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미국의 이민자 노동 제도는 노예 제도가 인기를 끌지 못하는 듯 보이는 이유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노예 제도는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성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알아보기 힘들게 변형된 형태로 이뤄진 것이다. 불법 이주 노동자들은 연한 계약 노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일터에서 자신의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불법 이민자들은 다른 노동자들과는 다르게 고용주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입장이다. 합법적인 이주 노동자라고 해도 그중 일부는 대체 일자리 모색을 금지하는 비자 요건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현재 일자리에 구속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설득력 있는 답은, 평균적으로 노동자들이 너무 저렴해서 굳이 노예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부 근로자들, 예를 들어 은행가 또는 벌이가 좋은 기술을 갖춘 여타의 전문가들은 높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연방 최저 임금은 30년 전보다 낮아졌다. 게다가 국제화 떄문에 제조업자들은 값싼 노동력을 풍부하게 제공받게 되었다. 2010년 3월, 베트남 정부는 월 최저 임금을 73만동(40달러에 못 미치는 액수)으로 올렸다. 노예들도 이보다는 싸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의 가격> 178~179쪽, 에두아르도 포터, 김영사

  노예가 없어진 이유는 인권에 대한 의식 각성 때문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 뿐만은 아닐 것이다. 보이는 노예에서 보이지 않는 노예로의, 혹은 노예에서 노예보다 더 싼 노동자로의 전환 역시 그 원인이라는 주장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경제학의 잣대는 상당히 냉혹해 보이지만(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지만), 세상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하기도 한다. 세상에 한 가지 단순한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하나의 시점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세상에 대한 해석 속에 오류가 생길 가능성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항상 자신의 앎과 배움을 되돌아보고 점검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Q    말이 나왔으니 예우 이야기를 좀 더 해 볼게요. 소환에 앞서 당시 법무부 장관까지도 전직 국가 원수에 대한 예의, 품격 있는 검찰, 뭐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 노력이 있었다고도 평가가 되더군요. 정작 전직 대통령 측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문재인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도는 공손했지요. 그렇지만 예를 들면 박연차 회장하고 무리하게 대질을 하려고 한다든지 그러면 안 되지요. 게다가 이런저런 뒷이야기를 언론에 했지요? 수사 관계자, 익명의 검찰 관계자, 이런 이름으로. 그런 상황에서 예우라는 말을 쓰면 안 되죠.
(중략)

조갑제    아니, 예우를 갖춰서 수사한 것 아닌가요? 강제 연행한 것은 아니지 않아요. 본인이 출두한 거 아니에요? 그것도 한 번 불렀지 뭐 두 번 세 번 부른 것도 아니잖아요. 구속 수사를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 그 이상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 어떻게 예우를 해 줘야 되죠? 그럼 서류 조사만 받나요? 제 삼의 뭐, 호텔에서 수사를 해야 되나요? 아니면 방문 수사를 해야 되나요? 예우를 갖추었던 게 맞는 것 같은데요.


<2009년 5월> 196~198쪽, 김정은, 웅진지식하우스

  조갑제 씨의 말이 맞다. 이는 절차를 지켜서 한 것이다. 옛 역사에도 보면 왕과 황제들이 덕 있는 자들에게 선양을 했다. 후한의 헌제 유협이 위 문제 조비에게 제위를 넘겨준 경우가 그러했고, 위 원제 조환은 서진의 무제 사마염에게 선양했으며, 수 공제 양유는 당 고조 이연에게 양위를 했다. 이는 비단 중국 뿐만이 아니다. 고려 공양왕은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선양을 했다. 이는 옛날 요와 순, 우임금의 고사를 따라 이루어진 정통성있는 절차를 따라 진행된 것이다. 그러니 이 사건 역시 어찌 절차를 지켜서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화흠 같은 선비가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있음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주(楊朱)는 갈림길에서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에서 반걸음만 잘못된 방향으로 향해도 뒤에는 천 리나 어긋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슬퍼서 우는 것이다."


<순자> 392~393쪽,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매일매일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살얼음 밟듯이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그 행동 하나의 잘못이 바른 길을 그른 길로 돌리는 시발점이 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선인이 악인으로 타락하는 경우는 사실 극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자신이 행하던 선에서 조금씩 사소한 악을 하나둘 허용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틀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행하고 있는 악을 선으로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 조금씩이라도 악한 행동 속에 약간의 선이라도 섞으면서 점차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기나긴 시간이 걸릴 것을 각오하고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2011)로 반교리 돌담길은 전장 2킬로미터의 복원사업이 마우리된다. 얼마 전 돌담길보존회장과 이장이 나를 찾아왔다. 동네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청장이라고 부른다.

  "청장님, 감사하고 미안하구먼유."
  "뭐가요?"
  "살다보니 우리는 나라에서 돌담을 다 고쳐주는 혜택을 받았는데 청장님네는 사비로 했으니 미안헌 거쥬."
  "우리집은 외딴집이라 문화재구역이 아니라서 내가 한 건데 뭘 그러세요. 동네 훤해진 거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디 그때 빼놓은 돌담도 다시 하게 해줄 수 읎시유?"
  "이젠 청장이 아닌걸요."
  "그래두 전관예우라는 것이 있다구 방송에서 하데유."
  "그건 법조계 얘기죠."
  "같은 공무원인디 그래두 뭔가 조금은 있갔지유."
  "아, 전관예우 받다가 혼나는 것은 방송에서 못 보셨어요?"
  "그래두 결국은 다 무사하더구먼유 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342쪽, 유홍준, 창비

 

  뒤에서 끼리끼리 주고받으며 '이를 세상이 알 리가 없지.'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러나 옛 말에도 있듯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아니, 벌써 넷이 아는 셈이다. 어찌 그 넷 뿐이겠는가? 아무리 진짜 모습을 감추려고 거짓된 모습을 꾸며서 연기한다 해도, 그 뒤의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결국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변의 진리를 비유하여 옛 사람들은 '하늘의 도'라고 하였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백이와 숙제는 천하의 의인이나 굶어죽었고, 도척은 천하의 큰 도적이나 천수를 누렸다. 하늘의 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탄식했다. 그러나 하늘의 도는 결국 그들의 삶을 후대에 전하여 진정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역사가 판가름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당장 그 사람의 수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밝혀지는 옳고 그름은 더욱 부지기수다. 이럴진대 어찌 감히 함부로 비밀리에 그릇됨을 취하려고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단에 초목을 심어 꽃 한 송이를 보려면 드는 품이 만만치 않다. 잘 심어 뿌리를 안정시키고, 땅에서 양분을 끌어올려 가지와 잎을 틔운다. 가지도 쳐주고 거름도 주며, 때로 버팀목도 세워주어야 한다. 꽃은 그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바른 마음과 도타운 행실은 초목의 뿌리요 줄기다. 이것이 든든해야 힘을 받는다. 고전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는 것은 뿌리를 통해 줄기로 양분을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가지 끝까지 양분이 전달되어야 꽃망울이 부퍼서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운다. 문장은 바로 이렇게 해서 피워낸 꽃송이다. 바탕 공부 없이 꽃만 피우려 들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안된 글쟁이다.


<다산어록청상> 159쪽, 정민, 푸르메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때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다. 그 사람이 남긴 작품은 정말로 좋은데, 그 사람 자체는 그야말로 볼 것 없는 추물인 경우가 그러하다.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행적과, 입에 담을 수밖에 없는 뛰어난 작품의 대비는 역설적이다.
  그러나 징그러운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며, 미남미녀가 죽은 뒤 아홉 추한 모습을 보이며 사라진다. 미와 추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미에서 추가 나오기도 하고 추에서 미가 나오기도 한다. 천한 것으로 아름다움을 만들 수도 있고, 아름다움이 천박함을 돋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 천한 것이 따로 있으니, 예술을 한다는 걸 간판으로 걸고 자신의 추한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사람이 그것이다. 예술이 자신의 악취나는 행위의 근본이 된다는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절로 코를 쥐고 피하고 싶어진다. 대체 이는 어떤 악취이기에 소리와 모습조차 구린내가 난단 말인가?
  단지 이러한 행동을 보면서, 자신이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반면교사를 삼아 열심히 정진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행동을 피하고 바른 길로 가겠다 다짐하여 자신을 갈고 닦으며 아름다움을 피우기를 다짐하여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구린내나는 자들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이 길러지게 되는 셈이니, 이는 좋은 현상인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어찌 예술에만 한정되는 이야기이겠는가? 세상의 모습을 보며, 단지 안타까운 심정을 가슴에 담아둘 수 밖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