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상황이 이 수많은 학생 피험자들에게 일부는 악의 실천자로, 일부는 병적인 희생자로 탈바꿈시키는 최악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나는 이 지배 시스템으로부터 더욱더 완벽한 변화를 겪었다. 나는 풍부한 경험을 지닌 연구자이자, 성숙한 성인이며, 뉴욕의 빈민굴에서 살아남은 상황 판단과 행동 계획 능력을 갖춘 세상물정에 밝은 어른이다.
그러나 지난 한 주 동안 점점 교도소의 권력자로 변신해갔다. 나는 권력자처럼 걸었고 권력자처럼 말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권력자를 대하듯 나를 대했다. 그 결과 나는 그와 같은 권력자 중 하나가 되었다. 바로 그와 같은 권위적 인물, 높은 지위를 누리는 독재자, 거만한 우두머리와 같은 인물이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대립해오고 심지어 혐오했던 대상이 아닌가! 그런데 바로 내가 그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선하고 친절한 감독관으로서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지나치게 열성적인 교도관들이 신체적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막는 일이었음을 상기함으로써 나의 양심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한은 결과적으로 단지 교도관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수감자들에게 좀더 교묘한 심리적 학대를 가하는 쪽으로 그들의 에너지를 돌리도록 했다.
연구자와 감독관이라는 이중 역할을 맡은 것이 나의 실수였다. 왜냐하면 그 두 역할은 각기 다른,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두 가지 역할을 함께 맡고 있다는 점은 나의 권력을 한층 더 증대해서 우리 교도소를 찾았던 수많은 '외부자'들, 그러니까 수감자의 부모들, 나의 동료들, 경찰, 신부, 기자, 변호사가 이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사람이 일단 상황의 손아귀에 붙잡힌 상태에서는 자신의 사고, 느낌, 행동을 변화시키는 상황의 힘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시스템의 발톱 안에 갇힌 사람은 그저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을 보이면서 시스템과 함께 흘러가게 된다.
<루시퍼 이펙트> 293~294쪽, 필립 짐바르도, 웅진지식하우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을 때, 그 이야기는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었다. 시스템 속에서 사무를 보듯 유대인 학살을 감독한 아이히만의 사례가, 아이히만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움직인 거라는 이야기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훗날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은, 평범한 사람이 권위에 복종하면 얼마나 엄청난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필립 짐바르도는 이 책에 나온 실험인 '스탠포드 대학 교도소 실험'을 통해 무작위로 죄수와 교도관을 나누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죄수와 교도관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짐바르도의 이 실험은 외부인이 짐바르도 역시 교도관의 그것과 다를바 없는 억압을 부추기는 '악한'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면 예정을 다 채우고 끝냈거나, 영화처럼 끔찍한 결말로 파국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즉, (확대해석을 하자면) 방관자의 입장이었던 자 역시도 시스템 속에서 악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G.K.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서 주인공인 브라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사악해 질 수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이 말을 조금 고쳐 말해 보자. 사람은 자신이 '시스템 속에서' 얼마나 사악해 질 수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시스템 속에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