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털 없는 원숭이 - 인류의 짧은 역사 이야기 ㅣ 과학으로 풍덩 시리즈 2
데즈먼드 모리스 원작, 세르지오 루찌에르 그림, 고호관 옮김 / 아울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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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무슨 책 읽어요?"

"털 없는 원숭이."

"우리를 말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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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을 발견했을 때 마치 세상에 나와 그 책만 존재하는 듯 몰입해서 읽는다. 그러면 여지없이 다가와 책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엄마가 되고 나서 늘어나는 연기력에 만족해 하며 <털 없는 원숭이>를 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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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사람은 어린 침팬지처럼 엄마의 털에 매달릴 수 없어요. 엄마도 자신도 털이 없거든요. 팔이나 손의 힘도 부족하고요. 그리고 울어서 관심을 끄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요. 그래서 웃어요.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강력한 신호거든요. '나 여기 있어요.', '나는 엄마를 믿어요.', '나는 엄마가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털 없는 원숭이,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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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잊을 수 있을까. 걷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가 엄마인 나를 알아보고 함박웃음을 짓던 날을. 왕초보 엄마라 모든 일이 서툴어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던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웃음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두 눈에 먼저 반응한다. 그 뒤에는 입에 집중한다. 주위에 눈과 입이 있는 어른이 많지만, 3~4개월이 되면 엄마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다. 7개월이 되면 엄마의 얼굴을 확실히 알아보고 평생 잊지 않게 된다. 아이는 엄마에게 웃기만 하는 게 아니라 손과 발을 흔들고 몸을 구부린다. 자기를 봐 달라고, 안아 달라고 온 몸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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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 없는 원숭이는 입술로 쩝쩝거리지 않지만, 웃음으로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다고 표현해요. 이 웃음은 소리를 함께 낼 때 더욱 효과가 좋아요. 말은 이렇게 기분 좋은 소리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소리가 점점 정확해지면서 어떤 물체를 가리킬 때나, 과거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내게 되었지요.

털 없는 원숭이,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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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작은 입에서 "(음)마. (압) 빠." 소리가 나던 날을. 어린 아이는 2살이 되면 거의 300단어를 말할 수 있다. 3살에는 900단어, 5살에는 무려 2,100단어를 쓸 수 있다. 동료와 함게 사냥하기 시작한 이래로 사람에게 말하기는 매우 중요했다. 먹이를 가지고 무리로 되돌아가려면 서로 정보를 교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학자들은 침팬지에게도 말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6살이 되어서야 겨우 7단어를 배운 데다 더 이상은 배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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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사람은 도시를 건설하고, 위대한 명화를 그리고, 음악과 시를 짓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커다란 원숭이에 불과하다. 온 몸이 거의 털로 덮여 있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침팬지나 오랑우탄, 고릴라와 비교해서 말하자면 털 없는 원숭이다.

물론 나무를 오르는 일에서는 여전히 침팬지보다 못하지만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생각하고 주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키우고 있다. 우리는 이런 지적 능력을 자랑스럽게 여겨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라 부른다.

현재로서는 털 없는 원숭이를 넘어설 동물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 지구를 호령했던 여러 특출난 동물이 멸종했듯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 <어린이를 위한 털 없는 원숭이>를 통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원시적인 본능을 살피고 더 나은 동물이 될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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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양육의 재발견 - 미디어를 중독이 아닌 몰입의 경험으로 만드는
에얄 도론 지음, 이은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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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당했다. '집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뭐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알아내면 된다는 것. 무엇보다 자녀의 성장을 제대로 지지하기 위해서는 어른인 우리 자신에 대한 깊고 정교한 성찰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또 다시 '나부터 잘하자'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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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인 아이들에게 휴대폰을 사주지 않았다. 이 사정을 아는 옆집 엄마가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그 집 딸 아이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사회 수행 평가 중 하나가 수업 시간에 휴대폰으로 관련된 영상을 보고 댓글을 쓰는 것이었다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을 그들의 '사회 생활'에 끼지 못하게 만든 명분은 확실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내가 바로 스마트폰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들여다 보며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깝고, 매번 후회만 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밤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잠금 설정을 해 두었다. 아이들이 등교한 후에도 몇 번 딴 짓을 하느라 한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나서는 오전 9시부터 10시 30분까지 잠금 설정을 추가했다. 처음에는 나름 효과가 있었다. 나를 옥죄어 시간을 알차게 썼다고 느낀 날에는 나 스스로가 퍽 대견했다. 하지만 문제는 휴대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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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민감기를 겪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수업에 늦지 않으려고 서두르거나 워크북 과제에 쫓기며 중요한 시기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낸다. 학교가 끝난 뒤에도 방과 후 수업이나 또 다른 이상적인 목표를 위한 시간만 주어질 뿐, 정작 아이들이 자신만의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여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AI 시대, 양육의 재발견,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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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아이들의 주간, 월간 일정표 만드는 일을 그만 두었다. 아이들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적절히 배치한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지만 시간대별로 빈틈없이 짜여진 하루가 계획대로 흘러갈 리 만무했고, 주말에나 겨우 한 시간 남짓 끼워맞춘 '자유 시간'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실상 아이들이 자유 시간을 한 시간만 갖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참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브레이크를 거는 일은 언제나 달갑지 않다.

창의적 사고, 전략, 리더십 개발 분야의 전문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기업 강연자인 에얄 도론은 이 같은 상황을 가리켜 '균형에 대한 집착'이라 말한다. 그의 말처럼 한 개인이 삶의 목적이나 열정을 찾아 몰입하는 마법 같은 순간은 주위 사람들에게 불안한 모습으로 비친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모든 건 적당히'를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창의적인 부모는 아이가 선택한 분야에 대해 '균형 잡히지 않은'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몰입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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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하면서 그때그때 알아내면 돼."

순간 나는 마치 수년 간 이해할 수 없었던 뭔가를 발견한 과학자가 된 것 같았다.

'유레카! 바로 그거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알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21세기 교육 혁명이 의미하는 바다. 즉, 규칙에 대한 사전 인지 없이 게임에 몸을 던지고 자신을 믿으며 규칙을 알아내는 것이다.

AI 시대, 양육의 재발견,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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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의 훌륭한 모범 사례로 젊은 유튜버들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은 진지함과 재미, 성숙함과 미성숙, 직업과 취미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같은 새로운 세상은 부모에게도 새로운 사고 전환을 요구한다. 저자 역시 최근 몇 년 동안 유튜브에 푹 빠진 아들을 통제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결국 그 충동을 누르고 아이가 유튜브를 보든 말든 내버려두는 데 성공한 뒤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아이의 영어 실력에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아이가 온라인에서 정보를 찾아 직접 숏품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카페에 간 저자는 각자의 볼 일에 심취해 있었다. 아이는 태블릿으로 게임을 하고, 저자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그간 보지 못했던 복잡한 게임에 빠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너, 전에도 이런 게임 했었어?" 하고 물었다. 아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전까지는 보통의 부모가 그러하듯 자신의 아들이 인내심이 부족한 편이고 난관에 부닥치면 쉽게 포기한다고 생각했던 저자는 이어진 아들의 대답에 유레카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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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그때그때 알아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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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은 정해진 길이 없을 때 오히려 더 잘 성장한다고 말한다. 조직의 기준과 상관없이 내면의 열정을 따라가는 아이들은 명확하지 않은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간다. 이를 위해서는 무언가에 중독된 듯 몰입하는 경험이 절실하다. AI 시대인만큼 그 대상은 미디어가 될 확률이 크다.

중독의 부정적인 면에 익숙한 부모는 겁부터 나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지혜롭고, 즉흥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행복하고, 유연하고, 직관적이고, 개성 있는 어른의 롤모델이 되도록 나를 갈고 닦아봐야겠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양육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가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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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100년 가게 ㅣ 꿈터 책바보 23
소중애 지음, 홍선주 그림 / 꿈터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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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가면 떡볶이도 있고, 시장에 가면 생선도 있고, 시장에 가면 떡도 있고."

시장에 가면 없는 게 없다. 딱히 어떤 목적을 갖고 들르지 않아도 한 바퀴 휘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배부르고 즐거운 것이 시장 구경이다. 크고 화려하고 깨끗한 대형 마트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최신 장난감이 없어 조금 시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100년 가게>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장에 가면 다양한 사람과 풍성한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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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중앙시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아저씨는 늦게 돌아온 것을 후회하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100년 가게,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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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중앙시장의 명물 '4대 기름집'이 있다. 시장 안 모든 사람들은 4대 기름집이 5대, 6대를 넘어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 집 손자인 명한이만 빼고.

명한이는 '오대야.'라고 불리는 것이 싫다. 그렇다고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다. "명한아."하고 이름만 부를 때는 괜찮다. 하필이면 성이 '현'인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명한의 이름은 낚시 미끼처럼 아이들의 비웃음을 낚았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거나 시험 점수가 나쁘면 슬쩍 고개를 저으며 이름을 중얼거렸다.

"으음- 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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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명한은 중앙시장 역사 지도책 만들기 숙제를 하기 위해 종종 드나들던 '구두끈 우동집'으로 향했다. 3년 전 문을 연 구두끈 우동집은 중앙 시장 사람들에게 미운 털이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일단 먹는 음식에 구두끈을 갖다 붙인 것과 알록달록 고운 색 대신 흑백으로 된 간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수타면을 만들면서 호텔 셰프처럼 흰색 긴 모자를 쓰는 것도 흉거리였다. 뭐니뭐니해도 이마의 흉터가 강력한 증거인 사장님 전직 깡패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동집은 문전성시였다. 점심 때나 장날이면 사람들이 버글버글하고 밖으로는 줄이 길게 늘어서곤 했다. 남다른 우동 가락이 눈길을 끌었고 수타라서 우동 발이 쫀득쫀득 맛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징어 먹물을 넣어 반죽한 까만 우동의 인기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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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집 아저씨에게 구두끈 우동집은 아버지를 잊지 않으려는 고집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불편했던 아저씨의 아버지는 앉아서 일을 할 수 있는 구두 수선공이 되었다. 현재 우동집이 있는 건물 지하에서 구두 수선을 하던 아저씨의 아버지는 부끄러움과 불편함을 잊은 채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다리를 절뚝거리는 아버지 흉내를 내며 놀리는 아이들 앞에서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불만으로 똘똘 뭉쳐 있던 아저씨는 어느 날 버릇없는 아들을 매로 다스리는 엄마에게 서운하여 집을 뛰쳐나갔다. 그 후 몇 십년 동안 세상을 떠돌며 인생공부를 했고, 그 사이 아저씨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병세가 깊어 위독한 상태가 됐다. 그제야 집으로 돌아온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저씨의 아버지가 평생 지하실에서 구두를 고쳐 모은 돈으로 산 지금의 우동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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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기름집을 이어받을 마음이 하나도 없는 명한은 돌아올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아저씨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휘영청 달 밝은 밤이었다. 모두 잠든 밤 쿵쿵 소리에 이끌려 가게에 가 보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웬 근육질의 할아버지가 디딜방아에 올라 깨를 찧고 있는 게 아닌가. 오대, 아니 명한이는 오래지 않아 그 분이 흑백 사진으로 보던 고조할아버지임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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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름집을 시작했어요? 난 기름집 하기 싫어요."

둥기둥기 할아버지가 쳐다봤다. 야단치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지레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둥기둥기 할아버지는 말없이 바닥에 박혀 있는 돌확에서 방금 찧은 깨를 긁어 그릇에 담았다. 나머지 깨도 굵은 솔로 박박 긁어 담았다.

"농사지은 사람이 이 작은 깨알 하나하나 거두어들이느라고 시간과 땀을 다 쏟았지. 귀한 것이여."

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100년 가게,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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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명한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소매부터 걷어올리고 기름집 일을 돕는 누나도 고조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가업은 명한보다 기운이 세고 뜻이 있는 누나가 이으면 될 일이다. 요즘 세상에 여자 일, 남자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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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마음이 편하지 않은 명한은 어느 날 손님이 부쩍 줄어든 중앙 시장 골목에 들어서다 무언가 타는 냄새를 맡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곧장 뛰기 시작한 명한은 불이 번지고 있는 4대 기름집을 맞딱드렸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조금 모자란' 석구가 달걀을 구워 먹기 위해 불을 낸 것이었다. 둥기둥기 할아버지, 2대 할아버지, 3대 할아버지와 4대 아빠. 모두 아끼고 사랑하는 기름집이 사라질 위기였다. 명한은 어떻게든 불을 끄려 수도를 향했지만 겁에 질린 석구가 명한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꽈당 넘어지고 만다. 그 사이 불은 점점 번졌고, 할머니가 보름마다 팥떡을 해가며 모시는 족제비 업이 달아나려고 했다. 집을 지켜주는 업을 놓칠 수 없었던 명한은 간절하게 외쳤다.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계속 살아. 5대, 6대, 7대 주욱 우리 기름집을 지켜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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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이 눈을 떴을 때 모두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했다. 발 없는 소문은 금세 시장 안에 퍼져 4대 기름집을 지킨 명한이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나도 불에 타 새까맣게 변해버린 가게 앞을 지나간 일이 있다. 잿더미를 허망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은 가게에 불이 나면 장사가 더 잘 된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맞장구를 쳤다. 전화위복이라도 믿어보는 수밖에.

"속상혀 ? 넌 천상 기름집 손자여. 난중에 현명한 기름집 사장이 될겨."

싫어했던 이름을 싫어하는 기름집 사장과 함께 불리웠는데 이상하게 명한은 싫지 않았다. 기름집에 애정이 많은 누나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누나와 기름집을 함께 이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니 스스로 기특해서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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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 오대가 있잖아요.'

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100년 가게,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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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경청
김주현 지음, 오승민 그림 / 만만한책방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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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은 하나, 귀는 두 개. 한 번 말하면 두 배로 들어야 하는데 대체 그것이 왜 이리 어려운 건지. 나보다 삶의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말을 흘려 듣고는 한다. 내 기준에서 '쓸데없는' 말을 듣기 보다 나의 산 경험을 나눠주고, 그래서 아이들의 실패를 줄여주고자 하는 빗나간 욕심 때문임을 알고는 있다. '욕심쟁이 엄마 대회' 이런 건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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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앞표지에는 <커다란 경청>이라는 '길쭉길쭉한' 글씨가 있다. 책 안에도 다양한 꾸밈말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파도처럼 간질간질, 오돌토돌한 사랑, 납작한 무례, 뱅글뱅글 복수, 가지가지 아름다움, 담백한 사과, 축축한 실수, 포슬포슬한 죽음, 오락가락 코끼리. 단어 수집가인 분홍 코끼리는 어딜 가든 수첩과 연필을 들고 다니며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발견하고 모으듯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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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에서는 살이 투실투실 찐 게 아름다운 거고, 어떤 곳에서는 삐쩍 마른 게 아름답고, 어떤 곳에서는 까만 게, 어떤 곳에서는 하얀 게 아름답고. 가지가지 아름다움이네. 어때? 가지가지 아름다움?"

커다란 경청,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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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워!"

돌멩이와 여행하던 코끼리가 송충이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다리가 많은 곤충들을 보면 제 몸 위로 근질근질 올라올 것 같고 그냥, 왠지 조금 무서웠다.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다리 수상자'인 송충이는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말을 더듬거리는 코끼리를 빤히 보았다. 얼굴에 달린 기다란 코, 넓적하고 팔랑이는 큰 귀 역시 송충이의 눈에는 징그럽고 무서웠다.

"낯설어서 그래. 나랑 다른 것들은 낯설거든. 낯설면 두려워하게 돼. 하지만 알고 나면 두렵지 않지. 그냥 다른 것뿐이니까."

알쏭달쏭한 돌멩이의 말에 코끼리와 송충이는 생각에 잠긴다.

"아름답다, 아니다, 기준은 뭘까? 정말 궁금하네.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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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는 한 때 스타의 등용문이었다. 똑같은 색의 수영복을 입고, 비슷한 헤어 스타일을 한 채 전통처럼 내려오는 정해진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움을 평가받는 자리. 유치원 재롱잔치 같은 과정을 거쳐 진선미를 기준으로 선발된 미녀들은 드라마와 영화 등에 섭외 일순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에 순위를 매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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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 수학 시간에 '분류하기'를 배운다. 그 단원의 단골 문제는 '다음 중 분류 기준으로 알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하는 유형이다. 색깔, 모양, 구멍의 수, 바퀴의 수, 크기. 정답은 크기다. 개미 입장에서 본 사탕의 크기와 코끼리의 시선으로 본 수박의 크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너무 오래 전에 배운 내용이라 그런지 어른이 된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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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돌멩이야. 넌 참 작고 특별한 돌이구나.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데, 조그만 너는 커다랗게 들어줬어. 누군가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건 커다랗게 두 팔로 안아 주는 기분이야. 고마워, 네가 해 준 말을 꼭 마음에 넣어 두고 다녀야겠어. 이제 눈물이 쏙 그쳤어. 이제 안 속상해. 이상하게 너한테 말하고 나니까 마음이 가벼워졌어. 고마워, 특별하고 소중한 작은 돌아."

커다란 경청,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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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주 잊는 것 하나. 답답한 속이 풀리는 것 같고, 단단하던 것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고, 바닥을 치고 다시 솟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기분. 누군가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을 때의 그 고마운 마음. 커다란 두 팔에 폭 안기는 따뜻한 기분. 이 세상에 그 사랑받는 느낌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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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면 <커다란 경청>은 어린이를 위한 책이다. 하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어릴 때 봤던 동화를 잊고 지내는 어른을 위한 책인 것 같다. 간단하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만큼, 나도 하던 일을 내려놓고, 눈을 맞추며 온 마음을 활짝 열자. 그리고 경청하자. 분명 서로의 마음이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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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들어줘서 고마워.

누군가 내 말을 들어 준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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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고요 - 자연의 지혜와 경이로움을 담은 그림 에세이
보 헌터 지음, 캐스린 헌터 그림, 김가원 옮김 / 책장속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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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느 집들이에 초대받아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오래된 농가 주택을 멋들어진 한옥으로 개조했는데 안팎 곳곳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낼만큼 세심하고 아름다웠다. 설계와 인테리어 전반을 맡은 분들은 다름 아닌 중년의 남매였다. 순간 손가방 안에 있던 <낯선 고요>가 생각났다. 남동생인 보 헌터가 글을 쓰고, 누나인 캐스린 헌터가 그림을 그린 책이었다. 3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는 나는 의구심을 가득 담아 물었다.

"어떻게 남매가 같이 일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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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캐스린도 제 뒤를 따랐습니다. 옐로스톤에서 보낸 첫 여름, 그녀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죠. 오랜 세월을 거친 옐로스톤의 매력은 쉽사리 캐스린을 놓아주지 않아, 결국 그 곳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머물게 되었죠. 캐스린의 예술은 언제나 우리 곁의 자연을 품고 있고, 마음은 언제나 그 고지대 어딘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낯선 고요,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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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분이 환하게 웃으며 오빠와 일하는 방식이 잘 맞는다고 하셨다. 여기에 무언가 부족하다 싶으면 오빠가 그것을 들고 나타나는 일이 많다고 하셨다.

<낯선 고요>를 만든 헌터 남매는 앨라배마주 디케이터의 테네시 강변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그곳의 숲과 물길을 함께 탐험하던 모험 가득한 날들의 추억은 여전히 그들 사이를 끈끈하게 한다. 어른이 된 그들은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암컷 무스가 새끼를 낳는 장면과 밤하늘을 향해 수백 피트 높이로 뿜어져 나오는 간헐천 등을 지켜보며 자신이 이 행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삶과 죽음의 활동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그 곳은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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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우리에게 말없이 일러줍니다. 지금 당장은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고요.

낯선 고요,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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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이들과 번데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번데기 안에서 애벌레의 몸이 완전히 분해된 후 다시 나비로 성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듣기만 해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 움직임도 없어 보이는 번데기 안에서 그토록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니.

그렇게 탄생한 나비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나비 효과'라는 말을 접하고 나서다. 1961년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즈는 리우데자네이로에서 한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며칠 후 시카고 어딘가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흥미로운 개념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혼돈 이론의 핵심인 이 발상은 당시 과학계의 중심이던 아이작 뉴턴의 '시계 태엽 우주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었다. 뉴턴은 모든 것이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모든 현상이 예측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로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비의 날갯짓이 토네이도를 막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작이 전혀 다른 결말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 팔랑팔랑 날갯짓하며 꿀을 따러 다니는 배추흰나비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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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담긴 아름다운 그림과 빛나는 이야기를 감상했다면, 주저 말고 밖으로 나가세요. 그리고 당신만의 경이로운 세상과 마주하세요.

낯선 고요,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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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길수록 보 헌터와 캐스린 헌터가 크고 작은 자연의 곁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보이는 것 너머를 생각하며. 요즘 내가 가장 못하는 일이자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가을이 갈수록 짧아진다고 불평할 시간에 편한 운동화를 신고 나가 걸어야겠다. 뛰어 다니느라 놓친 '낯선 고요'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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