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오  (전략) 선악을 둘로 나누고, 이것은 선, 이것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칫하면 위험한 일입니다. 선이 악을 구축한다, 그렇게 되면 선은 뭘 해도 상관없다는 얘기가 되죠.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에요. 옴진리교 신자들도 자기들은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죠. 저도 모르게 나쁜 짓을 저질러버렸다…… 그런 차원과는 다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인데, 악 때문에 일으킨 살인은 수가 매우 적습니다. 그에 비하면 선을 위한 살인은 엄청나게 많죠. 전쟁도 그런 셈이에요. 그래서 선이 기세 좋게 나서면 굉장히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악이 좋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몹시 곤란하죠.
하루키  취재하면서 느낀 점은, 어느 연령 이상이 되면 "옴진리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옴진리교를 "그놈들은 절대적인 악이다"라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20대에서 30대에 걸쳐서는 "그 사람들 심정도 전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물론 행위 자체에는 분노하지만, 동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정적이었습니다.
하야오  선악의 정의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살아온 삶의 방식에 따라 주입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것이 선이다, 라는 게 있으면, 육체가 아예 그것에 따라 변해버리죠. 지하철 역무원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런 면이 굉장히 두드러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탄이 들 정도에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런 게 없습니다. 판단이 유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약속된 장소에서> 272~274쪽,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선과 악의 이분법이라는 것은 무척 위험한 것이 아닐까? 과연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어떻게 절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선인가? 다른 이에게는 악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악이라고 생각하여 경멸하는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선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주체가 인간인 경우, 인간의 존재가 사라진 지구는 인간이 있기 전보다 훨씬 살기 좋은 땅이 될지도 모른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인간은 악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악이라고? 섬뜩한 이야기이다. 역사의 경우, 어떤 집단의 침략은 피해자에게는 악으로 여겨지지만, 결과적으로는 피해자에게 좋은 일이 되었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이러한 논리의 대표적인 예가 '식민지 근대화론'일 것이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결과적으로 한반도 경제 발전의 바탕이 되었으니, 일제의 통치는 선이다?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생각하자, 라고 이야기해 왔지만, 여기서 나는 큰 딜레마에 빠진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무엇이 '바른' 마음이고 생각인가? 내가 생각하는 '바름'이 사실은 '그름'이 아닌가? 이 문제는 언제나 나를 괴롭히고 있고, 그래서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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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어찌 논쟁하기를 좋아하겠느냐? 나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천하에 사람이 살아 온 것이 오래 되었는데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 어지러워지곤 했다.
  요임금의 시대에는 물이 역류해 나라 한 가운데로 범람하여 뱀과 용이 그곳에 서식하자 백성들이 정착할 수 없어서, 낮은 지대에 있는 사람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높은 지대에 있는 사람은 땅굴을 파서 살았다. 『서경』에서 '큰물이 나를 경각시켰다'고 했는데, 큰물이란 홍수를 말한다.
  그래서 순임금이 우에게 물을 관리하게 하였다. 우는 땅에 물길을 파서 바다로 흘러들게 하였고 뱀과 용을 몰아서 수초 우거진 못으로 내쳤다. 물이 양쪽 기슭 사이로 흘러갔으니 양자강과 회수(淮水) 그리고 하수(河水)와 한수(漢水)가 그것이다. 위험과 장애가 멀어지고 새와 짐승들이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어진 후에야 사람들이 평지를 얻어서 살게 되었다."


<맹자> 161쪽, 맹자, 홍익출판사

  맹자의 이 말을 들으면 솔직히 좀 우습다. 맹자는 백가쟁명의 시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게 분명한 소위 '키보드워리어'이다. 오죽하면 주장하고 논쟁하는 법을 알기 위해서 맹자를 읽는다는 사서삼경의 독서순서가 있겠는가. 맹자에 맞설만한 논변가는 아무래도 장자 정도일 것이다. 확실히 이 두 사람의 '말빨'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장자가 휘황찬란한 비유와 예시로 듣는 이를 아득하게 만들어 넋을 빼 놓는다면, 맹자는 상대방의 약점과 헛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며 자신의 주특기분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라는 점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물론 이는 내 생각일 뿐이다.)
  오늘 뉴스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한 것은 엄청나게 많이 내리고 만 비 이야기다. 이렇게 많은 비가 내려서 홍수가 되었고, 홍수는 가장 문명화되었다는 도시 지역을 엉망진창의 혼돈으로 만들었다. 과연 이는 맹자가 말한 '한 번 어지러워지는' 모습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 뒤에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한 번 다스릴'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누구일까? 과연 이 홍수로 혼란해진 세상을 다스릴 우 임금은 누구인가?
  아니다. 우 임금이라는 절대적 '영도자'를 기다려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혹은 시민)이 주인인 세상 이치를 가리킨다. 우리가 그 세상을 '한 번 다스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기 위해서 다양한 의무를 행하였고 행하고 있으며 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기 위한 바른 행동 역시 행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다만 이는 바른 시민의식을 통한 정당한 행사로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라고 해서 노르웨이의 테러범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언제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행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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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메가테러리즘은, 최대한 많은 인명을 살해함으로써 사회를 공포와 충격으로 몰아넣는 최근의 테러리즘의 경향을 가리키는 단어다. 주지하듯이 과거의 테러리즘에서는 인명 희생이 부수적인 것이었다. 즉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폭력을 통해 사회의 관심을 끌고자 했을 뿐,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를 원하지는 않았다. 한 국가의 국경 내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테러리즘의 경우 테러리스트들은 보통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해 지역 주민 다수의 지지를 염두에 두었고, 따라서 이 지지를 훼손할 인명 살상을 의도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서 일어나는 오늘날의 지구화 시대의 테러리즘은 과거와는 명백히 다른 목표를 추구한다. 새로운 테러리즘은 자신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설정한 사회를 충격과 공포의 상태로 몰아넣음으로써 그 사회의 정치 권력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등장하는 것을 의도한다.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의 무차별적 인명 살상은 사회를 공황 상태로 몰아넣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테러 행위의 목표 자체가 된다. 9·11 테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러한 테러리즘의 극단적인 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으로의 발전은 9·11 테러 훨씬 이전부터 등장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 19쪽, 구춘권, 책세상

  노르웨이 테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위 글에서 말한 메가테러리즘의 모습과 무척 흡사하다는 점에서, 위 글을 인용해 본다. 자신의 주장을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회 자체를 공격하려는 목적으로 변한(차마 '진화한'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못하겠다. 이런 걸 진화라 할 수 있을까?) 테러리즘의 모습은, 노르웨이의 테러를 통해 더 이상 세계 속에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알리고 말았다.
  과연 이런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은 그들의 생각 같은 걸 알고 싶지도 않다는 마음이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 그들이 저지른 것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과연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테러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다양한 주장이 서로 존중받으면서 비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그저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일 뿐인가? 비극적인 현실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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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머리가 매우 좋은데다가 공부도 열심히 한다. 크면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 됐지만 벌써 어른에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매일 착실히 노트에 많은 것을 기록하고 책도 많이 읽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싶은 것이 많다. 우주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 생물이나 바다나 로봇에도 관심이 있다. 역사도 좋아하고 훌륭한 사람의 전기 같은 것도 좋아한다. 차고에서 로봇도 만들어봤고 '해변의 카페' 야마구치 씨의 천체 망원경으로 천체 관측도 해봤다. 바다는 아직 본 적이 없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탐험하러 갈 계획이다. 실물을 보는 건 중요한 일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오늘 계산해보니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3000 하고도 888일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나는 3000 하고도 888일을 나날이 훌륭해지는 거다. 그날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훌륭해져 있을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 너무 훌륭해져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모두들 깜짝 놀랄 거다. 결혼해달라는 여자도 많겠지. 하지만 나는 벌써 상대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결혼해 줄 수 없다.
  미안하긴 하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펭귄 하이웨이> 9~10쪽, 모리미 토미히코(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정신

  잠자려고 눕기 전에 그냥 책을 폈고, 책을 다 읽고,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책을 보고 난 뒤인데, 피곤은 잠깐 뒤로 미루는 게 마땅하리라.
  이 책에 대해서는 감히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작가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일 것이라 생각하고('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막상막하, 어쩌면 조금 더 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올해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데 감사드려야 할 거 같다. 누구에게? 글쎄, 펭귄에게라도?
  위 인용문의 '초딩'은 무척 건방져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초딩이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니, 매일을 어제보다 더 훌륭해지려고 노력하는 아이가, 심지어는 어른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나는 충분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주인공 초딩이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인정해 줄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굳이 말하자면,(이것도 상당히 심각한 스포일러일 거 같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솔라리스'다. 책날개 띠지의 문구를 적당히 가공했다고 화내지 마시길. 정말로 이 말만큼 어울리는 표현을 찾기 힘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꼭 읽어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읽어봐 달라고 조용히 청하고 싶다. 피곤에 절어 있는 사람이 피곤조차 참아가며 횡설수설 글을 써 내려가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어주시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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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로 재주재를 삼고 기독으로 대원수, 성신으로 검을 삼고 믿음으로 방패를 삼'는다는 군사주의적 수사학은 기독교 중에서도 구세군의 교리와 깊은 친연성을 보이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교파와의 연관성이라기보다 민족 담론에서 기독교를 흡수하는 방식이 얼마나 전투적이고 격정적인 것인가를 이 글이 잘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민족 담론은 기독교가 담지한 종교적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충전받고자 했던 것일 터, 결국 종교적 교리와 민족주의의 결합은 민족이라는 표상을 초월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기독교를 믿든 안 믿든, 민족이라는 초월자는 신과 결부된 존재,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어떤 존재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각인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와 더불어 기독교는 민족주의에 청교도적 결벽증을 부여한다. 위의 자료에서도 언급되듯이, 기독교적 논리에 입각하면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도 죄지만, 나라를 빼앗긴것도 죄가 된다-'죄의식', '원죄'라는 관념의 등장. 따라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전 국민이 회개하여 속죄하는 일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국권회복투쟁과 속죄의식의 결합이라?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47~48쪽, 고미숙, 책세상

  솔직히 말해, 이 책의 필자 자체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을 들뢰즈로만 보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무척 흥미롭다. 약간의 들뢰즈 냄새가 풍기는 것을 감수하고 읽는다면, 책에서 말하는 것들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민족이라는 담론이 어떻게 종교적인 관념과 결합을 하는가에 대한 이 논의는,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기독교 극우주의자가 '민족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활동하면,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테러와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의 테러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길게 말하기에는 나의 생각이 부족하다. 다만 민족과 종교라는 '성스러움'을 핑계삼아 희생당해야 했던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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