, 만족스럽건 불만족스럽건 이제 백 일 기한이 일 주일 남았다.
  결국 그 동안 나는 글을 쓰면서 허물을 고쳤는가? 이 답에 그리 당당하지는 못하다. 허물을 고친 것은 그리 없고, 오히려 허물을 더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뿐이다. 하지만 그 동안 몰랐던 나의 허물을 알게 되었고, 사소하게 여겼던 허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는 있었던 것 같다.
  천천히 허물을 고쳐 나가자. 그 생각을 하며 이 글을 간단하게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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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상황이 이 수많은 학생 피험자들에게 일부는 악의 실천자로, 일부는 병적인 희생자로 탈바꿈시키는 최악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나는 이 지배 시스템으로부터 더욱더 완벽한 변화를 겪었다. 나는 풍부한 경험을 지닌 연구자이자, 성숙한 성인이며, 뉴욕의 빈민굴에서 살아남은 상황 판단과 행동 계획 능력을 갖춘 세상물정에 밝은 어른이다.
  그러나 지난 한 주 동안 점점 교도소의 권력자로 변신해갔다. 나는 권력자처럼 걸었고 권력자처럼 말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권력자를 대하듯 나를 대했다. 그 결과 나는 그와 같은 권력자 중 하나가 되었다. 바로 그와 같은 권위적 인물, 높은 지위를 누리는 독재자, 거만한 우두머리와 같은 인물이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대립해오고 심지어 혐오했던 대상이 아닌가! 그런데 바로 내가 그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선하고 친절한 감독관으로서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지나치게 열성적인 교도관들이 신체적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막는 일이었음을 상기함으로써 나의 양심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한은 결과적으로 단지 교도관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수감자들에게 좀더 교묘한 심리적 학대를 가하는 쪽으로 그들의 에너지를 돌리도록 했다.
  연구자와 감독관이라는 이중 역할을 맡은 것이 나의 실수였다. 왜냐하면 그 두 역할은 각기 다른,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두 가지 역할을 함께 맡고 있다는 점은 나의 권력을 한층 더 증대해서 우리 교도소를 찾았던 수많은 '외부자'들, 그러니까 수감자의 부모들, 나의 동료들, 경찰, 신부, 기자, 변호사가 이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사람이 일단 상황의 손아귀에 붙잡힌 상태에서는 자신의 사고, 느낌, 행동을 변화시키는 상황의 힘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시스템의 발톱 안에 갇힌 사람은 그저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을 보이면서 시스템과 함께 흘러가게 된다.


<루시퍼 이펙트> 293~294쪽, 필립 짐바르도, 웅진지식하우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을 때, 그 이야기는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었다. 시스템 속에서 사무를 보듯 유대인 학살을 감독한 아이히만의 사례가, 아이히만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움직인 거라는 이야기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훗날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은, 평범한 사람이 권위에 복종하면 얼마나 엄청난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필립 짐바르도는 이 책에 나온 실험인 '스탠포드 대학 교도소 실험'을 통해 무작위로 죄수와 교도관을 나누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죄수와 교도관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짐바르도의 이 실험은 외부인이 짐바르도 역시 교도관의 그것과 다를바 없는 억압을 부추기는 '악한'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면 예정을 다 채우고 끝냈거나, 영화처럼 끔찍한 결말로 파국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즉, (확대해석을 하자면) 방관자의 입장이었던 자 역시도 시스템 속에서 악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G.K.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서 주인공인 브라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사악해 질 수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이 말을 조금 고쳐 말해 보자. 사람은 자신이 '시스템 속에서' 얼마나 사악해 질 수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시스템 속에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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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치(Georg Lukacs)가 말했듯, 훌륭한 포토몽타주는 좋은 농담의 효과를 가진다. 하트필드의 수많은 훌륭한 농담들은 나치 연설을 글자 그대로 '번역'해 놓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재미 속에 나치의 흉포함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만세, 버터가 동났다! Hurrah, the Butter is Finished!>(1935년 12월 19일)의 아래쪽에 실린 문구는 괴링의 연설에서 인용한 것이다 괴링은 함부르크에서 행한 연설에서, "철은 항상 한 국가를 튼튼하게 하고, 버터와 돼지기름은 사람을 뚱뚱하게 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하트필드는 배경에 히틀러 사진이 벽지 무늬로 사용되는 가운데, 한 가족이 기꺼이 철을 씹어먹고 있는 장면을 보여 준다.


<포토몽타주> 57~63쪽, 돈 애즈, 시공사

  포토몽타주는 사진들을 오려붙여서 원래 사진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 혹은 상징을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이러한 뜻밖의 만남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의 본성을 더욱더 부가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마 하트필드의 작품은 후자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나는 정치적 언행이 가진 비유법의 요상함을 다시 한 번 본다. 분명 괴링의 저 비유는 개인의 사치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한 희생을 우선하라고 요구하는 요지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저 말을 실제 사진을 통해 '글자 그대로(Sic)' 표현하면,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혹시 이는 말로만 하는 정치의 본질은 요상하기만 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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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장에서 테러가 다른 폭력과 다른 점은 그 궁극적인 대상이 폭력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고 설명했다. 로마의 장군 티투스는 포로들을 단순히 아무 곳에서나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이 아니라, 성 안에서 버티며 저항하는 유대인들이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성벽과 마주한 곳에서" 매달았으며, 이를 통해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속히 투항하지 않으면 "같은 운명에 처한다는 두려움을 주"려고 했다. 즉 테러의 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요세푸스의 서술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던 저항군들은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도 마음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 군인들의 잔혹한 행태를 보면서 오히려 느슨해진 자신들의 저항 정신을 더 조였던 것이다. 이것은 테러의 사용이 그 자체로 테러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특히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테러는, 바로 그것이 '테러리즘'의 핵심인데, 정치적으로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물론 '무고함' 자체가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고 결과인 것도 사실이다.)


<테러> 48~49쪽, 공진성, 책세상

  일벌백계라는 말이 있다. 한 명을 벌해서 백 명에게 교훈과 가르침을 준다는 뜻이다. 이 '교훈과 가르침'은 훈계자가 피훈계자에게 주는 일종의 메시지이다. 이는 테러가 테러리스트가 테러의 대상 혹은 궁극적 목표에게 주는 메시지의 구조와도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벌백계의 정당성은 누가 만드는가? 아무리 벌을 주고 야단을 치고 윽박지른다 해도, 그 대상이 그럴 만한 존재가 아니라면 그 '교훈과 가르침'은 '테러'가 되는 것이 아닐까? 교육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는 한 번 생각해 볼 법한 주제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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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시毛詩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 초필언'草尙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誰知風中草復立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경』에는 이와 같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큰 쥐」(碩鼠)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강의> 62~63쪽, 신영복, 돌베개

  패관문학의 기원은 정치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의 민심을 알기 위해 민간에서 떠도는 노래와 이야기, 소문들을 수집한 데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민심을 알기 위한 수단으로 백성들이 하는 이야기만큼 직접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백성들은 직접적인 이야기가 자기의 몸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비유와 풍자로 한두번 꼬았다. 문학의 발전에서 포악한 정치가 기여한 분량은 의외로 무척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감정을 직접 전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노래와 시와 글로 옮겨져서 특유의 향취를 풍기게 된 것일지도 모르는 법이다. 내가 앞으로 몇 년 뒤에 나올 우리나라의 시와 소설들을 기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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