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 누나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면서 왜 누나의 얼굴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걸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걸까. 왜 여기에 있는 나만이 여기에 있는 누나만을 특별히 생각하는 걸까. 왜 누나의 얼굴이며 뺨을 괴는 방식이며, 빛나는 머릿결이며, 내쉬는 한숨을 계속해서 보고 싶어지는 걸까. 태고의 바다에서 생명이 태어나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인류가 나타나고, 그러고 나서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설을 세우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론을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것만이, 내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펭귄 하이웨이> 386~387쪽, 모리미 토미히코(모리미 도미히코), 작가정신

  이 책의 중반 이후부터는 잠시도 책장 넘기는 손을 쉴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책의 결말부는 아련하다. 기나긴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결말이다. 나의 심정을 주인공 아오야마는 더욱 더 절실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부는 어디를 인용해도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그나마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법한(혹은 덜 될 법한) 이 부분을 골랐다. 말로 할 수 없는 이 감정은, 말로 할 수 없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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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허생의 이야기에 한두 가지 모순되는 점이 있다고 묻자, 노인은 즉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해설을 하는데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을 하였다. 노인은 내게,
  "자네가 전에 한창려韓昌黎의 글을 읽었는데, 응당……."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자네가 전에 허생을 위해 전기를 짓겠다고 하더니, 응당 글이 완성되었겠지?"
하고 물었다.
  나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고 사과를 하였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내가 그를 '윤씨 어르신'이라고 불렀더니, 노인은 말했다.
  "나는 성이 신辛가이지, 윤씨가 아닐세. 자네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구먼."
  내가 뜻밖의 대답에 깜짝 놀라서 그의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은 색嗇이라네."
  내가 그에게 따져 물었다.
  "어르신의 성함이 어찌 윤영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지금 무엇 때문에 이름을 신색이라고 바꾸어 말씀하시는 건가요?"
  노인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자네가 뭔가를 잘못 알아 놓고는 남에게 이름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겐가?"
  내가 재차 따지려고 했더니, 노인은 더욱 골을 내며 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이 났다. 그제야 나는 노인이 바로 기이한 뜻을 품은 선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혹 망한 집안의 후손이거나, 유가가 아닌 이단의 몸으로 사람을 피하여 자신의 자취를 숨기려는 무리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암자의 문을 닫고 나오자, 노인이 안에서 '쯧쯧'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애처롭게 되었구나. 허생의 아내는 필경 또다시 굶주리게 되었을 터이지."


<열하일기 3> 245~246쪽, 박지원, 김혈조 옮김, 돌베개

  이 글은 '허생전'의 뒤에 붙은 글이다. 허생전은 열하일기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허생전 소설 본문만 알고 있지, 허생전이 어떤 맥락에서 열하일기에 등장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윤영 노인(혹은 신색 노인)의 마지막 말이다. 허생의 아내는 또다시 굶주리게 되었을 터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허생전에서 허생의 아내는 두 번 등장한다. 처음에는 허생이 학문을 그만두고 집을 나서는 계기로, 두번째는 집을 나간 허생을 기다리며 홀로 살고 있더라는 마을 아낙네의 말을 통해서이다. 이야기 전체에서 허생의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왜 여기서 윤영 노인은 허생의 아내를 이야기한 것일까? 왜 박지원은 저 언급을 실은 것일까?
  유가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나왔다. 자신의 몸을 닦고, 그 후 집안(가문)을 꾸려 나가고, 그 후 나라를 다스리며, 그 뒤에야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핵심 도리이기도 하다. 허생은 자신의 재주를 통해서 한 나라의 경제를 들었다놓았다 했으며, 도적떼를 섬으로 데려가 살게 하고 굶주린 왜를 식량으로 구휼함으로 세 나라를 평안하게 했다. 허생은 가히 '치국'을 할 수 있으며 '평천하'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유가적인 입장에서는 그는 가히 완성된 인물이라고도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윤영 노인의 언급이 끼어들어가자, 전체 맥락이 이상해진다. '치국'과 '평천하'를 할 수 있는 인물이 '제가'를 하지 못한다? 하긴 생각해 보면 허생은 10년 기한의 독서도 7년만에 그만두었다. 자신의 '수신'을 끝마치지도 못한 상황이다. 수신도 하지 못하고 제가도 실패한(아내를 굶주리게 만든) 그러한 사람이 치국과 평천하가 가능하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이는 즉 유가의 가장 기본적인 이념을 뿌리부터 흔드는 이야기가 아닌가? 유가가 여태껏 주장해 온 나라 다스리기의 도리가, 그 뿌리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통렬한 논설은 아닌가?
  열하일기는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박지원이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쓴 여행기이다. 이 여행기 속에서 박지원은 조선 선비의 입장을 두둔하는 척 하면서 슬며시 그들의 허례허식을 비난한다. 허생전에서 저 뒤의 언술이 없었다면, 허생은 우리에게 아직도 '아주 능력있는 능력자'로서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 한 마디가 덧붙으면서 허생은 능력자인지 문제아인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그 미스터리함은 윤영 노인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층층이 쌓여 있는 이 글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 될 때는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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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개과改過' 즉 허물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심하게는 처음부터 허물이 없었던 것보다 오히려 낫게 여기기까지 했다. 왜 그랬을까? 대개 사람의 정리란 번번이 허물이 있는 곳에 대해 부끄러움이 변해 분노가 된다. 처음엔 아로새겨 꾸미려 들다가 마침내는 어그러져 과격하게 되고 만다. 허물을 고치는 것이 허물이 없는 것보다 어려운 까닭이다.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마땅히 급하게 힘쓸 것은 오직 '개과' 두 글자뿐이다. 세상을 우습게 보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기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영예를 탐하고 이익을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뜻이 같으면 한 패가 되고 다르면 공격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잡서를 즐겨 읽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요, 새로운 견해 내기에 힘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이 같은 병통들은 이루 다 꼽을 수가 없다. 한 가지 마땅한 약재가 있으니 오직 '개改'란 한 글자일 뿐이다.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정약용, <다산어록청상> 60쪽에서 재인용

  '사숙록'이라는 이 글뭉치의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나의 허물을 고치기 위해, 그리고 작은 생각들을 모으고 정리하기 위해, 때로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돌이켜 보기 위해 이 글뭉치를 써 왔고, 만족스럽건 불만족스럽건 이제 백 일 기한이 일 주일 남았다.
  결국 그 동안 나는 글을 쓰면서 허물을 고쳤는가? 이 답에 그리 당당하지는 못하다. 허물을 고친 것은 그리 없고, 오히려 허물을 더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뿐이다. 하지만 그 동안 몰랐던 나의 허물을 알게 되었고, 사소하게 여겼던 허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수는 있었던 것 같다.
  천천히 허물을 고쳐 나가자. 그 생각을 하며 이 글을 간단하게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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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상황이 이 수많은 학생 피험자들에게 일부는 악의 실천자로, 일부는 병적인 희생자로 탈바꿈시키는 최악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나는 이 지배 시스템으로부터 더욱더 완벽한 변화를 겪었다. 나는 풍부한 경험을 지닌 연구자이자, 성숙한 성인이며, 뉴욕의 빈민굴에서 살아남은 상황 판단과 행동 계획 능력을 갖춘 세상물정에 밝은 어른이다.
  그러나 지난 한 주 동안 점점 교도소의 권력자로 변신해갔다. 나는 권력자처럼 걸었고 권력자처럼 말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권력자를 대하듯 나를 대했다. 그 결과 나는 그와 같은 권력자 중 하나가 되었다. 바로 그와 같은 권위적 인물, 높은 지위를 누리는 독재자, 거만한 우두머리와 같은 인물이야말로 내가 평생 동안 대립해오고 심지어 혐오했던 대상이 아닌가! 그런데 바로 내가 그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선하고 친절한 감독관으로서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지나치게 열성적인 교도관들이 신체적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막는 일이었음을 상기함으로써 나의 양심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한은 결과적으로 단지 교도관으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수감자들에게 좀더 교묘한 심리적 학대를 가하는 쪽으로 그들의 에너지를 돌리도록 했다.
  연구자와 감독관이라는 이중 역할을 맡은 것이 나의 실수였다. 왜냐하면 그 두 역할은 각기 다른,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두 가지 역할을 함께 맡고 있다는 점은 나의 권력을 한층 더 증대해서 우리 교도소를 찾았던 수많은 '외부자'들, 그러니까 수감자의 부모들, 나의 동료들, 경찰, 신부, 기자, 변호사가 이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사람이 일단 상황의 손아귀에 붙잡힌 상태에서는 자신의 사고, 느낌, 행동을 변화시키는 상황의 힘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시스템의 발톱 안에 갇힌 사람은 그저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을 보이면서 시스템과 함께 흘러가게 된다.


<루시퍼 이펙트> 293~294쪽, 필립 짐바르도, 웅진지식하우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을 때, 그 이야기는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었다. 시스템 속에서 사무를 보듯 유대인 학살을 감독한 아이히만의 사례가, 아이히만이 악해서가 아니라 그 시스템 때문에 그렇게 움직인 거라는 이야기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훗날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은, 평범한 사람이 권위에 복종하면 얼마나 엄청난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필립 짐바르도는 이 책에 나온 실험인 '스탠포드 대학 교도소 실험'을 통해 무작위로 죄수와 교도관을 나누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죄수와 교도관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짐바르도의 이 실험은 외부인이 짐바르도 역시 교도관의 그것과 다를바 없는 억압을 부추기는 '악한'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면 예정을 다 채우고 끝냈거나, 영화처럼 끔찍한 결말로 파국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즉, (확대해석을 하자면) 방관자의 입장이었던 자 역시도 시스템 속에서 악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G.K.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서 주인공인 브라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인간인지, 혹은 얼마나 사악해 질 수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이 말을 조금 고쳐 말해 보자. 사람은 자신이 '시스템 속에서' 얼마나 사악해 질 수 있는지 알 때 비로소 '시스템 속에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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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치(Georg Lukacs)가 말했듯, 훌륭한 포토몽타주는 좋은 농담의 효과를 가진다. 하트필드의 수많은 훌륭한 농담들은 나치 연설을 글자 그대로 '번역'해 놓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재미 속에 나치의 흉포함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만세, 버터가 동났다! Hurrah, the Butter is Finished!>(1935년 12월 19일)의 아래쪽에 실린 문구는 괴링의 연설에서 인용한 것이다 괴링은 함부르크에서 행한 연설에서, "철은 항상 한 국가를 튼튼하게 하고, 버터와 돼지기름은 사람을 뚱뚱하게 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하트필드는 배경에 히틀러 사진이 벽지 무늬로 사용되는 가운데, 한 가족이 기꺼이 철을 씹어먹고 있는 장면을 보여 준다.


<포토몽타주> 57~63쪽, 돈 애즈, 시공사

  포토몽타주는 사진들을 오려붙여서 원래 사진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 혹은 상징을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이러한 뜻밖의 만남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의 본성을 더욱더 부가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마 하트필드의 작품은 후자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나는 정치적 언행이 가진 비유법의 요상함을 다시 한 번 본다. 분명 괴링의 저 비유는 개인의 사치보다 국가의 이익을 위한 희생을 우선하라고 요구하는 요지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저 말을 실제 사진을 통해 '글자 그대로(Sic)' 표현하면,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혹시 이는 말로만 하는 정치의 본질은 요상하기만 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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