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명은 먼저 물질적인 속박을 줄이고 점차 정신적인 속박을 풀어야 높이 날고 멀리 나아갑니다. 이때 특정한 방향이 없으면 이전에 이루었던 여러 가지 수양의 노력이 뿌리 없는 나무나 근원이 없는 물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방향'이란 정신적인 고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 태어나고 어디에서 성장하는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자신의 가정환경과 교육환경, 교유하는 친구, 직종은 대체로 나 자신이 자유롭게 고를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 영역은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지요.
  인생에는 방향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향은 정신적인 추구입니다. 그리고 고대인의 지혜를 자양분으로 삼는 겁니다. 이러한 방향을 찾았다면 인생은 놀라운 빛을 낼 것입니다.


<장자 교양강의> 34쪽, 푸페이룽, 돌베개

  고대인의 지혜를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는 주장만 제외하면, 위 글은 참으로 좋은 충고를 해 주고 있다. 노래 가사처럼 '도전은 무한히, 인생은 영원히'라고 하지만, 그 영원한 인생에서 방향이 없다면 그것은 커다란 공허함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방랑하는 사람조차도 방랑의 끝을 알리는 목적지는 존재한다. 그것이 없다면 방랑이라고 할 수 조차 없다. 결국 방향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아가서 스스로 자신의 방향을 잡는 것이 커다란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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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나는 커피숍 '진진당'까지 왔습니다.
  긴장하면서 커피숍의 유리문을 밀어 열자 별세계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나를 맞았습니다. 어둑한 가게 안은 검게 빛나는 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숟가락으로 커피를 젓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선배는 이마데 강 거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마치 봄날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선배는 그 햇살 속에서 턱을 괴고 앉아 어쩐지 낮잠 자는 고양이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배 밑바닥에서부터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공기처럼 가볍고 작은 고양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초원에 누운 기분이랄까요.
  선배가 나를 알아보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나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리하여 선배 곁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392~393쪽, 모리미 토미히코(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정신


  모르던 두 사람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무척 신비한 일이다. 그 인연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헤쳐가다 보면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결말은 무척 인상적인 문장으로 마무리짓는다.(소설의 결말부분을 인용했다고 스포일러를 누설했다 뭐라 하지 마시라. 이 소설은 결말까지 가는 과정을 봐야 하는 소설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 참으로 담백하게 좋은 문장이다. 

  덧. 이 소설의 만화책도 국내에 정발되었다. 만화책 역시 놓치기 아까운 물건이니 한 번쯤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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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올라오면 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그들을 쫓아버리게 된다. 지금의 나는 타인과 이야기하기를 바라는데도, 막상 그들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 우열愚劣함에 혐오감이 치밀고 노여움을 억누를 수 없다. 지금 너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도 여기서 홱 쳐서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이 불끈불끈 치민다.
  지금의 나는 만인을 경멸하는, 알맹이 없는 오만이 사람의 꼴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천구인 것이다.
  이따금 이전의 내가 생각나곤 한다. 지저분하고 좁은 내 방이, 눈앞의 책상에 펴놓은 하얀 종이가, 그리고 그 종이만 있으면 무엇이든 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듯이 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쓸 수 있게 됐다 한들 이 산에서 내려갈 수가 없는데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완전한 고독에 갇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남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고 바라봤자 자신을 헛되이 괴롭힐 뿐이다.


<달려라 메로스> 36~37쪽, 모리미 도미히코, 시작

  이 글의 화자의 모습에서 나는 내 지금의 모습을 본다. 그렇다면 나는 텐구(천구, 일본의 요괴)인가? 나는 아직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남들도 그렇게 여길 것인가?
  타인보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내 속에 가득한가? 그렇지 않다, 고 대답하고 싶지만, 진짜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겠다. 조심스레 처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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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소가 이렇게 만들어진 사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지만 구체적 사실이 국왕의 입에서 이렇게 또렷하게 제시되기는 쉽지 않다. 정조는 상소를 비롯한 정치행위에서 명목과 실상을 분간하고 정치적 배후를 캐는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
  따라서 정조시대 정치에서 벌어진 많은 행위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국왕과 신료들 사이에 공작과 조율이 일정 정도 개입하고 있음을 『어찰첩』은 폭로한다. 그 결과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공식 역사기록과 정치적 행위를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신뢰하지 못할 부분이 일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어찰첩』은 정조시대 사료를 해석할 때 정치적 맥락을 신중하게 고려하도록 촉구한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은 정조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국왕에게도 비슷하게 전개될 개연성이 있다.


<정조의 비밀편지> 78~79쪽, 안대회, 문학동네

  정치의 막후 이야기를 다룬 책들을 보면, 연극이나 드라마 무대의 뒷면을 보는 느낌이 든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담당자들, 감독과 연출, 조연출이 계속해서 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한 연출을 논의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점은 비슷한 듯 하다. 정조가 신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는 따지고 보면 그러한 '쪽대본'이나 다를 바 없는 물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과연 왜 연출이 필요한가? 그냥 단순하게 협상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때로는 서로 의견의 완전히 엇갈려 평행선을 달리기만 할 뿐인 경우도 생긴다. 이때 누군가 나서서 '은밀하게' 다른 이득을 제시하여 한 쪽이 한 발 물러나게 할 필요도 생긴다. 하지만 그걸 공공연히 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한 발 물러난 쪽이 진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드라마틱한 연출이다.
  문제는 이제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에 너무나 길들여져서, 그 드라마가 진실인 것처럼 보는 것이다. 때로는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자신의 드라마를 창작하기도 한다. '정조는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가 등장하고, 명성황후 민씨는 자신과 그 친인척의 커다란 잘못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국모'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러한 드라마의 세계는 어느 순간, 진실보다 포장이 중요시 여기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동북공정'과 '환국'은 그래서 서로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포장이 실제보다 큰 걸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역사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설마 이들은 감자칩을 샀을때 질소가 가득한 걸 보면서 뛸듯이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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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달 착륙을 계획하고, 발전시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인 자본과 노동력, 기술을 갖지 못했다. 러시아(당시 소련)는 우주개발에 대한 투자나 그 후 실제 벌어진 우주경쟁에서 그다지 뒤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본·노동·기술 가운데 어느 한 요소만이라도 빠졌다면 미국이 달 착륙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이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요소를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어떤 국가가 두각을 나타내는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요소를 갖추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이 잘못 쓰이거나 잘못 배분된다면 그 나라는 단지 경제적으로 몰락할 가능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몰락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파산하는 날> 33~34쪽, 담비사 모요, 중앙북스

  자본, 노동, 기술, 이 세가지 요소는 거시경제학을 공부하면 지겹도록 나온다. 특히 경제성장론에서, 솔로우 모형부터 시작되는 다양한 이론이 저 세 가지 요소를 통해 경제성장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 어떤 복잡한 현상도 몇 가지 요소들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간략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경제를 보는 시각에서 자본, 노동, 기술이라는 세 요소로 경제의 구성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뜬금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 요소의 관계는 꽤나 밀접한 듯 하다. 자본만 많다고 경제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이며, 기술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이 세 요소가 모두 필요하며, 적절하게 필요하다는 것이 경제성장이론의 기본이다. 한 국가가 가진 현재의 세 요소의 상태를 통해 그 국가의 경제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현재 상태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요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역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어떠할까? 노동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을 듯 하다. 실업 문제만 봐도 노동의 수요공급 부분에 문제가 있음은 명확하다. 자본 부문 역시 불안정해 보인다. 외국 자본의 잠식 문제, 혹은 부동산 문제 등의 여러 문제가 계속해서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기술은 어떠한가? 기술적 발전에 있어서 점점 그 환경이 열악해져 가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공밀레'라고 불리는 이공계에 대한 홀대와 박대의 모습이 그러한 한 단면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은 꽤 문제가 심각하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성장은 커녕 경제적으로 후퇴를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지게 된다. 이게 그저 겉핥기로만 경제학을 아는 나의 주책맞은 방정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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