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필사북 - 이동진 평론가 추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건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들과 그림책을 보며 생긴 습관이 있다. 책을 읽기 전 앞뒤 표지를 쫙 펼쳐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앞표지만 봤을 때보다 흥미롭고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커진다.

<무진기행 필사북>은 좀 색다른 경험이었다. 앞뒤로 펼치기 쉬운 필사책이라 힘들이지 않고 마치 무용수가 다리를 일자로 찢듯 펼쳐 들었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무진의 안개'라는 문구와 뿌연 해안가를 걷는 누군가의 뒷모습. 이 표지를 보고 난 무엇을 기대해야 마땅할까. 익숙해지지 않는 낯섦에 한동안 표지를 넘기지 못한 채 벌받는 심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가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을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갸,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기행 필사북, 16쪽

"소설 쓰기를 시작하는 이라면 한 번은 반드시 <무진기행>을 필사해야 한다."

모든 소설가와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의식이 있다고 한다. 문장이 막히고 자신이 쓴 글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 혹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한국어의 정수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싶을 때 조용히 원고지와 펜을 꺼내 들고 마주하는 단 하나의 텍스트. 바로 작가 김승옥의 문장이다.

<무진기행>은 1964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중년 남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시대와 상황에 걸맞은 만남과 대화가 이어진다.

'백이 좋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남자는 장인 어른의 든든한 지지를 받으며 승진을 앞두고 있다. 오랜만의 고향행을 제안한 것은 그의 건강을 염려한 아내였다.

"당신 안색이 아주 나빠져서 큰일났어요. 어머님의 산소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무진에 며칠 동안 계시다가 오세요. 주주 총회에서의 일은 아버지하고 저하고 다 꾸며놓을게요. 당신은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쐬고 그리고 돌아와 보면 대회생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되어 있을 게 아니에요?"

무진은 바다와 가까이 있는 농촌 마을이다. 이렇다 할 명산물 하나 없지만 오륙 만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무진이 고향인 남자에게 무진하면 떠오르는 것은 '안개'다.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같은,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바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람들의 힘으로는 헤쳐 버릴 수 없는. 무진의 안개 앞에 무력하지 않을 자 누구인가.

"세상에 착한 사람이 있을까?"

나는 방으로 불어오는 해풍 때문에 불이 꺼져버린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이며 말했다.

"절 나무라시는 거죠? 착하게 보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착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우리가 불교도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착한 분이세요?"

"인숙이가 믿어주는 한."

무진기행 필사북, 102쪽

인숙이라는 여자가 등장하면서부터 불안했다. 설마,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지만, 남자와 여자는 만난 지 하루 만에 '사랑'을 이야기했다. '님'과 '남'은 점 하나 차이라지만 이건 아니지.

무진을 떠나고 싶었던 여자에게 서울 냄새 나는 남자는 자신의 탈출을 도와줄 구명 보트에 지나지 않는다. 남자에게 여자는 무엇이었을까. 성악을 공부한 음악 선생님이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는 작부들이 부르는 노래같은 꺾임과 그 특유의 청승맞음이 없었다. 자살한 술집 여자의 시체를 향하여 이상스레 정욕이 끓어오른다는 이 남자는 누구인가.

남자에게 무진은 '일탈'을 꿈꾸게 하는 곳이었다. 뒤죽박죽 엉뚱한 공상이 가능한 곳이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무진에서만큼은 아무런 부끄럼 없이, 거침없이 해내곤 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들이 밖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진 뒤 남자의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었던 걸까.

이 소설은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시작한다. 또 무진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끝난다. 무진으로 들어갈 때도, 무진에서 나올 때도 버스는 덜컹거린다. 우리의 인생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친다. 그 나약함을 들키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남자가 믿는 것은 무진의 안개였는지도 모르겠다. 정의롭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릴 수 있는.

1960년 대, 한국 문학계에 김승옥이라는 청년이 등장했을 때 평단은 그를 두고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김승옥은 최초의 한글 세대로 한글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인 현대적 문체를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명사와 형용사의 신선한 결합, 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단락 전체를 관통하는 쓸쓸하면서도 매혹적인 호흡. 김승옥의 문장을 손으로 써 내려가다 보면 작가가 단어를 고르고 배치할 때 느꼈을 짜릿한 '창작의 순간'과 심장 박동을 공유할 수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정중한 독서법인 필사의 유익함이다.

나만의 필사 공책이 있다. 책을 읽다가 도저히 따라 쓰지 않고는, 남겨두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문장을 만날 때 보물을 묻어두듯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쓰곤 한다. 그것을 오래 묵혔다 어느 날 꺼내 보면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더해질 때가 있다. 아마 내 삶의 무게만큼이겠지. 50대가 되어 읽을 <무진기행>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정식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 흔들리는 중등 수학을 단단히 잡아 줄 든든한 길라잡이 막힐 때마다 꺼내 보는 중등 수학책 1
2S진(이성진) 지음 / 팜파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고 수포자의 마음은 수포자만이 알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인 이성진을 숫자, 영어, 한글을 조합해 '2S진'이란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도 우리 편이'었'다. 우리는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라며 미련 없이 돌아섰지만 저자는 달랐다. 수학을 포기해 봤던 경험에 특유의 창의력을 더해 수학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을 갖추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수학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연구하던 그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발견하고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 정수의 덧셈과 뺄셈을 시각화한 '시소 모델'이 그것이다. 또 인수분해 없이 이차 방정식의 해를 찾는 '인수분해 대체 풀입법'도 찾아냈다.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더니 수학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뛰어본 사람답다.

등학교에서는 ▢를 '어떤 수'라고 불렀지만, 중학교에서는 x를 '미지수'라고 합니다.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수라는 뜻이지요.

방정식부터 헷갈리기 시작했다, 11쪽

아이들의 학령기가 다가오면 거쳐야 할 관문이 하나 있다. '맘마는 밥, 까까는 과자, 쉬는 소변'처럼 유아어를 어른의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언어는 대표적인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국어가 기본이 되는 교과 과목도 마찬가지다.

중학생이 되면 수학 시간에 '방정식'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초등학교에서 그 맛을 보았다.

초등 과정에서는 어떤 수를 라 하여 ' 3+▢ =8'과 같은 식을 만든다. 이 외에도 초등학교에서 사용했던 □,△,○ 등은 중학교에서 a, b, c, x, y 등으로 대체된다. 또 방정식이 참이 되게 하는 네모의 값, 즉 문제의 답은 방정식의 '해' 또는 '근'이라 표현한다. 즉 '어떤 수 □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 대신 '해를 구하시오'로 바뀐다.

방정식의 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음수의 덧셈과 뺄셈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때 바로 저자의 '수포자'로서의 이력이 빛을 발하게 된다. 2+3을 계산하기 위해 수직선 위의 점 2에서, 0부터 시작하는 수직선의 일부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세운다. 그리고 세운 수직선 위에 더하는 수인 3을 표시한 뒤, 아래로 떨어뜨리면 비스듬한 수직선 위의 수 3이 처음 수직선 위 수 5와 맞닿는다. 이 방식대로 5-4를 계산해 보면 수직선 위의 5에서, 0부터 시작하는 수직선의 일부분을 왼쪽으로 비스듬히 세운다. 그 위에 수 4를 표시한 뒤 아래로 떨어뜨리면 처음 수직선 위 수 1과 만난다.

이렇게 더할 때 사용한 수직선의 일부를 '더하기 시소', 뺄 때 사용한 수직선의 일부를 '빼기 시소'라고 한다. 자신처럼 수학을 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학생이 없기를 바라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을 선생님의 노고가 그려지는 듯하다.

매번 숫자를 일일이 넣어 해를 찾을 수는 없잖아요. 이런 방정식을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등호를 기준으로 한쪽에는 문자만, 다른 한쪽에는 숫자만 남기는 것'이에요.

방정식부터 헷갈리기 시작했다, 41쪽

일차방정식의 꽃은 자리 재배치라 할 수 있다. 이때 '양변에 같은 수를 곱하거나 나누어도, 혹은 양변에 같은 수를 더하거나 빼도 등식은 성립한다'는 공식을 이용한다. 보통 등호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문자, 오른쪽에는 숫자를 쓰는데, 양변에 같은 수를 더하거나 뺄 때는 미국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세로셈'을 이용하면 더 편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배우는 연립방정식을 푸는데도 세로셈이 쓰이므로 미리 익숙해지도록 연습하는 것이 좋겠다.

'2S진' 선생님이 수학 교사가 된 것도, 이 책을 쓴 것도 단 하나를 위함이었다. 기계적으로 풀이 방법을 익혀 답만 구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방정식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며 더 나아가 학생들이 수학의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

예비 중학생의 수학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만난 '막힐 때마다 꺼내 보는 중등 수학책' 시리즈, 그 중 첫 번째 편인 방정식 이야기에 홀딱 반했다. 책 뒷날개에 보니 도형과 함수에 대한 책도 출간 예정이라 하니 든든한 마음으로 기다려봐야겠다. 중등 수학에서 헤매기 쉬운 세 가지 고비, 방정식! 도형! 함수! 악명 높은 세 고비를 수월하게 넘게 도와줄 핵심 개념책 만만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 서성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 강태공으로 알아보는 천하를 낚는 삶의 태도 동양철학전집 고전보감 시리즈 2
강태공 지음 / PHILO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적한 호수. 70대 노인. 바늘 없는 낚싯대.

누구 하나 눈길 주지 않는, 제대로 빛을 내본 적도 없는 그를 찾아온 문왕은 수레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겠지만 초야의 늙은이는 굽실거리지도,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구구절절 읊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묻는 군주에게 묻는 만큼만 답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문왕은 그날 강가에서 노인과 대화를 나눈 직후 그를 자신의 수레에 나란히 태우고 왕실로 돌아갔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군주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늙은이를 자신의 수레에 동승시킨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대우다.

운명이 아니라 준비된 만남이었다. 그는 운이 좋아 왕을 만난 노인이 아니다.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만난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 서성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9쪽

강태공. 흔히 세월을 낚는 이로 비유되는 그는 어느 날 사냥을 핑계로 위수(渭水)까지 찾아온 문왕과 조우한다. 모르는 이는 이 만남을 하늘이 점지한 신비로운 운명이라 하지만 실상은 두 사람 모두에게 철저히 준비된 순간이었다. 한 사내는 칠십 년동안 자신의 칼이 녹슬지 않게 닦아 왔고, 다른 사내는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왔다.

사실 강태공은 상나라의 폭군 주왕 밑에서 잠시 관직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 조직이 구제 불능임을 간파했고,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이미 쏟은 정성과 세월이 아까워 그 자리를 맴도는 심리, 어긋난 관계, 끝난 꿈에 매여 있음을 가리키는 미련은 그의 사전에 없는 말이었다.

강태공은 침몰하는 배에서는 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혈혈단신이 된 그는 다시 강가로 돌아가 빈 낚싯대를 드리웠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뒷걸음질이었지만 그의 방향성으로 보면 다음 판을 위한 정확한 자리 잡기였다. 그에게 거절은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자기 선언이었던 것이다.

강태공이 단호하게 끊어낸 것은 실패한 과거가 아니라, 그 과거를 끝없이 되돌아보려는 마음의 관성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 서성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51쪽

이 책의 다섯 번째 소제목은 이렇다.

'헛된 가정을 버려야 진짜 삶이 시작된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문해력이고 뭐고, '그럼 이혼?'이라는 생각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막을 사이가 없었다.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들을 낳지 않았더라면. 결혼을 하더라도 이 분과 하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약에'는 현실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 뿐이다.

책에서 말하듯 이와 같은 헛된 가정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결코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 그 길로 갔더라면 더 행복했을 것이라는 가정에 반박할 근거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장을 끝없이 되뇌고, 끝없이 부풀린다. 가지 않은 길은 늘 더 환하고, 만나지 않은 사람은 늘 더 따뜻하며, 잡지 못한 기회는 늘 더 결정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가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선택한 길 위에서 또 다른 가정을 만들어 내고 말 것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후회와 가정은 다르다. 후회는 지난 선택에 대한 평가고, 가정은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망상이다. 따라서 후회는 다음 선택에 대한 자료가 되지만, 가정은 다음 선택을 지연시킨다.

긴 세월 자신만의 방향을 향해 나아간 그에 관한 글을 읽고 얻은 위로는 '냉정함'이었다. 천하의 강태공이라지만 어찌 후회와 가정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는 엎질러진 물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그 물을 퍼담아 넣으려는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말했다.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 저 쪽 우물로 가라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명징한 직시가 어떤 따뜻한 위로보다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련을 베어 내는 책이다.

어느 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헐리우드 배우인 덴젤 워싱턴은 "Fall forward!"라고 말했다. 동지여, 그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그 사람은 이미 떠났다.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끝이라고, 끝!

정신차려, 이 친구야! 정신 차려, 나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산의 기록법 - 평범한 생각을 가장 강력한 지적 자산으로 바꾸는 힘
조윤제 지음 / 오아시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장 18년이다. 알다시피 정약용은 또 다른 귀양지였던 탐라(지금의 제주)로 가는 길목이었던 탐진(지금의 강진)에서 무려 18년을 보냈다. 세상을 원망하며 미쳤다 살아났다를 대여섯 번 해도 남아도는 시간이었다. 그 아수라장에서 다산을 버티게 한 것은 '기록'이었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긴요히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산의 기록법, 16쪽, <자찬묘지명>

1818년, 18년의 귀양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간 정약용은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을 썼다. 묘지명이란 한 사람이 죽은 후 가까운 사람이 그의 삶을 기리고 행적을 남기기 위해 쓰는 글이기에 다산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다산이 학문의 성과는 물론 자기 삶의 대해서도 모두 기록으로 남긴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거의 책 한 권에 달하는 <자찬묘지명>에는 다산의 삶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 있다. 오랜 귀양 끝에 그리던 집에 돌아와 지난 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며 쓴 묘지명이기에 더욱 뜻깊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자찬묘지명> 뿐 아니라 다산의 글은 유교 경전에 충실하면서도 200년 전의 구닥다리가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글이다. 그리하여 그의 글은 당대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다산의 글 안에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회로 삼는 법, 생각과 성찰과 지식을 모아 하나의 지적 결과물로 남길 수 있는 길이 있다.

다산은 조선 후기 가장 뛰어난 유학자이지만 또한 실용을 중시하는 실학자였다. 모름지기 기록은 실제 삶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현실을 살아갈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고 보았다.

다산의 기록법, 19쪽

"너 T니?"

요즘이었으면 이런 핀잔을 들으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산에게 기록이란 '가치 있는 삶'의 다른 이름이었다. 때문에 그는 고된 귀양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을 이롭게 할 만한 글을 쓰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 기록물들에는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들어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그를 존경하며 그의 글을 읽는 이유이다.

다섯 번째에는 하루를 묵힌 뒤 읽는다. 시간은 가장 정직한 편집자여서, 어제의 내가 보지 못한 허물을 오늘의 나에게 보여준다. 다산이 귀양 초기의 울분 속에서 쓴 <매씨서평>을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읽고 감정이 지나쳤음을 깨달을 수 있었듯, 시간을 두고 글을 다시 살피는 건 좋은 퇴고 방법이다.

다산의 기록법, 124쪽

<다산의 기록법>에는 누구나 따라해 볼 수 있는 다산의 기록법이 몇 가지 소개돼 있다. 가장 쉽게 기록을 시작하는 3단계, 기록을 책으로 만드는 3단계, 나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3단계, 다음 세대로 기록을 전송하는 3단계다. 그 중 기록을 책으로 만드는 3단계 중 3단계인 퇴고에 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퇴고의 첫 단계는 소리내어 읽기다. 눈으로는 매끄럽던 읽히던 문장이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두 번째 단계인 독자의 눈으로 읽는 것과도 같은 맥락인데, 몇 달 혹은 몇 년을 내가 쓴 글을 들여다 보면 그 안에 갇히는 모양이 된다. 때문에 밖에서 안을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덜어내며 읽기다. 누군가 '초고는 버리려고 쓴다'는 말을 했듯 수정의 수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 글이 탄생한다. 그 과정에서 주로 할 일은 더하기보다 빼기다. 없어도 뜻이 통하는 문장, 반복해서 말한 이야기, 의미 없이 단순히 자랑을 위해 넣은 인용구 같은 것들은 과감히 덜어낸다.

네 번째는 단어를 바꿔 보며 읽는 것이다. 글의 가장 기본 단위인 단어는 적확한 자리에 정확한 방식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쓸모를 얻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입에 익어 편하게 사용하는 말이라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사용해야 한다.

위에 인용한 다섯 번째 단계까지 마친 뒤에는 완성된 글을 가장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최종 확인을 부탁한다. 정약용은 책 한 권을 완성할 때마다 흑산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형, 정약전에게 보내 냉정한 평가를 요청했다. 그때마다 겸손한 태도로 아낌없이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 이 과정을 통해 다산의 글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고,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에게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실질적인 물음에 대한 유용한 대답이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기록하며 살고 있다. 잠들기 전 내일 해야 할 일을 적고, 갑자기 생긴 일정을 추가하고, 아이들에게 어른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미안하다는 편지를 쓴다. 도대체 난 왜 이럴까 하며 눈물 자국 위에 흐린 글씨를 쓰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훗날 하나의 기록물로 남겨진다면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고질라처럼 불을 뿜어댄 한 괴물이 아닌 읽고 쓰는 것을 사랑했던 한 사람, F와 T가 시의적절하게 잘 발현됐던 사람으로 회자되면 참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니베이킹
김다인(머니바게트) 지음 / 모티브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식 얘기엔 '껄껄껄' 로 시작해야 제 맛이지.

때는 바야흐로 막 스무 살을 넘겼을 때였다. 도서관 곳곳을 기웃대다 경제 관련 도서에까지 이르렀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던 제목들을 눈으로 훑어가다 슥 꺼내 본 <4개의 통장>.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 씨앗 하나만 가지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용도에 따라 통장을 쪼개라고 하지만 통장에 넣을 돈이 없었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은행보다 이자를 조금 더 받기 위해 증권사 CMA로 옮겼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입출금을 위해 동네 증권사를 들락거리던 어느 날, 한 직원이 내게 '펀드' 이야기를 꺼냈다. 투자에 서툴거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펀드 매니저가 대신 투자를 해 준다는 거였다. 그 분이 건네준 유인물을 꼼꼼히 읽던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다는 문구 때문이었다.

워런 버핏의 투자 제 1 원칙은 '돈을 잃지 않는다.' 이다. 두 번째 원칙은 '첫 번째 원칙을 잊지 않는다.' 이다. 나는 아예 투자를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돈을 잃지 않겠노라 다짐했고, 그 뒤로 20여 년을 주식 쪽으로는 머리도 두지 않았다.

그때 S&P500을 사 둘 껄껄껄.

그 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화려하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고, 심지어 좀 지루하다. 하지만 확실하다. 20년 후 걱정 없는 노후를 만들 수 있는, 수학적으로 증명된 경로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일확천금의 꿈을 버려야 한다.

머니 베이킹, 11쪽

처음 주식을 시작하고 대부분이 그렇듯 급등주와 테마주를 쫓아다녔다. 당일 가격 제한(상한가)까지 도달했다는 의미인 '상쳤다'를 몇 번 경험하고 나니, '후훗. 금방 부자되겠는 걸.'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하지만 깊은 마이너스의 계곡을 경험하고, 워런 버핏의 연 평균 수익률은 10%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S&P500' 이라는 것도.

투자의 귀재,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워런 버핏은 오래전부터 개인 투자자들에게 개별 종목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S&P500 인덱스 펀드에 투자하라고 권고해 왔다. 이에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에게 '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2007년 그는 헤지펀드 전문가들을 상대로 "10년 동안 S&P500 수익률을 이길 수 없을 것" 이라며 100만 달러를 걸었다. 월가의 천재들이 운용하는 헤지펀드, 수십 명의 애널리스트, 최첨단 알고리즘, 수조 원의 자금. 이들이 10년 동안 전력을 다해 운용한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S&P500 인덱스 펀드 7.1%

헤지펀드 평균 2.2%

S&P500의 압승이었다. 놀랍게도 월가의 천재들은 시장 평균 이익률도 넘기지 못했다. 이유는 명료했다. 수수료 때문이었다. 헤저펀드는 운용보수 2%에 성과보수 20%를 가져간다. 아무리 잘 운용해도 이 비용을 빼면 시장 평균에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자산의 10%는 단기 국채에, 90%는 저비용 S&P500 인덱스 펀드에 투자하라."

세계 최고의 투자가가 자신의 아내에게 남긴 유언이다. 더 이상 말해 뭐 해.

역사적으로 S&P500에 20년 이상 투자했을 때 손실을 본 사례는 한 건도 없다고 한다. 54년 간 416개의 20년 투자 구간을 분석한 결과 최악의 시점에 투자해도 72.47%의 수익을 얻었다. 운 좋게 최고의 시점에 투자했다면? 1,337.7%의 수익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버핏이 강조하는 투자의 본질은 리스트를 지불하는 도박이 아니라, 우량한 지수에 '시간' 을 지불하여 복리의 마법을 누리는 것이다.

단타의 또 다른 치명적 문제가 있다. 시장을 자주 드나들다 보면, 주식 시장 전체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최고의 며칠'을 놓칠 확률이 높아진다.

머니 베이킹, 27쪽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식' 하면 일명 '단타' 를 떠올린다. 이는 주식 가격이 일시적으로 떨어졌을 때 샀다가 조금 반등하면 바로 파는 것을 말한다. 손가락이 빠른 사람이라면 하루에 소고기 값 이상을 벌 수도 있기 때문에 꽤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언한다. 단타를 하면 결국 돈을 잃게 된다고.

주식 시장 수익은 극소수의 날의 집중돼 있다. 그리고 그 '최고의 날'은 대부분 예측 불가능한 시점에 찾아온다. 주로 하락장 끝부분이나 약세장에서 갑자기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주식 시장의 최대 상승일 10개 중 8개는 하락장 한복판에서 발생했다.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장은 가장 크게 반등한다. 공포에 질려 시장을 떠난 단타꾼은 이 반등을 놓치게 된다.

이는 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최악의 날 10일을 피하면서 동시에 최고의 날 10일도 놓치는 것보다, 두 가지를 모두 겪는 것이 수익률이 높다. 왜나하면 최고의 상승일의 평균 상승폭이 최악의 하락일의 평균 하락폭보다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자주 드나드는 것보다 수학적으로 유리하다.

어찌 보면 주식은 간단하고 쉽다. 싸게 팔에 비싸게 팔면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언제가 싸고, 언제가 비쌀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주식 시장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다 보면, 오르는 날도 있고, 내리는 날도 있고, 그러면서 결국은 점점 올라갈 것이다. 물론, 종목 선택을 잘 했다는 가정 하에.

'껄껄껄' 로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그것으로 하겠다.

10여 년 전, 삼성이 여러 가지 문제로 시끌시끌했었다. 그때 갑자기 삼성 전자 주식이 얼마인가 찾아보았다. 45,000원이었다.

"여보, 내 생각에 삼성 전자 주식이 이것보다 더 내려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좀 사 볼까요?"

"에이, 하지 마요."

그때 삼성 전자를 사 둘 껄껄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때 삼성 전자 주식을 샀더라도 AI 산업의 광풍이 시작될 때까지 팔지 않고 보유했을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을.

저자의 말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좋은 자산을 샀으니 오래 들고 가겠다. 가장 중요한 시작을 했으니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한 가지. 내가 투자를 시작한 이유를 잊지 않기. 돈 걱정 없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삶.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삶. 커다란 빵을 구워서 진열장에 넣어 두고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 그것이 바로 <머니 베이킹>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